뭐 예상했던 바이지만, 전국이 파란색으로 뒤덮히게 됐습니다. 아, 정말 예상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투표 전에 이번 선거의 의의는 여당이 얼마나 박살이 나는지 기록을 세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결국 기록을 세웠군요.
한마디로 정치불신이란 거겠죠. 정치판에서 일하는 놈들은 다 똑같은 놈들이란 인식이 이렇게 민주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서 확인된 경우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추행에 공천비리에 뭐 별의 별 거 다 걸린 한나라당이 이렇게 올라올 리가 없는 거죠.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자축연의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국민이 능력 없는 개혁 보다는 비리가 있어도 능력이 있는 자를 원했다.'
글쎄요. 도대체 어딜 봐서 한나라당이 능력이 있다고 하는 건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은 철저하게 현 여당에 대한 반작용적 의미에서 나온 것이고, 그 뒤엔 '능력 있었던 사나이' 박정희에 대한 아우라가 두둥실 떠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의 업적으로 인한 결과주의에 대한 추종과 마초적 미덕의 만연은 대한민국의 총체적 불안에 대한 강력한 구심점 역할로 다가왔던 거겠죠. 더군다나 그의 딸은 한나라당의 아이콘이고 마스코트이며(여기서 이명박 파벌에서 박근혜를 비난할 때 쓰던 얼굴마담이란 칭호를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군요. 얼굴마담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그들은 너무 쉬이 생각했나 봅니다.) 동시에 순교 당할 뻔했다는 경험, 대한민국 정치사에서의 흔치 않은 신성마저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2대에 걸친 그 동화는 박정희 아우라에 씌인 사람들에게 거의 숙명론과도 비슷한 감동을 줄 것입니다.
덕분에 황선생 사태가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 사건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세훈이 홍준표와 얼굴생김이 같았다면 서울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을까요. 장담하는데 절대 그렇진 못했을 겁니다. 오세훈과 강금실의 대결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대결, 어느 한쪽이 더 강하고 자신있게 보이며 호감을 불러 일으키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일단 강금실은 열린우리당의 리스크를 모조리 떠안고 게임을 이끌어가야 했죠. 그런데다 강금실의 선거전략은 강한-굳은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유화였습니다. 혼란한 시대를 잡아채는 것은 강철 같은-능력있는-남성스런 이미지인 것이 당연한 법이죠. 그 과정에서 여성 투표자들마저 강금실이라는 여성 아이콘에 대한 동화보다는 오세훈이라는 남성의 세련된 마스크(그리고 이면에 자리한 이명박-한나라당이라는 마초적 마스크)에의 순종적 종속에 더 이끌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남성들이야 뭐, 워낙 강금실이란 캐릭터에의 거부감도 만연했었거니와 고전적인 성차별적 정서-정치권력을 지배하는 남성적 의지에의 무의식적 동조도 한 몫 했겠지요. 결정적으로 '어차피 다들 똑같은 놈인 거, 보기라도 좋은 놈으로 뽑자'라는 정서의 승리랄까요. 미란 이렇게 위대합니다.
일종의 선후배 사이인 한나라나 열우나, 민노당이라는 이념 통합집단의 모순성에도 질려있던 저로서도 이번 선거는 꽤나 무기력한 선거이긴 했습니다. 뭐 그래도 역사는 작용반작용의 원리로 끊임없이 유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소위 진보세력의 무기력함과 보수세력의 득세로 결판난 이 선거에 대해서 좀 한심하다는 생각외엔 크게 상심은 안 드는군요. 일단 소위 민심이란 것의 유동성이 인터넷의 발달 이후 부쩍 빨라진데다 그에 기반하여 한나라당 승리의 기반이란 것이 흡사 폭탄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고, 이후 다량으로 펼쳐질 부정선거 논란에 의한 자격박탈 심사들 같은 이벤트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경남에서의 세력 점거에 대한 당외 홍보 집중과 강금실의 정치판 연착륙의지를 통한 당쇄신과 지지층 결속을 꾀하는 열우당의 다소 노련해진 솜씨에 비해 민노당은 제대로 된 작전을 세우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여서 저쪽 동네는 여전하구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