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apcold.net/

제목 그대로, 민노당 지지자면서 만화연구가면서 계간만화의 편집위원이자 월간 오즈의 편집장이었던 김낙호님의 사이트입니다. 얼마 전에 올린 한겨레21의 스즈미야 하루히 기사도 이 분이 쓰신 거였죠. 여러가지 정치적, 문화적 잡상들, 비판과 지지, 자신의 글들에 대한 단상까지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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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X 2006-07-0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저도 저 블로그 자주 가지요. =)
(뭐 여기도 자주 옵니다만;;;)

hallonin 2006-07-0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보는 분이시군요. 자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흘흘.
 

가끔 이때의 퓨지스를 생각해보면, 모종의 주술적인 힘마저 느껴진다. 거부하기 힘든 마스터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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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적벽대전 이후부터 부활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지만 끝날 때가 다 됐음.... 조조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작중에 나왔던 대사에서처럼 '조조라는 인물은 조조 이후엔 어떤 신경도 쓰지 않았음'을 만화 자체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조를 패왕으로 삼되 그 권력의 줄기를 질기게도 늘여잡아 조조 사후까지도 놓질 않으면서 역사적 명분을 더하려 애썼던 이문열의 삼국지나 끝까지 살아남아 누릴 거 다 누린 가후를 삼국지 속 인물중의 인물로 선택하고 촉나라의 가치를 내분없는 정결함으로 나라를 기백년을 이끌어나간 역사성에 두고 있는 장정일 삼국지와도 구분되는 지점이랄까. 조조는 조조다.

외전이라기보다는 2부라는 간판을 달아도 될 듯. 여전한 유머. 희안하게도 1부에서의 황금성 도입부의 인상을 주는 이야기 전개. 기다려왔던 작품인만큼 나름대로 기대감이 있다.

드디어 만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울러 제대로 된 액션씬도 등장하기 시작. 의학물에서 어드벤쳐물로 전환. 덕분에 거시적으로 보면 에도성 지하에서의 인체실험 에피소드가 의외로 괜찮을 수도 있다는 자비심마저 일으켰던 19권.

쿠리하라 마모루 이후로 고단샤 순정만화는 무조건적으로 보게 된다.... 이 선택은 모델인 소녀와 신을 모시는 소년의 만남이라는, 트렌디한 순정물과 오컬트 장르와의 만남과도 같은 설정이 주는 독특함 때문이기도 했는데, 중간중간에 센스있는 유머들과 시원시원한 전개, 중요씬에 돋보이는 필력을 발휘하는 집중도 높은 작화 덕에 잘 버텨내는 느낌. 소녀의 '적극적인' 욕망과, 특히 이지메에 관한 대범한 정리도 맘에 들었다고나 할까. 마냥 [라이프] 같은 일들만 있는 건 아니니.

작가인 조지 아사쿠라는 제법 여러 작품을 낸 중견인 양반인데 알라딘에선 작가이름으로 검색이 안된다.... 더군다나 드라마화도 된 작가의 대표작인 [편지하기 좋은 날]은 작가명이 아사쿠라 '게오게'로 표기되어 있다-_-

만화판은 이걸로 완결. 참으로 뜨뜻미지근하게 끝내는구나.... 소설판을 읽고픈 의욕은 안 나네.

보는 내내 "이건희는 오타쿠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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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6-07-02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희는 오타쿠.. 크.
드디어 만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무한의 주인은 이제 또 슬슬 봐야겠어요. 근데, 연재속도가 너무 느려. ㅠ.ㅠ

날개 2006-07-0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에 빠진 나이프... 담아갑니다..^^

hallonin 2006-07-0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간연재니까 어쩔 수 없는 듯....
그리고 물에 빠진 나이프라는 제목은 주인공(여)의 정서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하더군요.
 

2003.04.17 22:14 
 
 
 
몸을 한껏 수그려 근육들에 힘을 넣자, 삐걱거리면서 생겨난 들리지 않는 비명이 신경세포를 타고 흘러 올라가 머릿 속을 저릿저릿 스쳐 지나간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몸을 크게 펴고는 입술 사이로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기지개를 폈다. 자세를 비튼 덕에 나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등을 내리쬐고 있었던 따가운 햇빛이 자리를 바꿔 목을 눌러왔다. 8월. 세상은 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괜히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기는 숲이었다. 솔직히 숲이라고 해봤자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에 있는 언덕만한 산 중간에 만들어진, 녹풀의 두께가 그나마 좀 두툼하게 성긴 정도였던 빈약스런 구석이었지만, 난 숲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아아, 그 때는 그랬었다. 우기고 자시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 눈 앞에 펼쳐진 녹음이 그렇게 사랑스러우면서도 나를 압도했던 적을 그 때를 빼고는 따로 골라낼 수가 없다.

그래, 나는 무얼 하려 하고 있었지? 뛰려는 거다. 그 숲을, 숲의 길을, 어디로 향하든 상관 않고 길을 따라서 무작정 달리고 싶었던 거다. 그런 미친 짓을 왜 하느냐고? 글쎄, 당신에겐 미친 짓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더할나위 없는 쾌감이었다. 발바닥이 두동강 날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길끝까지 달려가 능선 위에 서게 되면 그 앞엔 무릎이 부서지는 감각을 하사해 줄 내리막 길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내 두 다리가 자리를 박차고 그 강제적으로 길죽한 공간 안으로 나를 밀어넣으면, 바람이 내 몸을 햝아 스치고 옷은 그 바람을 먹어 요동을 치며 주위의 풍경들은 망그러져서는 내 몸-시선 뒤의 끝없는 소실점 속으로 사정 없이 먹혀 들어간다. 그리고 난 뛰고, 날고, 나무를 붙들어 돌고, 그 순간 뒷 편, 내가 없애버린 지나간 시간의 풍경들을 잠시 확인하고, 그리곤 좋아하면서, 기뻐서 소리를 지른다. 으아아아하아하하하하아....

기억하기에 숲은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언제나 조용했다. 제 안에 들어온 사람을 조용히 관찰하고 싶은 모양인듯 조심스럽게 허용되는 것은 가끔씩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나무가 이따금씩 버스럭거리는 소리 정도였다. 그 안에 있으면 즐거웠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즐거웠다.

오후가 깊어가면서 슬슬 어둠이 숲을 잡아 먹어가고 있었다. 숲의 어둠은 바깥보다 빨리 찾아온다. 한지에 빠르게 스며드는 먹물처럼 내 시선이 닿는 곳 곳곳에 금방금방 흑색이 칠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되면 문득, 숲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어둠이라는 커다란 구멍 앞을 직시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그게 히에로니무스 보쉬였든가? 브뢰겔이었던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 죽음의 통로로 빠져 들어가는 나약한 인간군상을 상상했던 것이.

나는 부러 발을 천천히 끌어가며 숲으로 번져가는 어둠을 충분히 즐기면서 산 아래로 내려온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집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실망하진 않는다. 실망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외로움을 몰랐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에 모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깨닫게 되기까진, 아직 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던 때였다.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가로등의 탁한 주황빛이 예쁘게 보인다. 그 아래서 꿈틀대듯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인간들도 예뻐 보인다. 그 즈음 되면 내가 12년을 살아온 동네의 전경이 한 눈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난 살짝 미소를 짓고 ㅡ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마 퀸이나 건즈 엔 로지즈였을 것이다. 그 땐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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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에겐 언제나 익숙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지면서도 정작 도착하고 나면 낯선 풍경으로 비춰지는 쌀나라에 대한 감상이 기타노 다케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 하다. 푸른색 프리즘을 통해 일본이라는 지형에서 건조함의 미학을 추구했던 그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누런색 건조함은 일본에서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국답게' 더 탈색됐다.

[브라더]는 그의 이전 영화들의 동어반복이다. 완전히 내몰린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파멸과 구원이 동시에 기다리는 죽음에로 한없이 이끌리는 모습들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특유의 돌발적인 가혹함은 여전하고 그와 대비되는 아이들 같은 유희의 풍경들 또한 일본인이 아닌 이 외지의 캐릭터들에게 스무스하게 흡수되어 여전히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기타노는 변주를 시도한다. 그는 노곤한 죽음의 이야기가 펼쳐질 장소가 미국이라는 점에서 이질적인 문화간의 충돌이 빚어내는 빗나간 유머를 즐긴다. 다국적인들로 이뤄지는 기타노 조직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졌던 캐릭터들과는 대비되는 부자연스러움으로 내내 어정쩡하게 서 있다. 그들은 기타노가 분한 아니키가 보여주는 카리스마에 압도되지만 그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쉬이 어쩔 줄 몰라하고 당혹해한다. 일본에서 찍은 그의 예전 폭력극들과의 그 미묘한 차이가 보여주는 이질감은 영화 속에서 꾸준한 노이즈처럼 흘러간다.

그런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여느 때처럼 기타노의 무표정한 얼굴과 퉁명스런 말들이다. 영화 중반서부터 그는 마치 영화 자체에 손을 놓아버린 듯 말도 없이 조직과는 상관 없이 여자와 붙어다니고 장난스러운 놀이만 하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무거운 공기다. 그가 초반에 보여준 그 압도적인 잔혹함 덕에 음모와 범죄로 점철되는 영화 중반 내내 인물들은 화면 귀퉁이에서 꼼짝 않고 있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바로 전작인 [하나비]로 일본에서의 자신의 야쿠자-경찰 영화를 정리해버린 기타노 다케시가 보여주는 힘이 있다. 브라더(아니키)가 보이는 수수방관형의 여유에는 자신이 만든 법칙에 대한 자신감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답게 끝을 향해 차곡차곡 나아간다. 그런데 그 끝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놀랍게도 너무나 '미국스러운' 결말이다. 잽은 장렬히 죽고 그 덕에 니그로는 새로운 삶을 찾게된다. 그리고 이어서 길게 이어지는 데니의 요란스러운 모놀로그 액션은 침묵 속에서 죽음에 마지막 방점을 찍던 이전의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에 비하면 이례적인 장치다. 그러나 그 과다한 풍경은 오히려 영화를 더 공허하게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분명 구원의 이야기지만 그 허탈해지는 결말은 전작들에선 볼 수 없었던 끈적한 씁쓸함을 남긴다.

기타노 다케시가 꾸준하게 보여줬던 야쿠자영화들에 대한 자기변주의 마지막 결과물인 [브라더]는 특유의 스타일과 무에서 무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결합을 통해 이민자들이 만들어내는 아메리칸드림의 기이한 변형과 요약된 삶을 보여준다. 그것은 다른 시스템과 다른 시공간을 통한 긴 이야기의 압축 속에 다케시 자신의 야쿠자 양식을 '제멋대로' 도입하여 그릴 수 있는 데까지 그려본 결과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가 더이상 야쿠자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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