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방인들에겐 언제나 익숙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지면서도 정작 도착하고 나면 낯선 풍경으로 비춰지는 쌀나라에 대한 감상이 기타노 다케시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 하다. 푸른색 프리즘을 통해 일본이라는 지형에서 건조함의 미학을 추구했던 그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누런색 건조함은 일본에서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미국답게' 더 탈색됐다.
[브라더]는 그의 이전 영화들의 동어반복이다. 완전히 내몰린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파멸과 구원이 동시에 기다리는 죽음에로 한없이 이끌리는 모습들은 여기서도 반복된다. 특유의 돌발적인 가혹함은 여전하고 그와 대비되는 아이들 같은 유희의 풍경들 또한 일본인이 아닌 이 외지의 캐릭터들에게 스무스하게 흡수되어 여전히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기타노는 변주를 시도한다. 그는 노곤한 죽음의 이야기가 펼쳐질 장소가 미국이라는 점에서 이질적인 문화간의 충돌이 빚어내는 빗나간 유머를 즐긴다. 다국적인들로 이뤄지는 기타노 조직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졌던 캐릭터들과는 대비되는 부자연스러움으로 내내 어정쩡하게 서 있다. 그들은 기타노가 분한 아니키가 보여주는 카리스마에 압도되지만 그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쉬이 어쩔 줄 몰라하고 당혹해한다. 일본에서 찍은 그의 예전 폭력극들과의 그 미묘한 차이가 보여주는 이질감은 영화 속에서 꾸준한 노이즈처럼 흘러간다.
그런 영화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여느 때처럼 기타노의 무표정한 얼굴과 퉁명스런 말들이다. 영화 중반서부터 그는 마치 영화 자체에 손을 놓아버린 듯 말도 없이 조직과는 상관 없이 여자와 붙어다니고 장난스러운 놀이만 하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된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 무거운 공기다. 그가 초반에 보여준 그 압도적인 잔혹함 덕에 음모와 범죄로 점철되는 영화 중반 내내 인물들은 화면 귀퉁이에서 꼼짝 않고 있는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바로 전작인 [하나비]로 일본에서의 자신의 야쿠자-경찰 영화를 정리해버린 기타노 다케시가 보여주는 힘이 있다. 브라더(아니키)가 보이는 수수방관형의 여유에는 자신이 만든 법칙에 대한 자신감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답게 끝을 향해 차곡차곡 나아간다. 그런데 그 끝에서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놀랍게도 너무나 '미국스러운' 결말이다. 잽은 장렬히 죽고 그 덕에 니그로는 새로운 삶을 찾게된다. 그리고 이어서 길게 이어지는 데니의 요란스러운 모놀로그 액션은 침묵 속에서 죽음에 마지막 방점을 찍던 이전의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에 비하면 이례적인 장치다. 그러나 그 과다한 풍경은 오히려 영화를 더 공허하게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분명 구원의 이야기지만 그 허탈해지는 결말은 전작들에선 볼 수 없었던 끈적한 씁쓸함을 남긴다.
기타노 다케시가 꾸준하게 보여줬던 야쿠자영화들에 대한 자기변주의 마지막 결과물인 [브라더]는 특유의 스타일과 무에서 무로 흘러가는 이야기의 결합을 통해 이민자들이 만들어내는 아메리칸드림의 기이한 변형과 요약된 삶을 보여준다. 그것은 다른 시스템과 다른 시공간을 통한 긴 이야기의 압축 속에 다케시 자신의 야쿠자 양식을 '제멋대로' 도입하여 그릴 수 있는 데까지 그려본 결과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가 더이상 야쿠자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