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4.17 22:14 
 
 
 
몸을 한껏 수그려 근육들에 힘을 넣자, 삐걱거리면서 생겨난 들리지 않는 비명이 신경세포를 타고 흘러 올라가 머릿 속을 저릿저릿 스쳐 지나간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었나 보다. 나는 몸을 크게 펴고는 입술 사이로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요란하게 기지개를 폈다. 자세를 비튼 덕에 나무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등을 내리쬐고 있었던 따가운 햇빛이 자리를 바꿔 목을 눌러왔다. 8월. 세상은 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괜히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여기는 숲이었다. 솔직히 숲이라고 해봤자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에 있는 언덕만한 산 중간에 만들어진, 녹풀의 두께가 그나마 좀 두툼하게 성긴 정도였던 빈약스런 구석이었지만, 난 숲이라고 우기고 싶었다. 아아, 그 때는 그랬었다. 우기고 자시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 눈 앞에 펼쳐진 녹음이 그렇게 사랑스러우면서도 나를 압도했던 적을 그 때를 빼고는 따로 골라낼 수가 없다.

그래, 나는 무얼 하려 하고 있었지? 뛰려는 거다. 그 숲을, 숲의 길을, 어디로 향하든 상관 않고 길을 따라서 무작정 달리고 싶었던 거다. 그런 미친 짓을 왜 하느냐고? 글쎄, 당신에겐 미친 짓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더할나위 없는 쾌감이었다. 발바닥이 두동강 날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길끝까지 달려가 능선 위에 서게 되면 그 앞엔 무릎이 부서지는 감각을 하사해 줄 내리막 길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내 두 다리가 자리를 박차고 그 강제적으로 길죽한 공간 안으로 나를 밀어넣으면, 바람이 내 몸을 햝아 스치고 옷은 그 바람을 먹어 요동을 치며 주위의 풍경들은 망그러져서는 내 몸-시선 뒤의 끝없는 소실점 속으로 사정 없이 먹혀 들어간다. 그리고 난 뛰고, 날고, 나무를 붙들어 돌고, 그 순간 뒷 편, 내가 없애버린 지나간 시간의 풍경들을 잠시 확인하고, 그리곤 좋아하면서, 기뻐서 소리를 지른다. 으아아아하아하하하하아....

기억하기에 숲은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언제나 조용했다. 제 안에 들어온 사람을 조용히 관찰하고 싶은 모양인듯 조심스럽게 허용되는 것은 가끔씩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과 나무가 이따금씩 버스럭거리는 소리 정도였다. 그 안에 있으면 즐거웠다. 아무 것도 없는 듯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즐거웠다.

오후가 깊어가면서 슬슬 어둠이 숲을 잡아 먹어가고 있었다. 숲의 어둠은 바깥보다 빨리 찾아온다. 한지에 빠르게 스며드는 먹물처럼 내 시선이 닿는 곳 곳곳에 금방금방 흑색이 칠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되면 문득, 숲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어둠이라는 커다란 구멍 앞을 직시하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그게 히에로니무스 보쉬였든가? 브뢰겔이었던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 죽음의 통로로 빠져 들어가는 나약한 인간군상을 상상했던 것이.

나는 부러 발을 천천히 끌어가며 숲으로 번져가는 어둠을 충분히 즐기면서 산 아래로 내려온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집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실망하진 않는다. 실망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린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었다. 나는 외로움을 몰랐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에 모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깨닫게 되기까진, 아직 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던 때였다.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가로등의 탁한 주황빛이 예쁘게 보인다. 그 아래서 꿈틀대듯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인간들도 예뻐 보인다. 그 즈음 되면 내가 12년을 살아온 동네의 전경이 한 눈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난 살짝 미소를 짓고 ㅡ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마 퀸이나 건즈 엔 로지즈였을 것이다. 그 땐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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