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 감정선이나 상황이 좀 싸구려삘 나게 튀어나온 걸 빼면, 전체적으론 전부터 정말 탐내고 이상적으로 생각되던 소재와 주제를 소설 자체의 구조로 써먹고 괜찮게 적응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읽어낸 다음 이거 곤란하잖아....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뭐.... 뭐라고 해야하나. 세상에 이런 물건만 나오게 된다면 작가들 80%는 짐싸야한다.... 초강력 스트레이트 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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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Emma 7
카오루 모리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4년 6개월간의 월간 연재. 우리나라에서 엠마 1권이 나온 건 2003년 3월이라니 이 메이드광인 능글맞은 작가가 여자였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은 것도 어느새 3년하고도 4개월이 지난 셈이다.

사실 메이드를 다룬 만화가 '또' 나온다고 했을 때의 반응은 그런 식상하고 뻔한, 오타쿠나 볼 법한 것을 뭐하러 보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철천사 쿠루미]로 국내에도 제법 인지도가 확산되었던 동시에 처음부터 왜곡된 이미지를 안고 수입되었던 일본 오타쿠 트렌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메이드물 장르의 지나친 매너리즘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 메이드의 이미지화가 다분히 성적인 트렌드의 이동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메이드물이 가지는 한계란 명확해보였다. 그러나 [엠마]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메이드물의 정통성을 획득해내려 했다. 그것은 (성적인) 기능적인 면만으로 특화된 기존 메이드물이 무시해버렸던 길의 우회한 복권과도 같았다.

[엠마]의 스토리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또한 그 단순함에 굳이 기교를 부리려 하지도 않는다. 귀족사회에 진입하려는 젠트리 가문의 남자가 천한 신분의 메이드에게 반해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는 내용이 말그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끝까지 진행된다. 이 일련의 단순한 이야기 흐름 속에서 일본만화라는 거대한 브랜드에 씌워지는 만연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제기는 [엠마]에선 거의 이뤄질 공산이 없다. 혹 [건슬링어 걸]의 케이스와 비교하여 이 금욕적이고 절제된 시선에 대한 페티쉬즘적 결론을 내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카오루 모리의 시선은 이야기 자체에 내밀하고도 섬세한 묘사의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그자신이 원하던 작품의 순수한 면모를 구축해낸다. [엠마]는 확실하게 저자극성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스토리의 기교나 응용은 작가로선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했을 사항인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절제된 감정으로 가득한 스토리에 비추어 [엠마]는 메이드, 그것도 그 양식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고전적인 19세기풍 메이드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걸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당대의 정경들에 대한 신경질적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고증과 재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메이드의 복식에서부터 생활에까지 이르는 메이드의 모든 세부사항들에 대한 천착은 [엠마]가 실제적으로 지향하는 모든 것이다. 물론 작가는 19세기 영국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풍경들을 열렬하게 사랑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주변부적인 요소로 만드는 것은 메이드라는 특화된,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무수히 오해된 캐릭터다. 작가는 언제나 고전적인 이야기 속의 조연이었던 그 캐릭터를 정당하게 복권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매혹되어야 할 것은 메이드에 대한 따뜻한 동시에 더없이 열정적인 작가의 시선이다. [엠마]에서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부분은 드라마가 아니라 일상이다. 과장되지 않은 메이드의 삶에 시선이 맞춰진 프레임은 그들의 손동작, 드레스끝, 헤어스타일, 발걸음, 말투까지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하게 보여준다(오직 안경 쓰는 엠마를 보여주기 위해 그 과정과 동작을 일일이 보여주는데 3페이지를 써버리는 만용을 부렸던 작가임을 기억하자).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잊어왔던, 제멋대로 바꿔버렸던 오래된 조연이 비로소 주연의 자리로 올라서는 그 모든 과정을 진득하게 볼 수 있게 됐다. 단순히 메이드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작가를 통해 현실적으로 승화된 이야기는 독자를 침착하게 건조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무엇보다도 살아있었던 메이드의 삶 속으로 이끌어준다. [엠마]라는 만화의 소중한 경험이란 그 소박하면서도 흔치 않은 지점에서 비롯된다. 

 

추가하자면 메이드복을 벗고 비로소 드레스를 입은 엠마를 맨 마지막 장에서야 겨우 배치해놓는 작가를 보면서 엠마에게서 메이드복을 벗기는 게 가장 싫었던 사람은 작가 본인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작품 전체의 절제된 기조를 반영하듯 [엠마]가 '고작' 7권에서 본편의 이야기를 끝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즉, 더이상 엠마는 '메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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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장점을 찾아야 할지 난감해진다. 아니, 내가 이걸 왜 봤는지부터가 난감하다. 쇼타콘?

자료의 나열. 그 이상은 영 안 될 것 같고 이하가 될 가능성은 보인다. 수박겉햝기라는 느낌. 서울이라는 지형을 재미없게 드러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에 대한 모범답안.

이상적이다.

18금 게임의 하위 장르인 다크물, 그리고 비주얼노블과의 근접조우에서 봤던 거의 모든 요소들의 원형. 캐릭터에서부터 내용, 심지어 문체마저도.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백과사전. 빈말이 아니다. 그러니 독법 또한 똑같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악의에 대한 방대한 퍼즐놀이. 아무리 인간이 이득을 따르는 냉철한 짐승이라 하더라도 심연 깊숙이 담겨있는 악마적 감수성에 대한 혐의를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역사는 종종 인간이 그저 괴물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지긋지긋하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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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클리어속도는 실업상태 기간에 비례한다-_- 아무튼지간에 끝을 봤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일본식 RPG. 자유도는 눈꼽만치도 없고 그냥 시나리오 따라서, 지시방향 따라서 열심히 삘삘거리며 달려가서 몬스터 족치고 일방통행하는 스토리 즐기고 하면 되는 게임이라 심적부담이 전혀 안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난이도가 현저하게 낮은 편이었고, 스토리는 전형적이고, 뭐 나쁘진 않았다 정도. 아이템 100% 수집 강박 같은 건 없으니 이후 봉인 예정. 이 게임의 백미는 역시 각 캐릭터 간의 액션 타이밍을 응용한 전투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꽤 중독성이 있습니다. 흡사 뻔한 확률 게임인데도 결국은 즐기게 되는 포커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동영상 스킵 기능이 없다는 게 안타깝더군요. 그 덕분에 난이도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래 걸렸습니다. 비슷한 대사에 비슷한 내용이 신물날 정도로 반복되서 지치게 만들더군요.

그러고보니 이게 2000년에 나온 물건.... 벌써 6년 전 물건을 이제사 플레이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다음 클리어 목표는 추억의 [이스2 이터널]! MSX시절에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던 이 유명한 시리즈의 리메이크작은 사실 예전 시스템에서도 잘만 돌아가는 바였으나 순전히 귀찮아서 책상 밑 어딘가에 쳐박아두고 있던 중, 미취업 상태라는 비참한 현상황에 힘입어 남는 시간에 다시금 사랑 받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사나이의 몸통박치기를 통해 두 여신과 미녀 한 명을 한꺼번에 쌈싸먹는 빨간머리 정력왕이 펼치는 감동의 일대기 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볼까 합니다....

...얼른 알바를 구해야겠는데-_-


처음 공개됐을 때 화제가 됐던 화려한 오프닝은 신카이 마코토가 감독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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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소소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공룡이라는 거대한 존재들이 지구에서 살고 있었고 이제는 그 존재가 싸그리 사라져버렸다는 역사적 발견은 성서적 세계관에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찾아내던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한편으론 지구의 지배자가 인간뿐이 아니었다는 점에선 성서의 세계관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그 첫번째 충격이 자리하고 있었고 두번째는 역설적으로 생물체의 완전한 말살의 증거로 인해 요한묵시록의 장엄한 죽음의 세례가 땅 위에서 실제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다는 걸 증명한다는 점에서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실상 종말론은 중동 사막신의 전기에서보다 더 깊은 태고적 신화의 세계들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상상과 표현의 능력을 가진 포유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트라우마와도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겪은 오래 전 기억인 그 모든 과거 종말들의 표식이자 장차 인류에게 공평무사하게 내려올 동시다발적인 죽음 - 혜성충돌, 폭풍, 지진, 화산폭발, 역병, 대해일과 전쟁 등의 직접적 요인들은 신화 속에서 신들의 전쟁이라는 고상한 포장으로 덧씌워져 표현되곤 했었다.

합리적(?) 종말론자들을 계속 매혹시켰던 그 모든 현상들 중 전염병의 이야기는 유독 돋보이는 것이었다. 전염병은 흡사 죽음의 실체화와도 같다. 전염병의 풍경은 무감각한 떼죽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기상변화나 개인적-국가적-민족적 이익을 걸고 '숭고한 가치'를 기치로 '숭고한 죽음'을 추구하는 전쟁의 풍광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 모든 종말의 풍경과 같이 무분별하지만 동시에 완전하게 무가치하다. 또한 전염병은 감염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긴 죽음의 시간을 선사해준다. 가족이나 친구가 역병에 사로잡혀 서서히 피를 토하며 죽음에 침식되어가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육체에 가해지는 긴 고통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국지적으로는 깔끔하게, 단번에 끝나는 죽음의 미덕에 대한 찬양을 읊게 만들었다. 실제로 죽음은 예술을 통해 실체화되어 아이콘이 됐다. 바로 저 중세 때, 죽음의 춤이란 주제로 만들어진 수많은 그림들을 떠올려보라. 인간의 세시기라고 이름 붙여진 무상함에 대한 고전적 주제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브뢰겔의 '죽음의 승리'는 공포와 매혹에 대한 압도적인 풍경화로 볼 수 있다.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그 '죽음'을 사방에서 춤추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두운 미학으로써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으며 중세를 암흑의 시간이라 부르게 만든 흑사병이란 현상에 대한 총괄적인 재구성이다. 실로 책은 저 제목이 지칭하는 바를 워낙 충실하게 따라간다. 우리는 저자의 손에 끌려 펼쳐진 지도와 문서들, 당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죽음의 길이 차례로 전개되는 과정을 실감나게 목도한다. 긴밀하게 겹쳐진 사료들의 실제적 의미들과 구멍난 부분을 메우는 작가적 상상력은 우리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흑사병이란 실체를 몸뚱아리 그대로 끌어내보이는데 성공하고 있다. 즐겁게도 그 과정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유럽사를 전공한 작가의 미시적인 시선은 병의 근원이자 통로였던 몽골의 사막에서부터 당대의 유럽까지 독자들을 종횡무진 끌고다니며 때로는 죽음이 도래하기 직전의 부산하지만 평온했던 광경들 안에, 때로는 그 죽음이 모든 것을 쓸고 간 지극히 조용하고 처연하며 너저분한 풍경들 한가운데에 서게 만든다.

저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 역병의 불평등한 부분을 지적해낸다. 그것은 인간의 바퀴벌레와 맞먹는 생명력과 그와 비슷한 정도의 편견, 그리고 그리 평등하지 않았던 죽음이, 그러니까 모든 인류를 말살시킬 정도로 완벽하게 압도적이진 못했던 죽음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그것은 또한 원초적인 공황 안에 자리했을 때 이성의 동물인 인간이 불러일으킬 야만에 대한 많은 우화들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보다 잔인하고 억울하며 반복되어온 죽음, 바로 인종차별-유태인사냥에 대한 것이다. 병의 전래가 인간 스스로의 손으로 인해, 인간의 오만과 실수로 인해 시작되고 진행되었음에도 그 죄를 타인을 찾아 돌리는 이 오래된 이야기는 언제든 똑같이 우울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여기에 거의 언제나 역사 속의 피해자였던 이 유명한 유목민족이 지금은 가해자가 되어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늘은 노을과 겹쳐져 검붉은 빛을 커다란 먹구름 사이로 뿜어내고 있었다. 마을을 바라보자 아직 채 치우지도 못한 시체들이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있고, 수북하게 쌓인 시체들과 내팽개쳐진 삽들, 주인 잃은 수레가 보인다. 그 뒤로 마치 시체들을 보호하는 수호령처럼 축 늘어진 덩어리-랍비모자가 모욕적으로 입에 쑤셔박힌 사람 몇이 목이 매달려서는 까마귀한테 살을 뜯기고 있는 중이다. 저녁 때이지만 불이 들어와 있는 집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은 몇 채 보이지도 않는다. 저 멀리 반대편에 마을 바깥으로 난 길에선 반은 중얼거림이고 반은 괴성에 가까운 기이한 기도문을 외우면서 탁발수도자들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이윽고 축축하게 시린 비가 한 두 방울 땅바닥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 아래론 지하의 왕이 비를 피해 분주하게 죽음을 배달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풍경, 정적과 공허만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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