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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 비밥]의 성공을 이해하려면 우선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야간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극단적인 실험 경향과 오타쿠문화의 상업성에 대한 주목으로 비슷비슷한 마니악한 작품들의 양산으로 흘러가던 당시 애니메이션 계에서 자성론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웠고 그것은 주로 카와모리 쇼지나 토미노 요시유키 등등의 중견 애니메이션 감독들을 중심으로 제시되고 있던 바였다. 오타쿠 시장을 본격적으로 열어제낀 가이낙스와 항상 꾸준했던 스튜디오 지브리가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여전히 불황이었으며 화제의 중심이 될 단단한 구심점 역할을 할 이슈메이커도 없었고 그 모든 여건에 따라서 제작 환경도 수작업에서 디지털 작업으로 옮겨가고 있던 때였다.
[카우보이 비밥]은 그런 전환기에 나타난 '시대착오적' 작품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웰메이드다. 기존 TV 애니메이션의 수 배에 달하는 제작비를 들여 1급 캐릭터 디자이너들과 음악가, 성우들을 끌어모으고 여러 고전적인 아이콘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온 [카우보이 비밥]은 무척 느릿하게 그 지명도를 알리기 시작했지만 곧 그 전환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자리잡기에 이른다.
물론 [카우보이 비밥]의 성공엔 기존의 업계에 대한 반작용적인 아우라의 역할이 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분별에 가까운 실험들과 마니악한 내용으로 가득 한 애니메이션들에 질린 소비자들은 [카우보이 비밥]이 가진 고전 시대의 아이콘들과 물량이 투입된만큼의 훌륭한 완성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잘 세공된 작품이 만들어내는 보편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집중력을 보고 [카우보이 비밥]에게 힘을 몰아주었다.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지만 [카우보이 비밥]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 아니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TV라는 매체에 적을 둔 장르, 그것도 위성방송에서부터 시작하는 애니메이션에 무모하다고 싶을 정도의 투자를 결정한 선라이즈 이사진의 결재 사인이었지 그 본편을 구성하고 있는 이미지들과 스토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쓰여오던 전통의 연장선(활극, 스페이스 오페라, 시티헌터풍 하드보일드)에 있었다. 옴니버스식으로 나뉘어진 이야기들이 뒤로 가면서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주인공들의 삶과 개인사적 비극을 얘기한다는 흐름은 2쿨이라는 비교적 여유있는 시간을 갖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전형적인 형태다. [카우보이 비밥]은 장르의 특성 안에 머물고 그 모든 법칙들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전 26화의 끝을 맺는다.
극장판은 오리지날 스토리지만 배경이 되는 시간대는 TV시리즈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스파이크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동료들이 어떤 형태로든 그의 곁을 떠나기 직전, 그러니까 극장판 천국의 문에서 보여주는 시간은 하나의 공동체였던 그들이 거의 마지막으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던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언뜻 봤을 때, 워낙에 TV판 한 편의 집중도가 높았던 것 때문인지 천국의 문은 TV판 1화를 두시간짜리로 늘여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천국의 문은 의외로 군더더기가 없는 작품이다. 불필요한 이야기들이나 쓸모가 없는 과정, 감정의 어긋난 흐름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천국의 문]에서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작품이 [카우보이 비밥] '답지 않게' 현학적인 내용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TV판에선 비주얼에 가려져 있던 이 작품의 느와르적 본질, 혹은 아우라가 보다 분명하게 그 색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리라.
TV시리즈에서도 내내 과거와 기억의 문제를 물고 있던 [카우보이 비밥]은 극장판에 와서 장자의 호접몽에서 빌어온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스파이크의 '예정된' 종말에 대한 전초전을 보여준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메여 살아가는 빈센트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린 '존재하지 않는 이'이고 그의 그런 모습은 얼마 후 죽음을 향해 달려가게 될 스파이크의 모습과 붕어빵처럼 일치된다. 현실과 꿈과 죽음의 경계들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의 비극은 지나치게 후까시 지향이었던 TV시리즈에 비해 여기 와서 보다 더 무거워지고 구체화된다.
와타나베 신이치는 인터뷰에서 [카우보이 비밥]을 절권도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분명, 상과 허의 경계를 부수라는 이소룡의 가르침은 이 극장판에서 (비록 드라마적으론 루즈하게나마) 잘 드러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건 다이내믹한 액션신의 표현이다. 육박전의 쾌감을 더없이 훌륭하게 체현하고 있는 격투신들과 후반에 보여주는 체이스 씬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다만 빈센트의 죽음의 이유가 되는 엘렉트라의 역할과 캐릭터성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것과 라스트에서 드러나는 상황정리용 얼버무리기식 결말로의 계단밟기는 차라리 팬서비스용으로 나왔던 비밥호 구성원들의 비중을 축소시키고 스파이크의 역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하여 이 이야기를 스파이크의 개인사적인 사건으로 만들더라도 보다 단단한 모양을 맞춰줬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