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제1회 씨카프가 열렸을 때, 초사이어인 [붉은매]와 때깔부터 헝그리했던 [헝그리 베스트5]와 일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사이좋게 망가지면서 나오던 시기에, 정말 볼 것 없었던 코엑스내 씨카프 행사장에서 내 눈을 사로 잡았던 건 딱 두가지였다. 하나는 고단샤 부스에 비치된 16인치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던 공각기동대 프로모션 영상이었고 하나는 동아리쪽 어딘가 부스에서 스쳐지나가듯 보게됐던 이애림의 일러스트들. 난 그녀의 그림들에서 [크리스마스 전야의 악몽]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매혹을 느낄 수 있었고 이후, 그녀는 나인에서 [say anything]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에 그녀의 초기 단편들과 나인 연재분을 모아 [short story]를 펴내게 된다.


내가 처음 팀버튼의 자장 안에서 그녀를 봤던 것은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오산이었다. 둘다 기괴하고 음산한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애림의 세계는 팀버튼에게서 볼 수 없는 여성적 가혹함이 충만하다. 팀버튼이 동화적이고 흑백의 스타일을 선호하는 반면 이애림은 고어적이고 붉은색을 선호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녀의 만화에선 피와 폭력, 살인과 식인이 줄기차게 등장한다. 뚱뚱하거나 비쩍 말랐고 기괴하게 강조된 눈과 이빨, 입술들, 축쳐진 가슴과 튀어나온 뼉다구들을 강조하는 인물들. 그녀의 작품에서 나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기괴하고 소심하고 잔인하고 못생겼다. 병적인 기운을 물씬 뿜어내는 그녀들은 남자를 사냥하거나 사냥 당하거나 외계인 왕자를 기다리거나 괴물들과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그런 기괴함과 폭력 속에서도 차차 일러스트에 더 익숙해져가는 그녀의 작법이 만들어내는 연출은 옛동화를 처음 듣는 아이들을 위한 태도와 공유되는 다소 유치한 설명조를 포함하는 부정형의 양상을 보여준다. 아주 확실한 마이너 정서. 하지만 이것이 이애림이란 작가의 정서와 정체성을 확고하게 매겨줬다.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든 독특하고 강렬한 스타일의 그림으로 그려진 이 기괴한 이야기들로 제 3회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으니.


그녀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그녀 자신이 꾸는 악몽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필름 2.0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매일밤 악몽에 시달렸고 그 악몽을 형상화한 게 만화로 나온 거라고. 그래서인지 역동적이고 나름의 발랄한 상상력에 기반한 초기작과 딴판으로 현재의 일러스트 스타일이 확정된 때부터의 그녀의 만화들은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세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필름2.0이라. 왜 영화잡지가 그녀를 인터뷰했냐하면, 이제 그녀는 만화쪽은 접고 영화판의 환쟁이가 됐기 때문.

인터뷰 본문.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3013


사실 만화 자체적으로 가늠하기에 이 단편집에 실린 만화들은 대부분 일러스트적 경향이 워낙 강해서 만화적 퀄리티로 따지면 그 수준이 들쑥날쑥한 편이다. 하지만 기괴한 몽상이 만들어낸 한국만화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스타일을 개척한 결과는 그 추하고 어두우며 잔인한 인상들에도 불구하고 흔히 그런 위험하지만 유혹적이었던 이미지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보는 이를 매혹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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