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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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를 머릿속의 이미지로 떠올리고, 형상을 만드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지 몰랐다.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고 싶었다. 눈 앞에 읽혀지는 것들이 그냥 하얀 종이 위에 아무런 의미 없이 박혀 있는 활자였으면 좋겠다며 어렵게 어렵게 페이지를 넘겨갔다.

여전히 교회에서는 '믿는 사람들은 군병같으니'라든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담대하게 싸울지라 저기 흉한 적병과' 같은 찬송가들을 힘차게 부르고 있다. 성지를 회복하겠다고 부르짖던 십자군이 인류의 문명을 얼마나 욕되게 했던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그곳, 반도의 북쪽에서 일어났던 이 처참함을 무엇이라 이야기 해야 할 것인가?

'우리 형님은 죄인입니다.'라고 신천 학살극의 한 주인공인 류요한의 동생 류요섭 목사는 적는다. 신천에서 일어난 일이 피차 서로 죽이고 죽이는 일이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복수와 학살은 상황과 형편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훌륭한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류요섭 목사는 자신의 형이 한 일들, 기독교인들이 벌인 학살에 대해 잘못했다고 말한다. 정작 이 땅위에서 친일파와 독재다들과 죄인들은 입을 다물고 잘 살아가고 있고, 누구하나 탓하지도 않는 묵인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에게 죄가 있는 것일까?' 류요한의 아내는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입에 담을 수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구역질나는 혹독한 죽음의 행진들이 하나님이 계심에도 버젓이 일어날 수 있는가? 정녕 하나님은 눈을 감아 버렸던가? 빨갱이들을 때려 잡기 위해 거사를 벌이기 전날, 성령께서 인도하셔서 악의 무리를 말끔히 없애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신 것일까? 유태인들이 그렇게 학살되어 갈 때, 유태인들 역시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를 외쳤다. 하나님조차도 사람의 입맛에 따라 이용해 버리는 인간의 이기심에 신물이 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열두 마당을 기본 얼개로 썼다고 한다. 굿판에서처럼 산자와 죽은 자가 동시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등장하고, 회상하고, 이야기도 제각각인 형식을 빌어서 썼다. 때때로 누가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때도 있었지만, 지나 간 일이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 너무나 뚜렷하게 부각된다. 역사적으로 경험한 일은 분명히 흔적을 남기고, 상처를 남긴다는 것. 죽게 되면 죽은 자들은 서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의 한계를 규정하며, 화해의 시도가 될 수는 없을까?

'이 백당놈우 새끼럴!
나는 이제 우리의 편먹기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사탄을 멸하는 주의 십자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시험에 들기 시작했고 믿음도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류요한은 눈빛을 잃어버린 나날이 되어갔다. '사는 게 귀찮고 짜증이 나서 그랬다. 조금만 짜증이 나면 에이 썅, 하고 짧게 씹어뱉고 나서 상대를 죽여버렸다.' 무엇이 인간을 이토록 오만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세상에 시도된 그 모든 범죄 행위들의 바탕엔 기독교이든, 우익이든, 좌익이든 사람의 잔인한 본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손님이라고 이름 붙인 기독교나 사회주의는 그 잔인한 인간의 바탕을 조금이라도 가리워 보고픈 인간의 욕망일 뿐인가? 도대체 나는 어느 곳에 내 사상적 뿌리를 박고 민족적 자존심을 찾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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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현대문학북스의 시 1
안도현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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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방정일까? 이 책을 속초까지 가서, 비 오는 날 서점을 찾아 뛰어다니며 사서 아주 재미있게 읽어놓고, 불현듯 씹고 싶어졌다. 지금 시간이 그런 시간인가? 하긴, 조금 있으면 스님들과 불자들이 잠자리를 거두고 예불을 올릴 시간이니까, 내 시간으로는 늦디 늦은 시간. 자고 싶은 시간.

저 변산반도의 사타구니 곰소항에 가면
바다로부터 등 돌린 폐선들,
나는 그 낡은 배들이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시집을 내고 받은 인세를 모아서
바다에 발 묶인 배 한 척을 샀던 것이다...-낭만주의 중-

시를 읽는 시간에 자신을 투자할 줄 모르는 인간하고는 놀지 않겠다고 시인은 벼르지만, 지금 변산은 전투중이다.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간척지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무슨 무슨 효과와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한편에서는 죽어가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해변가에는 장승들이 모진 바닷바람에 맞서 서 있고, 사람들은 바다를 망치기로 작정하고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배를 몰아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기 전에, 배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곳으로 변하고 있는 그 곳에는 한 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천연덕스럽게, 낭만적으로, 낭만주의인지 정신의 넝마주의인지는 모르고 죽어가는 바다 앞에 시 읽을 줄 아는 것을 논하는 것은 내게 불쾌하다. 시인의 말처럼 놀지 않겠다, 절교다!

내가 그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 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나에게는 /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마흔 살 중에서-

왜 여기서는 <서른, 잔치가 끝났다>가 생각이 나는걸까? 시인보다 열살쯤 나이가 어리니, 그가 세상에 씨발이라는 욕이 튀어나오게 했다면, 나는 '씨'정도는 나오게 했을까? 허둥대며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그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날들일까? 바야흐로 마흔 살이 되었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고 시인은 적는다. 그 명함들이란 뭘까? 그에게 씨발이라고 욕하는 사람들의 것일지, 아니면 그 반대의 것일까? 그가 지금 외로워지고 싶은 이유는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것일까? 지난 잔치는 이제 다 치우고 새로운 잔치를 벌이고 싶다는 것인지..

그의 시집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졌다. 그의 시집은 장중해야 한다. 예민하고 우리 살갗을 적시는 언어는 똑같았지만, 언어 속에 담긴 깊고 깊은 고민과 투쟁은 없다. 그가, 이제 잔치를 그만 두고 싶은걸까? 이제는 안주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무슨 무슨 주의자로 남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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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었어? 그럼 시작해봐 - 심리학박사 최창호의 연애교과서
최창호 지음 / 넥서스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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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람과 사람끼리 상호작용을 위한 기본적 거리는 얼마나 될까?
1) 친밀한 거리 0-46cm
2) 개인적 거리 46-120cm
3) 사회적 거리 120-210cm
4) 대중적 거리 360-750cm

중학교적엔가 이 비슷한 문제를 보고 좋아하던 여자 친구를 만나 얼마의 거리를 두고 걷는게 서로에게 편한지를 재보던게 생각났다. 그리고서 종종 정원에 있는 연못의 모양이 네몬지, 동그란지 하는 류의 심리 테스트들을 받거나, 했던 기억들이 더올랐다. 그 때에는 그 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마치, 잘못 이야기해서 나쁜 이미지를 주게 되면 어쩌나 하는 심각한 고민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가며, 혹은 심심풀이로 즐겨가며 많은 부분들에 있어 귀여운 오류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의 신빙성에 치명적인 가해가 될 수도 있는 잘못된 심리 테스트와 사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장 괜찮은 상대는 내 주변 반경 200미터안에 있을거라 책에 적혀있지만, 나와 짝은 거리는 줄잡아 50Km쯤..떨어져 있다. 직행 좌석이라고 하나? 그걸타고 1시간 20분쯤 가야지 그녀를 만날 수 있고(아니, 대부분은 그녀가 내게로 온다...미안하게시리..) 그래서 자주 만나는 것도 힘들다. 콜라를 따를때 거품이 잔에 넘칠만큼 따르는 사람은 침착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맞지만, 그녀는 책에서처럼 말이나 행동이 난폭하지 않다. 오히려 적당히 따르는 내가 훨씬 난폭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주는 재미와 재치들이 반감되진 않는다. 절대로 애인한테 해서는 안될 말들, '넌 몰라도 돼, 내가 알아서 할께.'라든지 '우리, 헤어지자. 하하하' 같은 농담이나 '내가 듣기 싫어하는 모든 말' 등은 관계에 대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가끔씩 등장하는 심리학적인 용어들, 방어기제, 권태기=심리적 포만기, 여과 효과, 후광 효과, 여러 컴플렉스들.

연애라는 것이 어떤 관계들보다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더욱 상대방을 배려하고, 아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상대방이 일일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도 미리 눈치를 채거나, 애정을 가지고 미리 도와주거나 해야 된다. 상대방의 기호와 취향을 내 것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것 등등. 이 책은 그런 걸 알려준다. 잔 꾀를 부려, 헤어져 말어 같은 것을 알려주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좀더 진지해질 수 있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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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영
J.몰트만 지음, 김균진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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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신앙의 성령을 거부하고,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의 성령임을, 그리고 모든 것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에 대한 몰트만의 신앙과 입장을 상세히 논술한 책이다.

몰트만은 책의 입문 부분에서 성령을 단지 ‘구원의 영’으로 파악하며, 그 장소는 교회이며, 이 성령은 인간에게 영혼의 영원한 축복을 확신시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 마음속의 믿음과 사랑의 사귐 속에서 이루어지는 생동시키는 영의 경험은 자연히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성령을 자연 속에서, 식물 속에서, 동물 속에서, 땅의 생태계 속에서 재발견하도록 한다고 설명한다. 성령의 사귐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의 보다 더 큰 사귐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이러한 성령님의 우주적 넓이에 대한 사고는 지금까지 교회의 영으로만 국한되어 왔던 생각과 부딪히기 때문에 거부감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몰트만의 해방신학에 대한 입장도 쉽게 기존 교회가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된다. 몰트만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성서의 전승들이 제시하는 하나님 신앙과 자유의 의지를 결합하고자 하는 최초의 설득력 있는 시도라고 본다. 따라서 종교와 보수적 정치의 동맹이 주장하는 환상들과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몰트만에게 있어 하나님이냐 자유냐 하는 논쟁에 가장 중요한 지점은 이스라엘의 엑소더스 전승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전승이 교회의 중심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이다. 구라파에서 미국의 제도화된 교회와 평화 운동,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도교회와 민중교회의 갈등은 하나님과 자유 중에 하나를 택일하라는 근대적 사고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으로 극복되어져야 한다. 몰트만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느끼면서도 몰트만(뿐만 아니라 바르트 등의 신정통주의자까지도)의 고민을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사고 내지는 기존 교회와의 불화를 만들어내는 신학사상으로 폄훼하는 데에는 수긍이 안 간다.

몰트만은 입문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데, 다른 교파들을 적대자나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고 교파의 한계를 넘어서며 이 한계를 개방하는 것은 “성령의 사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17p)고 설명한다. 우리에게서 혹은 서로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한 오순절 교단과 정교회가 에큐메니칼 교회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이다. 루터 교회와 가톨릭이 칭의와 구원에 관한 교리 논쟁을 다시 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성령님의 사귀게 하시는 힘으로 가능한 일이리라. 필리오케에 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그것의 의미와 또한 제한점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바울과 요한의 그리스도론적 성령론이 주도적인 힘을 발휘한 결과이며, 공관복음서의 영 그리스도론의 진리가 이제는 합해져야 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기독교적 삶(vita christiana)은 언제나 그 시대와 관련되어 있으며 콘텍스트적이라고 말한다. 구원의 증언으로서 기독교적 증언은 ‘치료하면서’ 주어진 사회의 병들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구원자”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 개혁은 중세사회의 공적 병들에 대하여 작용했으며, 인격적 성화에 대한 감리교회의 증언은 영국의 초기 산업사회의 병들에 대하여 치료적이었다. 그렇다면, ‘후기 산업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지금, 이 과도기 속에서 ‘기독교적 삶’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책 내내 몰트만은 생명의 영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하고 계시며, 어떻게 죽음과 파괴를 거부하시고 생명을 주시는지, 생동감을 주시는지를 설명한다. 또한 그러한 생명력은 단지 인간의 영적 구원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콘텍스트, 온 피조물들이 신음하고 있는 현재 속에 주어진다. 교회와 신앙의 성령이 아니라 온 피조물의 성령님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죽음을 거부하고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성령님의 생동감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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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윤리
노영상 엮음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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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윤리라는 주제로 영성신학과 기독교윤리, 목회윤리의 현장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영성에 있어서, 예전에 사고했던 것처럼 이 세상과의 적당한 거리감과 분리가 아니라 통전적 영성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주기도문을 분석하면서 통전적 영성을 전개한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보프 신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주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올바른 관계를 실천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예수의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관심사와 유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관심사가 그분의 관심사에 낯설지 않다.”

기독교 윤리에 있어 기독교 윤리의 바탕이 명령법적 윤리라기 보다는 인간의 존재의 변화를 먼저 전제하는 직설법적 윤리라는 거스탑슨의 정의는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땅에서 기독교 신앙을 압축적으로 요약하라 한다면,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주일성수, 십일조’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가 기독교의 진리를 압축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속에는 이 세상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나 신앙이 전혀 자리잡고 있지 않다. 명령법적이든 직설법적이든 논의할만한 자리가 없는 구호이다. 후자에 있어서는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을 요약하는데, 여기에서는 신앙에 있어 규범의 냄새만을 느낄 수 있다. 기독교의 신앙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할 때, 작금의 신앙은 최소한 당위에만 머물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신앙이 직설법적인 윤리, 존재를 강조하는 윤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구약 시대 제사의 문제에 있어 이것을 심리학적인 자아의 죄책감, 양심의 가책으로만 보는 것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구약에서 제사가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는 것이라면, 구약의 제사의 최종적 완성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 역시 심리적인 문제로 해석될 여지가 있게 된다. 제사는 양심의 가책을 해소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확인하는 절차로 해석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언약들, 규범들을 침해했던 것을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은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제사의 중심은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이 심리적 치료를 목적으로 제사를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9장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양심이 깨끗함을 입은 것과 양심의 가책이 해소된 것이 같은 것인지에 대해 한번 더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WCC의 주제들을 통해서 성령만이 오늘의 전 창조물의 위기를 구원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성령님의 역사가 단지 교회나 신앙의 영역으로만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간을 구원하며 사회를 해방하고 변혁하는 일에 있어 영성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대단히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WCC의 노력들이 과연 한국교회 현장에서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펼쳐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총회에서 하는 일은 고작 사회적 이슈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대부분의 교회는 그런 것들은 다 무시한 채 교회와 신앙에만 고립되어 있는 상태이다. 예배가 사회적 참여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예배의 생명력이 힘을 잃은 결과이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이웃 사랑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우리 현실에서는 전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통전적 영성, 혹은 관상과 행동의 일치라고 여겨진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만물과 무관심하지 않으며,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 교회의 현실 속에서 더욱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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