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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평점 :
1.
예전에 신학대를 다닐때 내가 좋아했던 강사님이 신학생이라면 한번정도는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책을 읽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에 나는 나 나름대로 믿음이 holy 스럽다고 믿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실상 내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아닌, 내가 세운 나름대로의 신념체계다는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믿음은 마치 모래성과도 같이 한번에 무너져 내렸다.
내 신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볍고, 바람같았던지. 내 신념을 포기하는 일이 그토록 쉬운일인지는 몰랐다.
나는 신학대를 떠남과 동시에 교회도 홀가분(?) 하게 떠났다. 그러나 가끔 내 삶이 어렵거나 지칠때면 난 참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찾았다. 그리고 문제가 해결될 그 즈음에는 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하나님을 찾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마치 지니의 요술램프 같은 그런 존재였으므로.
2.
누구나 한번정도는 살아가면서 의문을 품었을 만한 "신은 존재하는가?" 란 물음.
이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한번정도는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정도는 신의 존재의 유무 때문에 친구들과 혹은 사람들과 싸워본 경험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론은 늘상 나지 않는다. 신을 본 사람이 없으므로.
10년이 흐른 지금에 나는 왜 러셀의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었을까? 그건 지금 내가 "신은 존재하는가?"란 물음을 심각하게 던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물음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상황은 겪게 된다. 테레사 수녀 역시 믿음을 부정한것이 아닌, 존재론적 고백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신의 존재 유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애쓰는 과정이 아닌,- 과학도 일종의 신념체계이다. 과학이 정확하다고 하는것은 극장의 우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들은 왜 신이 없다고를 말하는것일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표적 무신론자 두 명인 러셀과 도킨스 책을 주저없이 산 이유가 되기도 한다.
3.
러셀은 말하기를
" 종교의 일차적인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해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모든것이 기초다"
마르크스의 딸과 결혼한 러셀의 이와 같은 주장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마르크스 역시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말했으니까. 러셀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종교 해악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 마르크스의 종교(기독교)의 비판의 토대는 종교는 현실을 옳바르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는 민중의 아편과도 같다고 한다. 아편은 일시적인 쾌락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든다. 막스는 종교가 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민중의 헛된 행복으로서의 종교를 억압하는 것은 곧 민중의 참 행복을 위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위안거리 없이 속되게 사슬을 차고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사슬을 떨쳐 버리고 살아있는 꽃을 꺽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당시 민중(프로렐타리아/ 브르조아와는 반대 급무세력) 들의 삶은 피폐하고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노동자들은 살기 위해 마치 상품처럼 자신들을 팔았어야 했고, 그들이 받는 급료는 기계화가 그들의 노동가치를 저하시키는 만큼 보잘것 없는 것이었다. 소수(브르조아/ 유산계급) 가 절대 다수를 억압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어야 하는데 막스는 이때 프로렐타리아가 단합하고 노동자들이 당을 만들어 단합할 것을 주장한다. 막스의 살아온 행적과 그의 지적 사유과정, 당시의 시대상황들을 종합적으로 보면 왜 종교가 아편이었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
내가 이 부분에 밑줄을 그은 이유는 두려움이라는 말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신을 믿던 안 믿던 어떤 대상에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내적으로 올 수도 있고, 외적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도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과거에 대한 두려웠던 기억부터 현실에 대한 현실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등.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래서 종교와 두려움과 함께 가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내어쫒고자 종교를 믿을 수도 있고, 내가 지옥불로 가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신을 믿을 수도 있으니까.
이럴때 종교는 사람들을 향한 두려움에 대한 협박이다. 두려움을 없애고자 신을 믿을 수도 있고, 두려움을 받지 않고자 신을 믿을 수도 있으므로. 믿던 안믿던 두려움은 동시에 존재한다.
4.
종교-기독교/ 하나님을 배제시킴-의 기능이 순기능이었던 것만은 아니기에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 그리고 지금의 미국의 네오콘자들에 의해서 벌어진 전쟁까지. 지금도 분쟁중인 수 많은 국가들중에 -크고 작건- 종교의 이름을 가지고 벌어지는 전쟁은 무수히 많다. 서로들 자신들의 종교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종교가 정의라고 부르짖는다. 이럴때 자신들의 믿는 신(종교)은 정의가 되는 것이며, 정의는 모든것을 정당화 시킨다. 이슬람의 성전이 그 좋은 예가 되며, 기독교의 우월적 승자주의식 선교형태(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식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 전쟁들이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되어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역할은 구경꾼이나 이신론에 불과하며 단지 하나님을 배제시킨 종교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종교들은 말한다. 신의 정의를 위해!
러셀은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신을 부정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 역시 그는 자신이 무신론자 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라고 했으니까.
신이 속시원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 " 나 여기 있소"를 보여준다면 현재 무신론자, 유신론자 ,불가지론자 등의 논쟁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텐데 그분은 아마도 이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그분의 존재를 쉽사리 들어낼 것 같지는 않으시다.
5.
이 책은 무신론자인 사람보다는 나 처럼 유신론자인 사람이 읽어야 더 유익한 책인듯 하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근저인 선과 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닌- 기독교가 아니면 악-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잣대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던 하나님 만큼 이 세상에서 관심의 대상이 또 어디있으며 인간의 각종 주제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마 하나님에 대한 논쟁은 이 인류가 끝나는 그때까지 지속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논리와 이론을 만들어서 책을 내고- 팔아먹고-( 그렇게 본다면 그들도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연을 하고 강의를 하고, 반대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난 러셀처럼 나는 왜 기독교인가 라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얘기하지는 못하겠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중에는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아주 많다. 그럼에도 왜 나는 기독교인이가를 얘기해야 한다면, 나는 내 존재와 실존에 대한 나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서 부터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내 이드, 에고, 수퍼에고는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이는 내 실존에 대한 긍정의 답변이 되기 때문이다.
6.
내가 만약 신을 알지 못했다면- 혹 믿지 않았다면- 난 러셀보다 더한 지독한 무신론자가 되어졌을 듯 하다. 러셀의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을 믿는 C.S 루이스가 한 말 같기도 하다.
" 훌륭한 삶이란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