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게 될 거야 - 사진작가 고빈의 아름다운 시간으로의 초대
고빈 글.사진 / 담소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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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류시화가 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인도라는 나라에 매혹되었던 적 있습니다. 타향살이하는 이방인이 멀리 두고 온 고향을 그리듯 그 나라를 꿈꾸었지요. 맨발로 페달을 밟는 늙은 릭샤꾼의 검은 등허리를 찌르는 뜨거운 태양볕과 기울어진 오두막의 벽에 붙어 바싹바싹 말라가는 소똥, 그 옆에서 차파티를 굽는 여인들의 붉은 정수리 같은 것들을 애타게 그리던 시간들. 힌디어를 배우겠다고 회화집을 사기도 했습니다. 미로처럼 구불거리는 이상한 글자들을 따라 그리고 있으면 적이 향수가 달래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사느라니 비워진 오래된 방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그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참, 오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그렸고, 떠났고, 무성한 소문들 속에서 인도는 빛을 잃어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고향을 빼앗긴 심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나의 고향을 잃어갔던 것 같습니다.

    무섭도록 책이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이따금 쓸쓸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비행기와 인터넷의 속도가 안타깝게 여겨질 때도 있고요. 사람들은 더 이상 인도를 꿈꾸지 않습니다. 손만 뻗치면 인도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나는 여행책도 잘 보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공산품 같은 인도는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해 여름, 나는 사막에서 우연히 파란소와 마주쳤다. 그는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이며 무심한 듯 타박타박 내게로 왔다. 나는 두려움과 경외심에 차 단박에 매료되고 말았다. 닐가이! 그것은 운명 같은 끌림이었다. (본문 중에서)

 

 

    지금 내 옆에는 다 읽은 여행책 한 권이 놓여 있습니다. 잃어버린 나의 고향을 되찾아 준 고마운 책입니다. 사진작가 고빈이 인도와 티베트를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여타 여행책들과는 다른 특별한 정서가 마음을 물들입니다. 그의 여정에는 항상 짐승들이 동행하고 있습니다. 고집센 당나귀와 해변의 떠돌이개, 사막의 파란소와의 정답고 신비한 유대가 그려지지요. 그가 찍은 사진들에서도 짐승에 대한 애정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픈 발이 어서 낫는 게 좋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놀 수 있게 발이 계속 아픈 게 좋을까?' 발을 다친 당나귀의 사진에는 혹독한 당나귀의 생을 연민하는 고빈의 마음이 담겨 있고요. 천진하게 웃는 테러리스트(^ ^)의 품에 안긴 비둘기는 그대로 평화의 상징이고요. 인도의 뒷골목을 지키는 갱스터 개들의 모습에는 떠돌이개의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숱한 계절이 바뀌어도 망고를 볼 때면 숲에서 헤어진 파란소가 생각났다. 그러고 나면 그때 내가 불었던 피리소리 가락을 타고 그가 껑충껑충 뛰어올 것만 같다. (본문 중에서)

 

 

    짐승을 좋아하는 고빈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만남들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는 짐승의 순수함이 좋다고 썼습니다. 주인의 무자비한 매질에도 고집을 꺾지 않던 당나귀와 사막의 야생동물을 한순간에 길들인 것은 달콤한 비스킷이 아니라 순수에 대한 동경이었습니다. 이 책에 담긴 여정은 순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읽힙니다. 순수를 따라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후자 쪽이 더 가까운 것 같네요.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만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의 순수를 따라가는 그 여정에는 순수한 만남과 헤어짐이 있습니다. 그리움이 있고요.

 

 

    자아드 풍크는 치유를 위한 일종의 마술적인 의식이었다. 동물이 병들면 주인은 개울가에 가서 눈을 감고 손에 잡히는 돌멩이 하나를 집는다. 그 돌멩이를 집으로 가지고와서 쌀독 속에 넣어둔다. 그리고 매일 병이 치유되게 해달라고 쌀독에 대고 기도를 한다. 만약 동물의 병이 나으면 쌀독에 들어있는 쌀로 신성한 음식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본문 중에서)

 

 

    사기꾼인지 성자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사두들과 껌처럼 들러붙는 구걸하는 아이들. 소와 원숭이와 버스와 오토바이와 릭샤로 분잡한 거리. 여행자를 봉으로 아는 탐욕스러운 장사치들. 언제부터인가 인도를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나에게 또 다른 인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인도'는 오래 전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떠돌이개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짐처럼 짊어지고 기꺼이 감수하는 여행자, 멀미하는 개를 위해 버스의 좌석을 양보하는 청년, 당나귀의 콧등이 쓸리지 않게 하려고 고삐에 헝겊을 대어주는 어린 소녀(책표지 사진), 개와 닭과 염소와 당나귀를 위한 방을 따로 내어주는 구자르족 사람들에게서 자아드 풍크의 숭고한 정신을 봅니다. 순수한 짐승의 눈을 닮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갑니다. 테러리스트(^ ^)의 적의와 고약한 당나귀 주인의 탐욕은 너무 빤하여 위험하지 않고요.  

 

 

    나는 사막 한 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나요?"

   "사막이요."

   "그럼 이쪽은요?"

   "역시 사막이요."

   "그럼, 그 사막에 사람은 사나요?"

   "밀레가!"

   "그럼 찻집도 있나요?"

   "밀레가!"

   "그럼, 걸어서 사막을 여행해도 별 문제가 없겠네요?"

   "삽 쿠치 밀레가!"

   '삽 쿠치 밀레가'는 인도어로 '모든 것을 만날 것이다'라는 뜻이다.

    나는 계속 물었다.

   "그래도 이 땡볕에 물을 못 만나면 쓰러져버리지 않겠어요? 그리고 사막엔 독사가 많다고 하던데 뱀한테 물릴 수도 있잖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그것이 당신 운명에 예정되어 있다면 당신은 결국 그 운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운명은 거창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걷다 마주치는 파란소 같은 것 아닐까요. 해변가나 뒷골목에서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는 떠돌이개일지도 모르고요.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운명입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니차와 같이 지구도 돌고 나도 돌고 너도 돌고, 돌고 돌다 보면 다시 만나지는 것이 삶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이 책은 매우 정다운 방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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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 - 몸에 관한 詩적 몽상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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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관통하지 못하는 언어는 어디로든 데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낀다.
    몸에게 닿으려는 언어는 비밀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시가 단어 하나 속에서 숨이 차오르는 숨 쉬기이듯이, 시는 육체를 밀월하는 어떤 부위를 나 아닌 누군가의 몽정이라고 부르려는 호명에 가까운 것이다. 밀어密語란 보이지 않는 언어로 떠나보는 여행이다. 네 몸의 어떤 부분으로 떠나는 밀월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시인 김경주의 산문집입니다. 이성과 감성을 압도하는, 아니,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내밀한 호흡을 새기는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이 글을 쓰기까지 한참을 머뭇거렸습니다. 은밀한 숨 쉬기가 지속되기를 바랐습니다. "흐려지는 목젖"의 떨림을 나직하게 기록하면서 위험한 꿈에 연루되고 싶었어요. "귀에서 흘러나간 달팽이"의 행방이 묘연한 귀울림의 밤, "연해지는" 당신의 "눈" 속에 뛰어들어 희미한 잠에 드는 꿈 같은 것. 한없이 흐릿해질 것도 같았는데, 외려 점점 또록또록해지는 감각이 꿈속 생각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숨이 끊기고 막힐 때마다 감미로운 어지럼증이 찾아들었고요. 이 모든 은밀한 감각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체는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언제나 허공을 차지하는 일종의 균형이다. 詩가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언어에게서 태어나는 하나의 육체라면 뛰어난 산문散文은 그 육체를 감싸며 바깥으로 겉도는 하나의 선이다. (본문 중에서)

   


      김경주는 시인입니다. 뼛속까지 시인입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시인입니다. 시인의 "보이지 않는 언어"를 더듬거리며, 이따금 나는 비현실적으로 환해지거나 캄캄해지고, 귀신 들린 형광등처럼 깜박였습니다. 더듬거리면서 읽어야 하는(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반적인 난독과는 조금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언어"란 무엇인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 귀신이 너무 매혹적입니다. "가장 부적절한" 언어로 우리 의식의 은밀한 "육체를 감싸"고 겉돌면서 몽상을 도발하는 것이죠. 물질과 정신, 가시可視와 비가시 영역의 간극에서 시인의 몽상은 "귀기가 서리고 무서울 정도의 적막"을 품은 "동요"처럼 흘러나와 사방을 떠돌고 있습니다. 
     

      은隱의 언어, 은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나른하고 생경한 이 감각은 비밀스럽고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보이지 않는 저 먼 세계는, 그리움입니다.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꿈꾸는 "가장 부적절한" 방식이 있다면 바로 "밀어"일 것입니다. 시인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 그 언어는 꿈보다도 멀기 때문입니다. "밀어"는 피를 말리고 살을 떨리게 만듭니다. "핏줄"을 찾아 헤매는 "드라큘라"의 언어, "입술"이 토해내는 "나비" 같은 언어입니다. 자꾸자꾸 말라가다 증발하고 흩어져 떠돌게 합니다. "밀어"는 떠도는 언어입니다. 떠도는 자들의 언어이기도 하고요.

 

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귀신 같은 책입니다. 귀신의 귀신에 의한 귀신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완전히 홀리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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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3-15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사두고 야곰야곰 읽고 있어요.
글도 좋지만 사진이 무척 좋더군요.^^
페티시즘적인 사진들이 은밀한 언어를 대신하는 느낌이었어요.
소통이 어려운 시를 쓴다는 말을 듣는 김경주 시인을 요즘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전.

kmrmrmr 2015-05-1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김경주 시인...
몇년 전 강의 시간에 비평문 쓰기를 할 때 시간에 쫓겨 몇 개의 시만 골라
호로록 읽고 난 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글에 화가난 저는
나는 이 시를 인정할 수 없다며 ㅋㅋㅋㅋ 그랬다가 결국 D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 후..
다른 시집 `기담` 이었더랬죠 아마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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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체국 post office>은 찰스 부코스키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책표지 보이시죠? 저 구김살 많은 얼굴의 주인공이 바로 부코스키입니다.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네요. 너무 적나라하잖아요. 칼끝으로 깊게 그어놓은 것 같은 주름과 조소를 머금은 듯한 표정이 그의 굴곡진 삶과 작품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쓰기까지 부코스키는 매우 고된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도살장이나 개 사료 공장 같은 데를 전전하면서 공원 벤치에서 잠들었지요.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우체국에 취직합니다. 거기서 12년 동안 일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씐 작품이 바로 <우체국>입니다. 자전적인 소설이지요. 등장인물들도 실제 인물을 모사했다고 합니다.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소설적인 요소는 결여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6부로 구성된 이 작품은 소설적 짜임이 무시된 채 낱낱의 에피소드를 나열하고 있을 뿐이지요. 단순하고 투박한 언어로 옮겨진 하급 노동자의 일기 같은 느낌이 강합니다. 툭하면 '니미럴','씹할' 같은 표현이 등장하고요. 씹하는 장면도 자주 묘사됩니다.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본문 중에서)

 

 

    주인공 헨리는 마초적인 기질이 다분한 한량입니다. 그가 우체국에 근무하게 된 것도 순전히 여자와의 성적 해프닝에서 출발합니다. 성탄절 임시 집배원 일을 하던 도중 여자랑 눈 맞아서 한바탕 질펀하게 놀고 보니 집배원처럼 좋은 직업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실상은 아주 다릅니다. 그보다 빡센 직업도 없었지요. 읽는 입장에도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이 1971년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세기 전후 미국사회에 팽배한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가 지배하는 노동 환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노동 감독과 엄격한 노동자 훈련,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생산 양식의 표준화를 도입하여 자유 공간을 제거하는 방식의 경영 방식을 통해 제한된 시간 내에 노동 생산성을 극대화하는"것이 이들 목표였지요. 작품에 묘사된 우체국 하급 직원의 업무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60센티미터 트레이에 담긴 우편물을 23분 안에, 정확히 23분이어야 하지요, 분류해야 하고요. 단 1분이라도 어긋나면 현장 감독에게 불려가 경고를 받습니다. 열두 시간 일하는 동안 단 두 번, 정확히 10분씩만 휴식할 수 있지요. 직원에게는 엄격한 업무 규칙을 강요하는 우체국은 정작 임의대로 연장 근무를 명령합니다. 퇴근해도 업무는 끝나지 않습니다. 복잡한 구역 구분표를 암기해야 하니까요. 헨리는 한마디로 물먹은 거지요.

 

 

     이봐, 자기. 미안하지만, 이 일 때문에 내가 미쳐 가고 있다는 거 모르겠어? 저기, 그냥 포기하자. 그저 빈둥빈둥 누워서 섹스나 하고 산책이나 하고 얘기는 조금만 하자. 동물원에 가는 거야. 동물을 구경하자. 차를 타고 내려가서 바다를 구경하는 거야. 45분밖에 안 걸려. 오락실에 가서 게임도 하고. 경마장이나 미술관, 권투 경기에 가자. 친구도 사귀고. 웃자고. 이렇게 살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거야. 이러다 죽는다고. (본문 중에서)

 

 

    우체국 업무를 제외한 헨리의 일상은 여자, 술, 경마가 전부입니다. 술에 취해 여자랑 뒹굴고 도박이나 하는 이 사내에게서 좋게 보아줄 만한 구석이라고는 없습니다. 헨리의 삶에는 도덕이나 예의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것 모릅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여자는 성욕을 해소할 구멍에 불과하고요. 그저 흐르는 대로 살아요. 우체국의 빡빡한 업무와 부당한 처우가 그에게 얼마나 지옥 같았을지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일이 년도 아니고 십이 년을 버텼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십이 년을 버티고 난 헨리는 마침내 사직합니다.

 

 

     아침이 되자 아침이었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아마 소설을 쓸 것 같군,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을 썼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부코스키, 그에게 소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작품을 수식하는 반(反)노동이니 반(反)소설이니 하는 것들은 지나치게 고상한 표현이고, 어쩌면 "똥구멍" 같은 것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똥구멍이 뭐가 나쁘냐고! 당신한테도 똥구멍은 있잖아. 나도 똥구멍이 있다고! 가게에 가서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하나 사봐. 거기도 똥구멍은 달렸어! 지구상에는 똥구멍이 널렸단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나무들도 똥구멍이 달렸는데 못 찾는 것뿐이야. 나무들도 이파리를 싸잖아. 당신 똥구멍, 내 똥구멍,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똥구멍으로 가득 찼어. (본문 중에서)

 

 

     주류 문단이 외면한 그의 작품을 전 세계 독자들이 열광하며 읽고 있습니다. 그의 책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이 도난 당한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합니다. 여기서 '도난'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네요. 부코스키의 책은 몰래, 훔쳐 읽어야 할 것 같은, 그러니까 좀 떳떳하지 못한 기분을 안겨주지요. 너무 적나라하니까요. 상스럽고 저속하니까요. 똥구멍 같으니까요. 사람들은 굳이 똥구멍의 존재를 의식하거나 발설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우리한테 속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불편하니까요. 부코스키는 우리 앞에 똥구멍을 들이대고 있어요.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욕지기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면서요. 똥구멍이 뭐가 나쁘냐고! 당신한테도 똥구멍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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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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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김영하, 옥수수와 나 중에서)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작은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입니다. 작품 서두에서 자신을 옥수수라 믿는 남자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슬라보예 지젝의 놀라운 이 농담은 기묘하고 불길한, 그러니까 좀 께름한 예감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농담이지요. 작가는 왜 작품의 도입부에 이런 이상한 농담을 삽입했을까. 사뭇 신경 쓰이는 것입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촉각을 곤두세우고 옥수수와 닭의 암시를 파헤쳐 나갑니다. 재미있습니다. 퍼즐의 공백을 채워나가는 것 같은 읽기.

 

    '나'는 슬럼프에 빠진 작가입니다. 글을 못 쓰는 것이죠. 작가에게는 그보다 큰일도 없을 것입니다. 글을 못 쓰는 것도 큰일인데, 더 큰일이 겹칩니다. 계약금만 받고 원고를 안 넘긴 출판사에서 소송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쓰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나'는 그럼에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오래 갈등합니다. 갈등의 중심에는 전처에 대한 미련과 질투가 있습니다. 출판사 사장과 전처가 내연관계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점점 굳어져 확신이 되고 마침내 하나의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질투에 사로잡힌 '나'는 잘 써도 낭패, 못 써도 낭패라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신이 쓴 소설이 잘 팔리면 전처와 정부의 배를 불리게 되어서 낭패, 안 팔리면 그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므로 낭패. '나'는 이 딜레마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출판할 수 없는 난해하고 어지러운 소설"을 써서 역으로 사장을 엿먹이자는 발상이었습니다.

    전처와 사장의 관계에 대한 '나'의 확신에서 시작된 찌질한 복수극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차이나타운의 낡은 아파트. 총구를 겨눈 사장 앞에서 '나'의 확신이 무력하게 붕괴되어가는 과정은 '나'의 믿음을 믿어온 독자에게도 적잖이 충격을 안겨줍니다. 자신이 쫓는 옥수수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는 닭들과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을 옥수수로 알고 쫓아오는 닭들에 쫓기는 남자에 관한 농담에 킬킬대다 총 맞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참으로 통쾌한 이 배신감을 마다할 독자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계획은 빈틈없고 완벽했다. 단 하나의 아귀도 어긋남이 없이 딱딱 맞아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영어의 플롯은 음모로도, 그리고 구성으로도 번역된다.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옥수수와 나 중에서)

 

 

    김영하 특유의 능청스러운 입담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자본의 위력 앞에 무력한 '나'의 붕괴 과정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아프게 꼬집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웃어넘길 이야기는 분명 아닙니다만, 그래서 더욱 유머가 필요한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작품은 정말 웃깁니다. 재미있어요. 생각을 좀 더 하고 싶은 분들은 문학평론가 장두영의 작품론을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작품론 같은 건 안 읽는 편인데, 기똥차게 개구라 치는 작품론들에 진력나서요, 그런데 장두영의 작품론은 군더더기 없고 친절합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가치를 빛내주는 것이 수상 작가에 대한 집중 조명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적 자서전이나 작가론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김영하의 문학적 자서전은 역시 김영하답다고 하겠습니다. 문학이 죄가 되는 먼 미래에서 피의자가 된 김영하와 조사관의 면담 과정을 설정해 김영하는 자신의 문학관을 들려줍니다. 소설가 염승숙이 쓴 작가론은 화장품에 딸려오는 샘플같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우수상 수상작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작품은 김경욱의 <스프레이>와 조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이었습니다. 실수로 다른 집 택배 상자를 가져오면서 억눌려 있던 욕망과 감정을 좇는 남자의 이야기를 경쾌하게 그려낸 <스프레이>는 <옥수수와 나> 못지 않은 유머를 자랑합니다. 정말로 웃깁니다. <옥수수와 나>의 웃음이 이지적이고 이질적인 농담에서 촉발한다면 <스프레이>에서 웃음을 촉발하는 것은 공감입니다. 한 번쯤 겪어봤거나 겪어봄 직한 일상적이고 사소한 실수와 충돌. 우연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상을 따라가는 이 작품은 일견 우연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엄청난 우연을 추동하는 필연적인 그림자를 볼 수 있습니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존재지요. 작품을 읽으면서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너와 나는>은 아이다운 잔혹함과 불가사의한 예언이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친구의 죽음과 얽힌 불가사의한 기억을 더듬는 '나'의 고백 중심에 있는 것은 '생의 욕망'입니다. 생의 욕망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무력해지는 것일까요. "살아남아야 생을 바꿀 수 있고, 정말로 간절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나'의 목소리는 많은 생각을 던져줍니다.


    김숨의 <국수>는 김경욱과 하성란의 작품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마에 오른 작품이라고 합니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새어머니를 위해 손수 국수 반죽을 치대는 과정을 통해 이해와 사랑이라는 화해의 면발 가락을 뽑아내고 있는데요. 그 섬세한 서사가 개인적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조해진의 <유리>는 어린 시절의 상처에 갇힌 여성의 단절된 심리세계를 그리고 있는데요. 끝내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지 못하는 결말이 아쉽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연상시키는 최제훈의 작품 <미루의 초상화>는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지만, 이야기 구성이나 소설적인 재미 측면에서는 뛰어납니다. 함정임의 작품과 하성란의 작품에서는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이 워낙 개성이 강해서일 것입니다.


    김영하의 자선 대표작으로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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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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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력은 항상 붕괴를 수반한다.

                             (책에서)

 

 

 

 

      얼마 전 TV에서 지구 종말을 다루는 미스터리 프로그램을 본 적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구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일상과는 거리가 먼 종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로의 목사는 매일 언덕에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팔을 불어대고, 자신이 선 땅을 우주정거장이라 주장하는 스님은 이상한 언어를 해독하면서 외계생명체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지구 종말을 준비하는 인터넷 모임 인원수도 장난이 아니었고요. 모든 사회적인 소속에서 벗어나 종말을 대비하며 무리 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사회 특권층이 사는 고급빌라에 숨겨진 지하 벙커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종말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크게 와닿지 않았고요. 인간의 마음보다 큰 우주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와 우주 사이의 광막한 거리 같은 것을 느끼고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볼 때 '말도 안 되는' 그 믿음이 그들에게는 자신을 통째로 내던질 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쓸쓸했습니다. 그래서 웃을 수도 없었습니다.

 

 

   종말. 종말. 종,말.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나와는 무관한 저 먼 나라의 일인 듯 아득해요. 무관심보다는 무지 탓이 큽니다. 고집스러운 불신도 한몫하겠네요. 저는 미래를 믿지 않아요. 여태 마음에 우주를 품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우주를 품지 못한 저에게 종말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생각이 여기 닿자 울고 싶어졌습니다. 너무 외로웠고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런 연유에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세상의 종말을 조명합니다. 책을 쓴 크리스 임피Chris Impey는 우주 생물학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에서 우주에 이르는 영원을 넘나듭니다. 하루살이의 일생과 몇억 년의 세월이 교차합니다. 현재와 미래, 과거와 더 먼 과거를 오가는 이 책은 독자에게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요구합니다.

 

 

    이 광대한 규모의 이야기는 12장에 걸쳐 진행됩니다. 인간의 노화와 죽음부터 별들의 충돌과 파멸에 이르는 장엄한 레퀴엄이라고 할까요. 천문학은 물론 화학, 지질학, 생물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지식이 동원된 이 책은 물론 명확한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보여줄 수 없지요. 누구든 끝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끝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입증된 과학적 사실과 다양한 가설을 토대로 다만 예측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생명체의 지각력은 천혜의 축복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하다. 우리는 운 좋은 금요일 밤을 보내고 잠들었다가 토요일 아침에 우주적 의식으로 깨어나 갑자기 불안감에 빠진 오합지졸일지도 모른다. 이보다는 차라리 개미처럼 세상 물정과 상관없이 부지런하거나, 하루살이처럼 단명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낙지나 문어처럼 가까운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만 두뇌를 사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책에서 옮김)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책은 그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는데요. 허탈하다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이 미약하다고요. 그런 분들께는 이 책보다 SF영화나 소설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성경도 좋고요.

 

 

    책의 제목을 주목해 주세요. 의문문이지요. 책을 연 순간부터 독자에게는 의문부호가 따라붙습니다.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사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숭이오징어들과 공룡거북, 주먹만 한 딱정벌레와 집채만 한 도마뱀이 등장하는 미래 생태계의 모습에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가늠해 볼 수도 있고요. 냉동인간이나 로봇인간은 생명윤리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합니다. 얼음층이 녹아 홍수가 덮치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볕에 바닷물이 증발하고 동물들은 더위에 할딱이며 죽어가고 지구가 서서히 말라가면서 심해 바닥의 퇴적층에 저장되어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에 유입되고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다 이 기체마저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리고 마침내 35억년 뒤에는 바싹 마른 바위만 남는다는 지구 종말 시나리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5억 년 뒤의 미래가 우리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싹 마른 바위만 남은 미래의 지구를 보는 우리는 여기, 이 자리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죽음이나 종말이 아닌 삶입니다. 우주가 아닌 바로 여기, 마지막이 아닌 지금이지요. 저는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만족스러워요.

 

 

    이 책은 우주의 탄생과 소멸의 과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상상을 불허하는 세월을 간직한 별들의 노화와 죽음의 과정은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그 폭발적이고 허망한 아름다움의 세월은 역설적이게도 작고 허물어져가는 별에서 죽어가는 우리 존재를 더욱 빛내줍니다. 몇억 년의 세월을 자랑하는 별들에 비하면 우리 일생은 하루살이의 짧은 날갯짓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지요. 최근 보았던 영화 한 편이 떠오르는군요. 지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아. 최후의 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따라가는 이 영화는 지구 종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와 행성의 충돌 장면은 허망할 정도로 짧게 처리됩니다. 시작에서 끝까지 주인공의 심각한 우울증세와 불안감을 쫓아가면서 영화는 진정한 종말의 의미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작은 부분이면서 전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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