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시간 - 당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했던, 버려진 반려견들의 이야기
킴 캐빈 지음, 안지은 옮김 / 가치창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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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나를 버리지 마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언젠가 TV에서 섬에 버려지는 개들의 사연을 본 적 있습니다. 귀소본능을 저어한 사람들이 일부러 배를 타고 와서 개를 남겨두고 떠난다는 내용이었죠. 고아가 된 개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섬 곳곳을 떠돌고 있었는데요. 굶주림과 추위보다도 견디기 힘든 건 외로움이었던가 봅니다. 사람의 목소리와 온기에 길들여진 천진한 개들은 낯선사람을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마음 깊은 곳에는 '가족'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겠죠. 한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앉아 가족을 기다리던 개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애견 인구는 1,000만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유기동물의 수도 10만에 이른다는 사실. 무책임하고 냉혹한 인간들에 의해 유기된 동물들은 보호소에서 일정 기간 보호를 받는데요. 일주일, 길게는 열흘 이내에 입양이 되지 않은 동물들은 안락사를 당하게 됩니다. 또 다른 유기동물의 자리를 위해서. 서울에서만 하루 50마리 이상의 유기견이 발생한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가늠해 보면 그 수가 엄청나겠지요. 자유롭게(?) 거리를 떠돌던 개(또는 다른 동물들)들은 '구조'라는 명목하에 졸지에 시한부 삶을 선고받게 됩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과연 이 동물들은 어떤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보호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자세 자체가 '구조'보다는 '도살'에 맞춰져 있어요. 개들은 구조의 대상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일'이고, 따라서 아무런 가책 없이 '일'을 처리하는 거죠. (본문 중에서)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은 미국의 동물보호소에서 벌어지는 참혹상을 고발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의 현실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저자(킴 캐빈)는 유기견 '블루'를 입양합니다. 블루가 안락사 직전 구조된 개라는 것을 알게 된 킴은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지요. 블루처럼 건강하고 영리한 강아지가 왜 안락사 대상이 되어야만 했는가. 이 책은 그 의문을 따라 씌어졌습니다.

 

   보호소 관리자는 패니 매이가 15분 안에 안락사를 시키게 되어 있어서 제가 입양할 수가 없다고 말했어요. 저는 그 개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제 말을 들으세요. 그 개는 15분 안에 죽을 거라니까요. 입양하실 수 없다고요'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본문 중에서)

 

   킴이 고발하는 대부분의 동물보호소들은 개들을 전혀 보호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호소 직원들은 마치 쓰레기를 처리하는 청소부들처럼 보여요.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안락사 방식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방식은 히틀러 시대를 연상케합니다. 작은 금속 상자에 안락사 대상 개들을 던져넣은 후 뚜껑을 닫고 가스를 주입하는 것이죠. 죽음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모든 개들이 죽기까지 30분이 걸리기도 한다고 하는데요. 개들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하면 다음 차례의 개들이 방금 죽은 개들의 사체 위에 던져집니다. 가스실 작동이 완료되면 축 늘어진 개들의 사체는 쓰레기 차량에 실려 일반 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지는데요. 간혹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붙어있는 개들이 발견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왔죠. 보호소 안은 늘 개들이 우글우글했어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개를 가둬놓을 우리가 10개밖에 없었어요. 뭐가 뭔지 구별할 수가 없었죠. 우리 하나에 너무 많은 개들이 있었거든요. 일주일에 한 번씩 시에서 덤프트럭을 보내주는데 그 트럭은 소형 트럭이 아니라 대형 덤프트럭이었어요. 저희는 개들을 한 마리씩 막대기로 잡아 심장 꼬챙이1로 찔러 죽였죠. 저는 정말 그런 방법으로 개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일자리를 잃었을 거예요. (본문 중에서)

 

   72시간. 3일이죠. 3일 동안 미국 내 동물 보호소에서는 약 4만 2,000마리의 유기동물들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인간의 무책임과 냉혹함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숫자이기도 하지요. 킴이 만난 보호소 직원들의 눈에는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죽여야 하는 개들을 생산해내는 무감각하고 냉혹한 사람들"로 비춰진다고 합니다.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보호소의 운영 실태를 비난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동물들을 책임감 있게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닐까.

 

  미국에는 낡아빠진 옷들을 담은 가방을 굿윌(Goodwill)2에 넘겨주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자신의 개와 강아지를 보호소에 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본문 중에서)

 

    거실 카펫을 망쳤거나 가장 좋아하는 신발을 못 쓰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고 해서 버려지는 개들이 많습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동물을 입양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 유기동물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 같아요. 펫샵에서는 물론 인터넷에서도 쉽게 동물을 구할 수 있잖아요. 제가 가입한 모 카페에서도 매일 수십 마리의 유기견이 등록되고 있습니다. 순수무료 분양도 할 수 있고요. 그런데 카페를 통해 개를 입양한 사람이 다시 재분양 글을 등록하는 경우도 여럿 봤습니다. 개의 기본적인 성격이나 문제점 등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쉽게 입양한 결과죠. 다른 주인을 찾아주려는 사람들은 그나마 양심적입니다. 사람 손에 길들여진 아기 같은 개들을 위험한 거리 혹은 외딴 섬 같은 데 버리는 사람들에 비하면 말이죠.

 

슬픔이 가득했던 시절, 이 녀석들은 내 곁에 바싹 달라붙어 있거나 공원에 산책 나가자고 졸라대 상쾌한 바람을 쏘이게 해줬으며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아주는 등 최선을 다해 날 위로해주었다. (본문 중에서)

 

동물보호소의 실태를 취재하면서 킴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물의 안락은 물론 적절한 입양 가족을 찾아주는 데 최선을 다하는 진정한 보호소와 구조 단체, 위탁 사육, 무료 중성화수술 등 다양한 자원봉사 단체들의 이야기도 책에 담겨 있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동물에 대한 의식에 긍정적인 힘을 실어주기를 바랍니다.

 

 

 

 

* 블루의 페이스북: facebook.com/littleboybluedog

 

 

 

 

  1. 심장 꼬챙이는 말 그대로 개의 심장에 직접 찌르는 주사를 말한다. 국립수의학 지침에는 그 주사를 사용하기 전에 진정제를 투여해야 하며 더불어 개의 심장에 주사를 바로 찌를 수 있는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다. 구조대 회원들 및 퍼슨카운티 동물 보호소 관리자 론 쇼는 진정제를 투여하지 않거나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 심장 꼬챙이를 사용했을 경우 개는 아주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말했다.
  2. Goodwill
    중고 상품을 취급하는 세계 최대의 비영리 사회복지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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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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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

 

 

 

 

     자의식이 싹트면서 인간은 자기 존재의 기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을 풀어나가는 여정이 바로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이와 젊은이와 늙은이. 철학자와 예술가와 노동자...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에서 우주생물학자인 크리스 임피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통해 우리의 기원을 이야기하는데요. 우주생물학,이라 해서 뭔가 굉장히 난해하고 딱딱할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전작(《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원제: How It Ends》)에서 보여준 지적 유머와 문장력을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문학적 지식은 물론이고요. 전작에 비해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면 구성입니다. 각 장의 시작과 끝부분에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나'의 이야기를 삽입하고 있는데요. 대단합니다. 우주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탄탄한 문장력을 자랑합니다. 이 부분은 다소 복잡하고 난해한 과학이론과 추론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있는데요. 막연한 우주 이론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주 이론과 무관하게 읽어도 손색없는 하나의 매혹적인 이야기가 되고요.

 

      최초의 빛. 나는 최초의 가장 무거운 별을 찾고 있다. 이 별이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저 별이 최초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당해 보인다. 이 별은 소리 없이 죽음을 맞이했고, 폭풍파가 다가오고 있다. 폭풍파가 도착하자 나는 마치 헝겊인형처럼 흔들린다. 입을 벌려 맛을 보니..., 그을음 맛이다. 그렇다! 나는 몸도 없고 집도 없지만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는 몸을 돌려 폭풍파에 올라탄다. 나는 우주 속의 소우주, 탄소다. (...) 얼마 동안 떠다녔는지 모르겠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주변은 거미줄에 걸린 이슬 같은 구조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있다가 이제 새롭게 만들어지는 별 속으로 들어간다. (...)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나는 하나의 원자일 뿐이다. (...) 나는 어떤 느낌에 사로잡혔다. 슬픔은 아니다. 나는 슬픔을 느낄 수 없다. 상실감과 허탈감이다. 그리고 열기, 강한 열기가 느껴진다. 나는 다시 바람에 올라탄다. 자유는 탄소의 숙명이다. (본문 중에서)

 

     목차에서부터 문학성이 드러나네요. 우리의 잃어버린 쌍둥이, 깊은 시간, 잃어버린 지평선, 안개가 걷히다, 동틀 무렵의 피리 연주자... 우주론을 담고 있는 책을 소개하면서 왜 자꾸 문학성만 운운하는 거야. 하시는 분도 있겠네요. 그냥 소설이나 시를 읽지, 라고요. 그런데요.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어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이 책에 담긴 과학이론이 생소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크리스 임피는 상당한 배려를 하고 있어요. 앞서 언급한 짧은 에피소드부터, 개인적 체험과 철학, 신화와 문학적 지식을 동원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 것이지요. 의인화된 별과 행성들, 우주를 떠도는 '나'의 이야기가 이 책을 여타 과학이론서와 구분 짓는 장점이고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복잡한 별들 사이에서 태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나는 노란색으로 따뜻하게 빛나는 이 별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창백한 푸른 점이 있다. 이 점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역시 거칠고 낯설다. 문명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광활한 배경에서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몇 개의 작은 무리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이 털 없는 원숭이들은 다른 동물의 무리들과 구별하기 어렵지만 천천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 빛이 내 눈에 닿는 데까지는 2만 7,000년이 걸린다. 나는 우리가 특별한 존재로 등장하기 위해서 막 준비를 하고 있을 때의 지구를 보고 있다. 우리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렵과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네안데르칼인을벗어났지만 아직 아메리카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지는 못했다. 약 100만 년 동안 우리는 이 행성을 떠돌고 있다. 나는 너무나 젊고 순수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그 종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 (본문 중에서)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가까운 달에서 시작해 오리온성운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 블랙홀과 빅뱅이론 다중우주론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500쪽에 달하는 분량만큼이나 무게와 깊이를 담고 있어요. 크리스 임피는 자신의 우주생물학적 지식을 철학적 사유와 인간적인 유머, 따뜻한 감성으로 풀어내고 있는데요. 과학적 지식을 넘어선 통찰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지구는 캄캄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물을 연상시켰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크기는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구슬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고 살아 있는 지구는 너무나도 깨지기 쉽고 연약해 보여서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본문 중에서)

 

     앞서 인용한 문장은 아폴로 15호 달착륙선의 조종사였던 제임스 어윈의 말이라고 하는데요. 달 위를 걸었던 사람들 모두가 미치거나 종교를 갖거나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린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고 합니다. TV쇼에서 칼 세이건은 말했습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사과파이를 만들려면 반드시 우주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사과와 파이 껍질에 포함된 탄소와 산소 원자가 만들어지려면 여러 세대의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야 합니다. 파이를 만들 사과와 사람이 형성되기까지는 또 수십억 년이 걸리고요. 사과파이 한 조각에도 우주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임스 어윈과 칼 세이건의 말은 삶에 대한 허무와 애착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너무나도 깨지기 쉽고 연약해 보여서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은 존재인 우리는 수십억 년의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우주의 한 조각입니다. 수십억 년의 세월이 우리 안에 흐르고 있어요. 별의 탄생과 소멸. 폭발하면서 새로운 별이 생성되는 우주의 경이. 이 경이로운 우주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우주를 떠도는 별의 잔해. 그 아름답고 앓음다운 우주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서평) http://gray_shoes.blog.me/30131573798?Redirect=Log&fr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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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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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훈은 그의 단편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에서 변의(便意)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나'의 '복통'을 실감나게 그려냅니다. "작은 강아지"에서 "도베르만" "사자" "호랑이" "하마"...에서 "티라노사우루스 급으로" 발전한 복통. 폭발 직전의 배설욕구는 폐쇄된 화장실 앞에서 번번이 꺾이고 마는데요. 절절매는 '나'의 앞에 친절한 경찰관이 등장합니다.

 

    여긴 상점과 통로로 된 미로입니다. 십중팔구는 길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그러니,

    경찰관이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이영훈,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 중에서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 (이하 '소녀시대')에서 '나'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닫힌 화장실,인데요. 지금 소개하는 작품, 이영훈의 장편인데요,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주인공 영호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의붓아들 샘의 '닫힌' 입(또는 마음)입니다. 서른두 살의 보험회사 직원 영호는 암 수술을 앞두고 있는 채연과 즉흥적인 결혼을 하는데요. 결혼과 동시에 덜컥 아버지가 된 영호가 샘의 마음을 열어나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주요한 줄기를 이룹니다.

 

 

       애니메이션처럼 기술이 집적된 창작물도 아니고, 영화처럼 그저 매끄럽고 화려하지도 않아. 분명히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조금만 집중하면 전부 가짜란 걸 알 수 있지. 특촬물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 간극을 즐기는 거야. 피딱지를 떼어내는 것처럼 쉴새없이 저 세계가 가짜란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어느 순간 다시 거기에 발을 들이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의 허무감을 값비싼 장난감으로 채우는 거지. 이야기에 질려갈 때쯤에는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고 다시 이전과 같은 행위들이 반복되는 거야. 특촬물을 좋아하는 동안에는 바로 그런 일들을 즐길 수가 있어. (본문 중에서)

 

 

     '체인지킹'은 샘의 마음을 여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는데요. 그래요. 정체를 밝혀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머나먼 별에서 찾아온 외로운 이방인.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홀로 남게 되는 용사. 숲과 벌판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팔을 뻗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영웅." 변신왕 체인지킹. 두둥. '체인지킹'은 수준미달의 특촬물입니다. 특촬물은 특수촬영물의 준말인데요. 파워레인저나 울트라맨 같은 걸 떠올려 보면 될 거예요. 파워레인저나 울트라맨에 비할 수가 있나요. 안타깝게도 '체인지킹'은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진, 아니, 생각조차 민망한 그런 특촬물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데요. 매사에 무관심해 보이는 샘이 유일하게 열중하는 것이 바로 '변신왕 체인지킹'입니다. 영호는 샘과 가까워지기 위해 '체인지킹'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하는데요. 제목부터가 무성의한 이 특촬물에 대한 탐색 과정은 탐정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입니다. 흥미진진하다는 말이지요.

 

       우리에겐 아버지가 없어. 믿고 따를 커다란 이야기가 없어. 맞서 싸울 적도 없고, 체온을 나눌 친구도 없어. 심지어 우리에겐 우리만의 역사도, 이야기도 없어. 이야기들은 모두 박살났고, 쪼개졌고, 찢어졌어. 우리가 가진 건 그저 계속해서 반복되는 작은 이야기들뿐이야. 이젠 그런 것들을 택해 자각 없이 사는 게 편하지. (본문 중에서)

 

 

     원래는 여기 아무 데서나 똥 싸도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소녀시대》에서 경찰관이 던진 말은 아케이드가 은유하는 문명 생태계에 갇힌 인간의 억압된 본능을 일깨웁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도베르만" "사자" "호랑이" "향유고래"와 "티라노사우루스"를 뱃속에 품고 있는 우리는 무역센터 빌딩 앞 노상에서 엉덩이의 힘을 풀어버리는 '나'를 통해 이상한 해방감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체인지킹의 후예》에서는 라이더레인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영훈은 라이더레인저'의 입을 빌려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는' 이 시대의 현실을 아프게 꼬집고 있습니다.

 


      단숨에 운명을 가르거나 싸움을 끝내는 기술 같은 건 없어. 우리는, (...) 우리는 이대로 계속해서 사는 거야. 아프고, 다치고, 피를 잔뜩 흘리며 재미없고, 재미있는 삶을. 그런 일들이 비틀비틀 이어지는 거야. (본문 중에서)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이영훈이 보여주는 "아프고, 다치고, 피를 잔뜩 흘리며, 재미없고, 재미잇는 삶"을 "비틀비틀 이어"가는 '아버지들'과 그 '아들들(역시 아버지가 될)'의 관계, 그 삶의 양태는 조악하고 지루한 모방물인 '변신왕 체인지킹'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샘은 '체인지킹'의 외롭고 긴 싸움을 지켜보며 낯선 세계에서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러요. "이 세계의 압력에, 그 확연한 질감에 맞서 자신의 인력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지요. 그 순간, 불꽃같은 힘이 솟아납니다. 


위대한 용사의 혈통, 살아남은 생존자,
불꽃같은 분노로, 악에게 복수하리.
곰, 호랑이, 독수리, 사슴, 동물의 힘은 모두 나의 친구.
아아, 체인지킹, 놀라운 전사. (본문 중에서)

   

 

     《소녀시대》와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것은 '자각의 순간'입니다. 변신!이라고 외치지 않아도 불꽃같은 힘이 솟아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곰, 호랑이, 독수리, 사슴, 하마, 공룡 등... 두 작품 모두에서 상징적인 동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소녀시대》에서 동물의 은유는 '억압된 본능'인데 반해 《체인지킹의 후예》에서는 '마음속 상처(또는 두려움)'입니다. '억압된 본능'과 '마음속 상처(또는 두려움)', 즉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의지(義指)이고요. 두 작품 모두에서 가짜손가락'이 등장하는데요. 어? 이 발견의 즐거움이란!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체인지킹을 발견한 샘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고 싶어지는...뭐 그런.

 

    "심장소리가 들려."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 소리와 다른 심장소리가."

     샘이 말했다.

     샘을 돌아봤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명의 힘으로."

    가만히 있었다.

     "용기를 모아."

      샘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피식 웃었다. (본문 중에서)

 

 

     이영훈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장르와 소재를 혼합해 이야기를 빚어내는 능력이 탁월해요.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주제의식 또한 뚜렷하고요. 《체인지킹의 후예》는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품인데요. 샘과 영호, 그리고 그 주변인물들이 저마다의 절망과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아버지가 없고, 우리만의 역사도, 믿고 따를 이야기도 없는 이 시대의 모든 샘들에게 '체인지킹'이 외칩니다. 생명의 힘으로, 용기를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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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사생활 - 여자, 남자를 재구성하다!
EBS 다큐프라임 [남자] 제작팀 지음 / 블루앤트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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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 다큐프라임 《심리다큐, 남자》 제작팀이 펴낸 이 책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남자'를 집중 조명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철저히 여자의 입장에서 씌였다는 것입니다. '남자를 제대로 알자'는 것이 최근 여성운동의 핵심적인 담론이라고 하는데요여성의 삶에서 남성, 즉 아버지와 남편, 아들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공동운명체라는 인식의 발로일 것입니다.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태생적인 남녀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본성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며 자연의 선택이다. 독일의 여성 심리학자 한네 제만은 '반드시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남녀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은 남녀가 서로 존중하며 배려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크게 향상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들이 위축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남성 역할에 더해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까지 떠안은 남자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늘면서 익숙지 않은 가사일에, 육아까지. 스트레스가 장난 아닐 거예요. 게다가 요즘 여자들, 남자를 '찌질이' 취급합니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너무하다 싶을 때가 많아요. 부부 갈등 상황을 다루는 티비 프로그램을 보다가 경악했던 적이 있는데요. 아내의 요구로 남자가 앉아서 오줌을 누더군요. 그런데 의외로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바야흐로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들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남자아이조차 성장하면서 엄마의 주관적이고 자신만만한 갖가지 통제에 차츰 여성화된다. 남자아이다운 거친 행동을 철저히 강제하고 행여 다칠까봐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통제하며 오직 엄마의 여성적인 지시에만 따르게 한다. 남자아이의 자립심은 싹조차 트기 어려운 실정이 되는 것이다. '남자다움'은 근처에도 가기 어렵다. 남자아이는 엄마가 없으면 꼼짝 못하고 차츰 외톨이가 된다. (본문 중에서)

 

 

      생물학적 본성과 사회적 요구가 충돌하면서 현대 남성의 딜레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사회적 요구'에 주목해야 합니다. 남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라는 것은 결국 여성의 남성에 대한 요구입니다. 아들을 남자로 양육하는 것도 어머니, 여성입니다. 아들을 남자답게 양육하는 법에 대해서는 3장에서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데요.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낳고 있는 '왕따' 문제에도 어머니의 양육법이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만 양육하나요. 남편도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도 참, 피곤합니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정체성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엉뚱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 남자들은 그처럼 감정을 억제하고 자기감정을 잘 모르고 왜곡시켜 표현하면서 스스로 감정체계에 큰 혼란을 겪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도 잘 이해 못하게 된다. (본문 중에서)

 

 

      생물학적으로 정서적인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 남자는 태어나서부터 '남자다움'을 강요받습니다. 아파도 참고 무서워도 참고 울고 싶어도 참고...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을 억제하는 것이 전통적인 남성상에서 요구하는 '남자다움'인데요. 결과적으로 남자들은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자신의 감정도 타인의 감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 '덜 떨어진!' 남자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 여성은 어머니의 마음, 즉 모성을 발휘해야 하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남자에게 '사랑'이란 "엄마에 대한 향수이며 애착"이라고 하니까, 말 다 했죠.

 

      오늘날 '좋은 남자'는 '좋은 여자'가 만든다. (...) 둘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부류다. 그러나 좋은 여자는 얼마든지 좋은 남자를 만들 수 있다. 그 첫걸음이 지나치게 자기화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가 있죠. 이 책의 요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여자가 좋은 남자를 만든다는 것이죠. 좋은 여자란 무엇인가. 남성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여자입니다. 좋은 여자는 남자에게 앉아서 오줌 누라는 명령 따위 하지 않지요. 이 책에 대한 서평에 어떤 분은 이렇게 썼더군요. 우리 시어머니가 자주 하는 말(여자가 참아라)하고 똑같더라고. 같은 책인데 그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싶더군요. 글쎄요. 저는 동의하기 힘들고요. 그리고 또, 안 참으면 어떡할 겁니까? 아파도 참고 무서워도 참고 울고 싶어도 참는 남자도 있는데, 조금 참으면 안 됩니까. 참는다는 것은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남자의 본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고요. 남자가 행복해야 여자의 삶도 행복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이 책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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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변화한다 - 모옌 자전에세이
모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모옌이에요. 중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해 화제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죠. 지금 소개하는 책은 모옌의 특별한 회상록이에요. 1979년부터 2008년에 이르는 삼십 년여의 세월을 관통하는 자전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에세이라고 하지만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2008년에 모옌은 인도의 출판 편집인으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게 됩니다. 지난 삼십 년 동안의 중국의 변화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거절했대요. 그 주제가 너무 광범위해서요. 그런데 그쪽에서 끈질기게 매달리더랍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쓰든" "마음대로" 써달라고 해서 쓰게 된 것이 이 책이라고 하는데요. "마음대로"라는 조건에 넘어갔지만, 막상 글을 시작하고 보니 그 주제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해요. 소설적 구성을 따르는 이 글에서 모옌은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중국 역사의 격변기를 살아내는 생생한 인물들을 통해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삶의 이치를 이끌어냅니다. 

 

    그의 모습이 영화 속 스파이 영웅처럼 멋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두 '번개'를 맞은 듯 뒤집어졌다. 그는 등을 곧게 펴고 가슴을 내민 채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학생들과 학교의 지도자들 사이를 당당하고 자신 있게 걸어갔던 것이다. 걸어가면서 그는 손에 든 채찍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묘하게 과장된 목소리와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은 대체 대포를 어떻게 보관하는 건가!?"

  학교의 지도자들은 넋을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허즈우가 당당하게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그가 자신들 앞에서 방향을 바꿔 반대로 걸어가는 모습도 멍하니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허즈우는 휘파람을 불며 운동장 옆의 샛골목으로 들어갔다. (본문 중에서)

 

   혁명 간부의 딸 루원리, 모옌만큼이나 입이 큰 류 선생(류 선생에게 두꺼비,라는 별명을 지었다는 누명을 쓰고 모옌은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허풍쟁이 같으면서도 '영웅'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허즈우. 이들이 겪는 삶의 변화와 기막힌 인연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아요. 특히 허즈우가 보여주는 허풍과 익살, 그리고 순정 같은 것들은 유쾌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가즈51이여, 안녕. 사실 그것은 그냥 안녕이 아니라 영원한 안녕이었다. 나는 그 차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의 유골은 지금 어느 곳에 있으려나" (본문 중에서)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소련제 가즈51입니다. 우리의 영웅 허즈우는 가즈51과도 깊은 인연을 맺는데요. 1969년 초등학생이었던 허즈우의 꿈은 단 하나. "루원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처럼 때론 번개처럼" 내달리며 동네 개와 닭들을 거침없이 쳐 죽이는 가즈51을 모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허즈우는 고물차 신세가 된 가즈51을 루원리의 아버지에게서 사들입니다. 그 길로 가즈51을 몰고 달려가 루원리에게 멋진 프로포즈를 해요. 안타깝게도 루원리를 아내로 맞아들이지는 못하지만요.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로맨틱한 프로포즈용으로 사용되었던 가즈51은 뜻깊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모옌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붉은 수수밭》에서 말 그대로 온몸을 불사른 것이죠.

 

     그녀는 처량하게 웃더니 그러더군. '더 이상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입 큰 류 선생님의 결혼 소식을 들었지. 나는 좋은 술 두 병과 담배 두 보루를 챙겨서 혼자 차를 몰고 자오허 농장 앞의 그 공터로 갔어. 거기서 나는 루원리의 아버지에게 그분 딸에 대해 내가 품었던 연모의 마음을 털어놓았지. 그분도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한참 생각에 잠기더라고. 나는 그래도 나라는 놈이 상술에 정통한데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지녔다고 자부하며 살았거든. 근데 사실 소인의 마음으로는 군자의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거야. 내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자부했던 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고. 루원리, 그녀는 군자더라 이 말이야." (본문 중에서)

 

    허즈우와 류 선생, 루원리의 얽히고설킨 기묘한 인연과 삶의 굴곡은 그들이 거쳐온 시대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십 년 전, 혁명 간부의 딸이었던, 숭배의 대상이었던 루원리는 부스스한 머리를 박박 긁어대는 고무공장 공원이 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허즈우는 좋은 기회를 잡아 엄청난 재산가가 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변화의 당사자라면 바로 모옌일 거예요. "어릴 적부터 재수가 없는 인간"이었던, 초등학교를 중퇴한 산골 촌놈이 전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니까요.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속성은 '변화'라는 것. 모두 변화한다는 것. 누구에게는 절망, 또 다른 이에게는 희망이 되어줄 진실이겠죠.

 

     "내게는 다른 꿈이 없다. 오직 한 가지 꿈밖에 없는데 그건 바로 루원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오직 하나의 꿈을 좇았던 허즈우는 불가능해 보였던 꿈을 멋진 방식으로 이루어냅니다. '변화'의 씨앗은 허즈우의 '불가능한 꿈'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간절함이 변화의 첫 걸음이라고요. 그러고 보면 삶은 참 단순합니다. 중국의 역사적 변화와 개인적 기억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 불가능한 꿈을 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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