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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이영훈은 그의 단편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에서 변의(便意)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을 찾아다니는 '나'의 '복통'을 실감나게 그려냅니다. "작은 강아지"에서 "도베르만" "사자" "호랑이" "하마"...에서 "티라노사우루스 급으로" 발전한 복통. 폭발 직전의 배설욕구는 폐쇄된 화장실 앞에서 번번이 꺾이고 마는데요. 절절매는 '나'의 앞에 친절한 경찰관이 등장합니다.
여긴 상점과 통로로 된 미로입니다. 십중팔구는 길을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 그러니,
경찰관이 고갯짓을 했다.
따라오시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이영훈,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 중에서
《모두가 소녀시대를 좋아해》 (이하 '소녀시대')에서 '나'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닫힌 화장실,인데요. 지금 소개하는 작품, 이영훈의 장편인데요,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주인공 영호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의붓아들 샘의 '닫힌' 입(또는 마음)입니다. 서른두 살의 보험회사 직원 영호는 암 수술을 앞두고 있는 채연과 즉흥적인 결혼을 하는데요. 결혼과 동시에 덜컥 아버지가 된 영호가 샘의 마음을 열어나가는 과정이 이야기의 주요한 줄기를 이룹니다.
애니메이션처럼 기술이 집적된 창작물도 아니고, 영화처럼 그저 매끄럽고 화려하지도 않아. 분명히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조금만 집중하면 전부 가짜란 걸 알 수 있지. 특촬물을 좋아하는 건 바로 그 간극을 즐기는 거야. 피딱지를 떼어내는 것처럼 쉴새없이 저 세계가 가짜란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어느 순간 다시 거기에 발을 들이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의 허무감을 값비싼 장난감으로 채우는 거지. 이야기에 질려갈 때쯤에는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고 다시 이전과 같은 행위들이 반복되는 거야. 특촬물을 좋아하는 동안에는 바로 그런 일들을 즐길 수가 있어. (본문 중에서)
'체인지킹'은 샘의 마음을 여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는데요. 그래요. 정체를 밝혀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머나먼 별에서 찾아온 외로운 이방인.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홀로 남게 되는 용사. 숲과 벌판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 팔을 뻗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영웅." 변신왕 체인지킹. 두둥. '체인지킹'은 수준미달의 특촬물입니다. 특촬물은 특수촬영물의 준말인데요. 파워레인저나 울트라맨 같은 걸 떠올려 보면 될 거예요. 파워레인저나 울트라맨에 비할 수가 있나요. 안타깝게도 '체인지킹'은 모든 사람에게서 잊혀진, 아니, 생각조차 민망한 그런 특촬물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데요. 매사에 무관심해 보이는 샘이 유일하게 열중하는 것이 바로 '변신왕 체인지킹'입니다. 영호는 샘과 가까워지기 위해 '체인지킹'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하는데요. 제목부터가 무성의한 이 특촬물에 대한 탐색 과정은 탐정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입니다. 흥미진진하다는 말이지요.
우리에겐 아버지가 없어. 믿고 따를 커다란 이야기가 없어. 맞서 싸울 적도 없고, 체온을 나눌 친구도 없어. 심지어 우리에겐 우리만의 역사도, 이야기도 없어. 이야기들은 모두 박살났고, 쪼개졌고, 찢어졌어. 우리가 가진 건 그저 계속해서 반복되는 작은 이야기들뿐이야. 이젠 그런 것들을 택해 자각 없이 사는 게 편하지. (본문 중에서)
원래는 여기 아무 데서나 똥 싸도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소녀시대》에서 경찰관이 던진 말은 아케이드가 은유하는 문명 생태계에 갇힌 인간의 억압된 본능을 일깨웁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도베르만" "사자" "호랑이" "향유고래"와 "티라노사우루스"를 뱃속에 품고 있는 우리는 무역센터 빌딩 앞 노상에서 엉덩이의 힘을 풀어버리는 '나'를 통해 이상한 해방감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체인지킹의 후예》에서는 라이더레인저'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영훈은 라이더레인저'의 입을 빌려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는' 이 시대의 현실을 아프게 꼬집고 있습니다.
단숨에 운명을 가르거나 싸움을 끝내는 기술 같은 건 없어. 우리는, (...) 우리는 이대로 계속해서 사는 거야. 아프고, 다치고, 피를 잔뜩 흘리며 재미없고, 재미있는 삶을. 그런 일들이 비틀비틀 이어지는 거야. (본문 중에서)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이영훈이 보여주는 "아프고, 다치고, 피를 잔뜩 흘리며, 재미없고, 재미잇는 삶"을 "비틀비틀 이어"가는 '아버지들'과 그 '아들들(역시 아버지가 될)'의 관계, 그 삶의 양태는 조악하고 지루한 모방물인 '변신왕 체인지킹'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샘은 '체인지킹'의 외롭고 긴 싸움을 지켜보며 낯선 세계에서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러요. "이 세계의 압력에, 그 확연한 질감에 맞서 자신의 인력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지요. 그 순간, 불꽃같은 힘이 솟아납니다.
위대한 용사의 혈통, 살아남은 생존자,
불꽃같은 분노로, 악에게 복수하리.
곰, 호랑이, 독수리, 사슴, 동물의 힘은 모두 나의 친구.
아아, 체인지킹, 놀라운 전사. (본문 중에서)
《소녀시대》와 《체인지킹의 후예》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것은 '자각의 순간'입니다. 변신!이라고 외치지 않아도 불꽃같은 힘이 솟아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곰, 호랑이, 독수리, 사슴, 하마, 공룡 등... 두 작품 모두에서 상징적인 동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소녀시대》에서 동물의 은유는 '억압된 본능'인데 반해 《체인지킹의 후예》에서는 '마음속 상처(또는 두려움)'입니다. '억압된 본능'과 '마음속 상처(또는 두려움)', 즉 불편한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의지(義指)이고요. 두 작품 모두에서 가짜손가락'이 등장하는데요. 어? 이 발견의 즐거움이란! "아무도 찾지 않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체인지킹을 발견한 샘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고 싶어지는...뭐 그런.
"심장소리가 들려."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 소리와 다른 심장소리가."
샘이 말했다.
샘을 돌아봤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명의 힘으로."
가만히 있었다.
"용기를 모아."
샘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피식 웃었다. (본문 중에서)
이영훈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장르와 소재를 혼합해 이야기를 빚어내는 능력이 탁월해요.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주제의식 또한 뚜렷하고요. 《체인지킹의 후예》는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품인데요. 샘과 영호, 그리고 그 주변인물들이 저마다의 절망과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아버지가 없고, 우리만의 역사도, 믿고 따를 이야기도 없는 이 시대의 모든 샘들에게 '체인지킹'이 외칩니다. 생명의 힘으로, 용기를 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