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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비를 만났다 - TED 과학자의 800일 추적기 ㅣ 지식여행자 시리즈 2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웨스 크레이븐이 감독한 영화 《악령의 관(The Serpent And The Rainbow, 1988)》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좀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좀비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좀비의 진짜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 의하면 좀비는 부두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사상태를 유발하는 독약과 부두교 주술의 힘으로 노예 상태가 된 사람이 좀비의 실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좀비의 실체를 추적하는 데니스 알란의 실존 인물 웨이드 데이비스Wade Davis는 지금 소개하는 책의 저자입니다. 네, 이 책은 《악령의 관》의 원작입니다.
백인들은 눈이 멀었어. 오로지 좀비만 본다고. 당신도 보다시피 좀비는 사방에 널려 있지. (본문 중에서)
사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목 정도만 알고 있었죠. 제목이 참, B급 공포영화스럽네요. 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관객의 흥미를 우선하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해볼 따름입니다.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실망한 분이 섣불리 책에 대한 편견을 갖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좀비를 다루는 책이 아니에요. 당신이 상상하는 좀비도 끝내 등장하지 않을 거고요. 감당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또 다른 좀비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또 다른 아이티를 보게 될 것이오. 이 나라에는 세 부류가 있소. 부자, 빈자, 자기 자신.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까맣게 잊었소. 우리의 비참한 과거는 기분 나쁜 꿈처럼, 연극의 거추장스러운 막간처럼 철저히 잊혔다오. (본문 중에서)
책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흔히 영화에서 묘사되는 인육을 탐하는 부패한 고깃덩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죽었다 살아난 이들은 어눌하지만 말도 하고 기억도 남아 있는데요.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자신들이 부두교 의식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좀비 독약에 중독돼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 주술의 힘으로 깨어났다는 것인데요. 이들의 주장에 근거해 데이비스는 좀비의 독약을 찾아 아이티로 갑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좀비 독약과 그 해독제는 마취의학에 큰 혁신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데이비스가 좀비 독약 연구를 시작할 당시인 1970년대만 해도 마취는 일종의 '실험'이고 '모험'이었으니까요. 좀비 독약으로 알려진 흰독말풀(다투라 스트라모니움Datura stamonium), 일명 '좀비의 오이'를 찾아 나선 아이티에서 데이비스는 독약보다 더 지독한 아이티의 참혹한 상처와 마주하게 됩니다.
식민 농장 소유주들은 잔인한 제도를 만들었다. (...) 노예 학대가 얼마나 체계적이었는지, '집행자'라는 직업도 생겼고 법으로도 이들의 급료를 정해줄 정도였다. 이를 테면, 산 채로 화형시키는 대가로 이들이 챙긴 수수료는 프랑스 돈으로 60파운드였다. 목을 매달면 30파운드, 인두로 낙인을 찍거나 귀를 베어버리면 5파운드에 불과했다. (본문 중에서)
아이티의 식민지 역사는 길고도 참혹했지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아이티 흑인노예들의 굴욕과 투쟁의 역사가 이 책에는 담겨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아이티인의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지요. 좀비 독약은 바로 그 분노와 슬픔의 역사에서 빚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요. 잔인한 학대를 못 이겨 탈주한 노예들의 공동체, 그 비밀조직의 막강한 권력 안에서 '좀비'는 일종의 형벌이었습니다. 조직의 규칙을 어긴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요. 그 규칙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족과 부양식솔의 생활비 이상으로 과도하게 돈을 벌려는 욕심, 동료에 대한 존경심 부족, 비장고 조직(비밀조직)에 대한 중상모략, 다른 남자의 여인을 탐함, 타인의 행복을 비방하거나 침범하는 부정확한 소문 유포, 타인의 가족원에 대한 상해, 토지와 관련된 문제. 규칙을 어긴 자는 가차없이 좀비 형벌에 처해지는데요. 독약과 주술로 좀비가 된 자. 말을 못하고 자기 이름도 모르며 의지가 없는 육신에 불과한 자의 숙명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긴긴 세월 그토록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육신의 굴레. 아이티인에게 이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없겠지요.
나르시스뿐 아니라 모든 아이티 소작농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좀비에게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끔찍한 운명을 피하고자 죽은 자의 가족들은 뭔가 석연치 않은 낌새가 보이면 마지못해 시체의 사지를 절단해버리기도 한다. (본문 중에서)
묘지에 매장되었다 주술의 힘으로 깨어난 이들, 나르시스Clairvius Narcisse나 티 팜Francina Illeus 같은 좀비들은 일견 무고한 희생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조직의 규칙을 어기고 정당한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나르시스나 티 팜의 가족들마저도 그들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단지 그들이 좀비라서가 아닙니다. 좀비 이전의 그들의 삶은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데이비스는 이들 가족과 마을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거부당한 그들은 이름을 잃고 삶으로부터 추방당합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가 되지 않더라도, 영혼을 잃어버린 좀비에게 삶은 그들 자신의 눈동자와도 같은 흐릿한 공동(空洞)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르시스와 티 팜은 몸소 보여줍니다.
겁에 질린 희생자는 일어서서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자신에게 뼈를 겨누고 있는 마법사를 노려보면서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 오는 죽음의 전령을 물리치려는 듯 두 손을 번쩍 든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눈동자는 빛을 잃고 흐릿해진다. 표정도 점점 끔찍하게 뒤틀리고...... 비명을 질러보려 하지만, 목이 메어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에서는 거품이 부글거리며 흘러나온다. 몸이 떨리기 시작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다 땅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마치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몸부림친다. 잠시 지극히 평온한 상태가 이어지고 나면 희생자는 자기오두막으로 기어간다. 이때부터 희생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초조해하며 먹기를 거부하고 부족의 일상생활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좀비를 만드는 것은 독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아이티에서 만난 막스 보부아르Max Beauvoir와 마르셀 피에르Marcel Pierre 같은 부두교 사제들 역시 좀비를 만드는 것은 보코르bokor, 부두교 사제라고 주장합니다. 독약은 단지 부수적인 것이며, 부두교의 신비한 주술의 힘만이 좀비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부두교 죽음의 희생자들, 즉 아이티 좀비를 연구한 인류학자들은 흥미로운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좀비는 주술의 암시적 힘에 사로잡힌 자포자기 콤플렉스giving up complex 환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치유가 가능한 것처럼 공포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 아이티인에게 부두교는 단순한 종교의 의미를 넘어선, 삶 자체입니다. 신성과 세속, 물질과 정신, 삶과 죽음을 규정하는 윤리이자 철학이며 하나의 제도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티 좀비는 "병원성 질병에 걸리기 쉽게 몸을 허약하게 만드는 믿음의 악순환"에 스스로 갇힌 자라는 것입니다. 좀비가 된 희생자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악한 저주를 받아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고, 그 운명에 굴복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르셀은? 보코르이자 사악한 마법사인가. 아니면 자비로운 사제이자 치유자인 호웅간인가. 마르셀은 물론 두 다였지만, 사람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았다. 보코르로서의 마르셀은 어둠을 섬기지만, 호웅간으로서의 마르셀은 빛의 편에 서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마르셀 역시 어둠과 빛 모두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부두교에서는 이러한 양면성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를 제도화했다. (본문 중에서)
나르시스와 티 팜 같은 아이티 좀비들의 사례를 볼 때, 그들을 좀비로 만든 '사악한 기운'은 주술의 힘이 아니라 본디부터 그들 안에 있던 것이고, 좀비의 주요한 특성이 된 무감각 상태 역시 좀비 이전 그들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궁핍과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탐욕의 노예로 살아온 그들의 무감각한 정신이야말로 좀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좀비는 어둠을 섬기는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는.
인간의 영혼이 혼란스러운 이상, 아이티는 언제나 아이티로 남을 것이오. (본문 중에서)
삼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웨이드 데이비스는 좀비 독약과 좀비 상태에 관한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아이티 부두교의 실체와 그 뿌리가 된 식민지 역사를 매우 심도있게 탐사하는데요. 과학자가 쓴 탐사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매혹적인 문장과 생생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좀비들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공허하게 여겨집니다. 부패한 고깃덩이 같은 몸뚱이를 질질 끌고 다니며 인육을 탐하는 기괴한 육신들은 실제 좀비와는 거리가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책은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긴긴 노예의 역사와, 자기 안의 어둠에 굴복한 진짜 좀비를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