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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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년의 세월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강산이 변해도 열 번은 변했으니까, 백 년이면 사람도 나무나 돌, 강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만큼 시간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 정도의 세월이 아닐까, 상상을 해보는 것이지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 내리면 내리는 대로 태양볕이 따가우면 또 그런 대로 제자리를 지키는 식물들처럼, 백 년의 세월 동안 사람의 몸과 마음도 식물성으로 변화해 가지 않을까. 이제는 백세시대'라 하죠. 실제로 백 살을 훌쩍 넘긴 노인들을 티븨에서 본 적도 있는데요. 먹고 말하고 듣는 데 큰 불편이 없어 보이는 생생한 모습에 놀라기는 했어요. 한데 이상하게도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이어서... 내 상상 속의 백 살 노인이 좀 더 현실적으로 여겨질 정도였죠. 동물적 감각과 욕구가 깨끗이 씻겨나간 식물성 몸과 식물성 마음.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알란 칼손은 행동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2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식물성 몸과 식물성 마음이라니! 아무래도 나만의 은근한 바람에 불과했던 걸까요. 티븨에서 보았던 비현실적인 장수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소개하는 이야기의 주인공 알란 역시 누구보다 생생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입니다. 여전히... 인간적'이라는 말이지요. 약해진 오줌발이 적신 슬리퍼에서는 지린내가 풍기고 그 위로 뻗은 두 다리는 나무토막처럼 무거워 질질 끌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마음만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힘이 넘치는 백 세 노인 알란은 백 회 생일을 맞이한 날 아침, 양로원 창문을 타 넘어 도망칩니다. 어떤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창문 넘어 도망친 것. 그 자체일 뿐'이지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일단 도망치고 본 것입니다. 잠깐 스쳐간 생각을 따라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친 알란의 우연은 다른 우연을 만나 또 다른 우연으로 옮겨가는... 말하자면 긴 우연의 여정이 됩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본문 중에서)

 

 

    우연의 여정. 성마른 아버지와 너무나도 의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란에게 이 우연의 여정'은 숙명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멀리 타국에서 날아온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을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숲에 나무를 베러 나가면서 어머니는 어린 알란에게 말합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세상을 향한 뜨거운 분노와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와 눈앞에 어떤 일이 닥쳐와도 불평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알란의 백 년 동안의 삶은 그야말로 기이하고 놀라운 우연과 모험으로 점철된 한 편의 대서사시죠.

 


    알란은 왜 17세기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려고 그렇게 애
를 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진득하게 기다리면 결국 다 죽게 될 텐데 말이다. (본문 중에서)

 

 

 

    검둥이'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알란의 역사적인 모험이 시작되는데요. 스페인 내전의 한가운데에서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미국 국립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부통령 해리 트루먼과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테헤란의 비밀경찰 감옥에 갇히거나 반동자로 몰려 블라디보스톡에서 노역을 하는가 하면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기도 하고요. 알란이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본의 아니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폭약 기술' 때문입니다. 본의가 아니라는 것'에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본디부터 알란은 정치나 철학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도 무관심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즉흥적인 욕망에 반응하는 자유롭고 가벼운 성품의 소유자인데요. 알란은 열 살의 나이에 폭약 회사에 취직해 폭약 제조 기술자가 됩니다. 정치적 이념도 사물에 대한 의심도 깊지 않은 그에게 폭약 제조 기술은 말 그대로 시한폭탄과도 같은 위험한' 재능인 셈이지만, 어떤 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낙관성이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그를 구해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합니다. 폭약 제조 기술과 그 타고난 낙관주의는 알란의 삶에 크고 작은 불행을 안겨 주었지만, 다른 한편 놀라운 행운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인데요. 삶이란 우리에게 완전한 불행도 완전한 행운도 주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란의 삶이 확인해 줍니다.

 

 

     김정일은 원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마치 교과서를 읽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역할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부친을 보호하는 것,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라도 대답했다.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줬다는 거였다. (본문 중에서)

 

 

    소설은 백 세 노인 알란의 현재(양로원을 탈출한 시점부터 며칠 동안)와 과거(1905년 2월부터 2005년에 이르는 백 년 세월)를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역사책 속에서 튀어나온 실존인물들과 당시의 사건들이 소설적 상상력과 만나 의미 있는 삶의 진실을 들려줍니다. 알란의 양로원 탈출기'는 독립적인 이야기로도 손상이 없겠는데요. 익살스러운 추리물로 읽힐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청중을 휘어잡는 재능이 있으셨다. 코담배 냄새를 물씬 풍기며 지팡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벤치에 앉아 계시던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그분의 손주인 우리가 입을 헤벌리고서 하던 질문도 아직 귀에 생생하다. <할아버지...... 그게...... 진짜 정말이에요......? >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 라고 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책의 서문)

 

 

    알란의 백 년 세월에 담긴 크고 작은 일화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허무맹랑해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알란의 삶에서 의미있게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삶의 보편적 진실성에 있습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순수한 욕망에 귀기울이고 그에 전생애로 답하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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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퐁스의 사랑 여행
시빌린 지음, 맹슬기 옮김, 제롬 다비오 그림, 카푸친 캘리그래피 / 이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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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작은 아이가 숲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찌'는 아이에게 '알퐁스'라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아찌는 숲에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고 자취를 감춥니다. 혼자가 된 알퐁스는 나비와 메뚜기를 쫓아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내는데요. 그것도 잠시, 알퐁스는 문득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외로움을 느낀 알퐁스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존재 아찌를 찾아 떠나는데요. 그 여정에서 알퐁스는 다양한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네 그림자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정말 네가 해야 할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 (본문 중에서)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사랑을 찾는 알퐁스의 여정을 담고 있는데요. 단순하지만 뜻깊은 상징과 비유가 이야기 곳곳에 잘 녹아있습니다. 신(神)의 상징으로 읽히는 '아찌', '두렴이'와 '상실이', '찔찔이' 등 삶의 속성을 암시하는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알퐁스는 중요한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데요. 특히 알퐁스의 두 연인, 바라바라와 러블리는 알퐁스의 삶에 큰 전환점으로 작용합니다.

 

 

   알퐁스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두려움이 더 커진다는 걸. 두려워하면 두려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퐁스는 비명을 멈추고 달리기도 멈췄습니다. 알퐁스는 눈을 크게 뜨고 두렴이를 바라봤습니다. (본문 중에서)

 

 

    알퐁스의 첫 번째 사랑 바라바라는 알퐁스보다 크고 힘이 센 승부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모든 일에 불평을 늘어놓는 바라바라는 알퐁스를 지치게 합니다. 바라바라의 탐욕은 하늘을 찌르고 마침내 그 자신이 쌓은 탐욕의 쓰레기에 깔려 죽어요. 바라바라를 잃은 상실감과 두려움을 극복한 알퐁스가 두 번째로 만난 사랑은 알퐁스처럼 아주 작은 아이, 러블리였는데요. 알퐁스와 러블리는 서로가 기다려온 '단짝'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함께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어요. 알퐁스와 러블리는 점점 지루해지기 시작했어요. 두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했던 바로 그 점이 싸움거리가 됩니다. 사소한 싸움과 실망감이 두 사람을 지치게 했고 정해진 결말처럼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누구나 상대가 자기와 똑같아지기를 바라지만, 자기가 상대와 똑같아지는 건 참지 못하지. 하지만 둘이 하나가 되어도 둘은 여전히 둘일 뿐이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건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야. (본문 중에서)

 

 

   사랑을 해도 세상은 핑크빛으로 물들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여전히 그 세상이고, 너는 그대로 너, 나는 그대로의 나일 뿐입니다.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야 할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바라바라와 러블리가 보여주는 사랑의 태도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전혀 낯설지 않은 그들의 사랑 방식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정작 변해야 할 것은 세상도 당신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오지요.

 

       나는 누구죠?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죠? (본문 중에서)

 

    이 책은 만화책입니다. 세밀화와 단순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섬세하게 표현된 배경과 대조적으로 졸라맨을 연상시키는 알퐁스의 동작 표현은 쓱쓱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처럼 보이는데요. 그 단순한 얼굴(동그라미)과 선으로 이루어진 모양이 무색하게 매우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보여준다는 점이 놀랍고 재미있습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 그려본 적 있을 그 모습에 친근감도 느껴지고요.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그림이 마음을 끌어당깁니다.


    꼬마야, 배추를 좋아하는 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야. 배추를 좋아하는 건 네 배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네 가슴이란다. 넌 네 배를 채워주는 배추가 아니라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사랑을 찾아야 해. (본문 중에서)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 같았던 러블리와 알퐁스는 어쩌다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나. 사랑을 하면서도 왜 마슴속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일렁이는 것일까. 알퐁스의 말처럼 사랑은 너무 어렵습니다. "이 세상만큼 큰 퍼즐을 맞추는" 것보다도 더 어려워요. 이토록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무지'라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 줍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 자기 본질과 욕망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기란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알퐁스의 '자아 찾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가슴 설레는 여행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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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하우스
캐슬린 그리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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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한 장점을 집어내기 어렵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이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작품 《키친하우스》는 그런 범주에 넣을 수 있겠는데요. 흔한 소재에 문장도 구조도 평이하다 할 수 있는데, 몰입도가 높고 잔잔한 울림이 있습니다.  

 

 

    파파가 닭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닭들을 봐. 어떤 닭들은 갈색이고 어떤 닭들은 하얀색이고 또 검은색도 있어. 저 닭들이 병아리였을 때 어미 닭과 아빠 닭이 그런 걸 신경 썼을 것 같니?" (본문 중에서)

 

 

    18세기 말 버지니아의 담배농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물론 인종차별 문제를 그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화자 역시 흑인과 백인이고요. 이례적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자 화자인 두 여성의 신분 정도겠네요. 부모를 잃고 노예로 팔려온 아일랜드계 백인 여성 라비니아와 농장주의 사생아 흑인 여성 벨. 두 여성의 복잡한 신분은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백인과 흑인, 주인과 노예라는 신분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가능케 하는 것이지요.

 

 

   세월이, 이번 생이 쉽지가 않아요, 마님. (본문 중에서)

 

 

    제목이 된 '키친하우스(부엌)'는 '빅하우스(대저택)'와 대립되는 흑인의 분리된 거주 공간을 상징합니다. 소설의 주요한 무대이기도 한데요. 백인과 흑인, 주인과 노예의 신분을 초월한 인간적인 공간의 상징으로도 읽힙니다. 라비니아와 벨이 흑인들과 특별한 유대감을 쌓아가는 곳이기도 한데요.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흑인 노예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어떤 저항의 몸짓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주인(백인)의 도구라는 것을 인정하고 묵묵히 그 역할을 해내요.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순한 소처럼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 그들이 고단한 생의 무게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짓밟고 더럽혔지만, 그들 안에 빛나는 무색의 사랑만큼은 훼손하지 못했거든요.

 

 

     마님이 내 목소리를 듣고 놀란 새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부서진 담장 사이로 흔들면서 다시 불렀다. 마님이 하얀 천 조각을 보고 벌떡 일어서자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님은 꿈을 꾸는 것처럼 한 발 한 발 미끄러지듯 내 쪽으로 걸어왔다. (본문 중에서)

 

 

     소처럼 백인(주인)에게 고삐를 매인 것 같아도 자신을 둘러싼 비극에서 자유로운 흑인 노예의 삶에 비해, 오만하고 허영에 찬 백인들의 삶은 부자유하고 불행합니다. 흑인과 백인, 주인과 노예라는 제도적 편견은 역설적이게도 흑인보다는 백인의 삶을 옭아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빅하우스를 잿더미로 만든 파국의 장본인은 백인들 자신 안에서 피어오른 광기의 불꽃. 마셜, 랭킨, 워터스 같은 인물들의 흑인에 대한 억압과 멸시는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까맣게 태워버린 것이지요. 어려서부터 흑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주입받은 마셜의 경우는 진짜 노예 근성이 무엇인지 잘 말해줍니다. 마셜이야말로 인종차별과 노예제도의 진정한 희생자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잿더미가 된 빅하우스는 바로 그러한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인종차별과 노예제, 이 비인간적인 제도로부터 상처받은 자들이 흑인만은 아니었다는 중요한 진실을 들려주는 것이죠.

 

 

 

    음악이 멈췄지만 벨은 멈추질 못하고 계속 돌고 또 돌았다. 보다 못한 이다가 벨에게 와서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키 큰 이다의 마른 가슴에 얼굴을 묻는 벨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다가 등을 들썩이는 벨의 귀에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 사람은 쓰러졌어. 쓰러졌다니까. 이제 널 어쩌지 못해." (본문 중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복잡한 갈등 구조로 얽혀 있는데요. 캐슬린 그리섬은 이 복잡한 줄거리를 단순한 방식을 차용해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두 명의 화자, 라비니아와 벨의 교차하는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인데요. 하나의 사건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두 여성의 심리가 묘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상당한 충격과 비극을 안고 있는 스토리지만 축축 늘어지는 느낌이 없고 경쾌한 리듬을 유지하고 있고요.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가독성이 높습니다. 쓰고 보니, 누구라도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네요. 그래도, 뭐랄까... 이거다, 하고 내세울 만한 특별함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캐슬린은 이 소설을 쓰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버지니아에 있는 옛 농장의 술집을 개조하면서 그곳의 내력을 조사하게 되었고 오래된 지도 하나를 발견했다, 그 지도에 흑인 언덕(Negro Hill)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처럼 선명한 장면들이 마음속에 펼쳐졌다고. 그러니까 '그들'이 찾아온 것이지요. 이백 년 전, 그 오래된 과거의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캐슬린은 고백합니다. 멋져보이려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 소설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출한 문장이나 섬세한 묘사 없이도 인물 하나 하나가 이야기 안에 잘 살아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야말로 이 책의 특별한 매력, 아니, 마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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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비를 만났다 - TED 과학자의 800일 추적기 지식여행자 시리즈 2
웨이드 데이비스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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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 크레이븐이 감독한 영화 《악령의 관(The Serpent And The Rainbow, 1988)》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좀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좀비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좀비의 진짜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에 의하면 좀비는 부두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가사상태를 유발하는 독약과 부두교 주술의 힘으로 노예 상태가 된 사람이 좀비의 실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좀비의 실체를 추적하는 데니스 알란의 실존 인물 웨이드 데이비스Wade Davis는 지금 소개하는 책의 저자입니다. 네, 이 책은 《악령의 관》의 원작입니다.


     백인들은 눈이 멀었어. 오로지 좀비만 본다고. 당신도 보다시피 좀비는 사방에 널려 있지. (본문 중에서)

 


    사실, 영화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목 정도만 알고 있었죠. 제목이 참, B급 공포영화스럽네요. 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관객의 흥미를 우선하지 않았을까 그런 추측을 해볼 따름입니다. 굳이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은, 영화를 보고 실망한 분이 섣불리 책에 대한 편견을 갖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좀비를 다루는 책이 아니에요. 당신이 상상하는 좀비도 끝내 등장하지 않을 거고요. 감당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또 다른 좀비를 이 책에서 만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또 다른 아이티를 보게 될 것이오. 이 나라에는 세 부류가 있소. 부자, 빈자, 자기 자신. 우리는 눈물을 흘리는 방법을 까맣게 잊었소. 우리의 비참한 과거는 기분 나쁜 꿈처럼, 연극의 거추장스러운 막간처럼 철저히 잊혔다오. (본문 중에서)

 

 

    책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흔히 영화에서 묘사되는 인육을 탐하는 부패한 고깃덩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죽었다 살아난 이들은 어눌하지만 말도 하고 기억도 남아 있는데요. 그들의 일관된 주장은 자신들이 부두교 의식의 희생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좀비 독약에 중독돼 가사상태에 빠져 있다 주술의 힘으로 깨어났다는 것인데요. 이들의 주장에 근거해 데이비스는 좀비의 독약을 찾아 아이티로 갑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좀비 독약과 그 해독제는 마취의학에 큰 혁신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지요. 데이비스가 좀비 독약 연구를 시작할 당시인 1970년대만 해도 마취는 일종의 '실험'이고 '모험'이었으니까요. 좀비 독약으로 알려진 흰독말풀(다투라 스트라모니움Datura stamonium), 일명 '좀비의 오이'를 찾아 나선 아이티에서 데이비스는 독약보다 더 지독한 아이티의 참혹한 상처와 마주하게 됩니다.

 

    식민 농장 소유주들은 잔인한 제도를 만들었다. (...) 노예 학대가 얼마나 체계적이었는지, '집행자'라는 직업도 생겼고 법으로도 이들의 급료를 정해줄 정도였다. 이를 테면, 산 채로 화형시키는 대가로 이들이 챙긴 수수료는 프랑스 돈으로 60파운드였다. 목을 매달면 30파운드, 인두로 낙인을 찍거나 귀를 베어버리면 5파운드에 불과했다. (본문 중에서)

 


    아이티의 식민지 역사는 길고도 참혹했지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아이티 흑인노예들의 굴욕과 투쟁의 역사가 이 책에는 담겨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어서 아이티인의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지요. 좀비 독약은 바로 그 분노와 슬픔의 역사에서 빚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요. 잔인한 학대를 못 이겨 탈주한 노예들의 공동체, 그 비밀조직의 막강한 권력 안에서 '좀비'는 일종의 형벌이었습니다. 조직의 규칙을 어긴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요. 그 규칙들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족과 부양식솔의 생활비 이상으로 과도하게 돈을 벌려는 욕심, 동료에 대한 존경심 부족, 비장고 조직(비밀조직)에 대한 중상모략, 다른 남자의 여인을 탐함, 타인의 행복을 비방하거나 침범하는 부정확한 소문 유포, 타인의 가족원에 대한 상해, 토지와 관련된 문제. 규칙을 어긴 자는 가차없이 좀비 형벌에 처해지는데요. 독약과 주술로 좀비가 된 자. 말을 못하고 자기 이름도 모르며 의지가 없는 육신에 불과한 자의 숙명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긴긴 세월 그토록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육신의 굴레. 아이티인에게 이보다 더 가혹한 형벌은 없겠지요.


    나르시스뿐 아니라 모든 아이티 소작농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좀비에게 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끔찍한 운명을 피하고자 죽은 자의 가족들은 뭔가 석연치 않은 낌새가 보이면 마지못해 시체의 사지를 절단해버리기도 한다. (본문 중에서)

 


    묘지에 매장되었다 주술의 힘으로 깨어난 이들, 나르시스Clairvius Narcisse나 티 팜Francina Illeus 같은 좀비들은 일견 무고한 희생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조직의 규칙을 어기고 정당한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나르시스나 티 팜의 가족들마저도 그들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단지 그들이 좀비라서가 아닙니다. 좀비 이전의 그들의 삶은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데이비스는 이들 가족과 마을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지요. 가족과 지인들로부터 거부당한 그들은 이름을 잃고 삶으로부터 추방당합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가 되지 않더라도, 영혼을 잃어버린 좀비에게 삶은 그들 자신의 눈동자와도 같은 흐릿한 공동(空洞)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르시스와 티 팜은 몸소 보여줍니다.


     겁에 질린 희생자는 일어서서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자신에게 뼈를 겨누고 있는 마법사를 노려보면서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 오는 죽음의 전령을 물리치려는 듯 두 손을 번쩍 든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눈동자는 빛을 잃고 흐릿해진다. 표정도 점점 끔찍하게 뒤틀리고...... 비명을 질러보려 하지만, 목이 메어 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에서는 거품이 부글거리며 흘러나온다. 몸이 떨리기 시작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다 땅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마치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몸부림친다. 잠시 지극히 평온한 상태가 이어지고 나면 희생자는 자기오두막으로 기어간다. 이때부터 희생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초조해하며 먹기를 거부하고 부족의 일상생활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좀비를 만드는 것은 독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아이티에서 만난 막스 보부아르Max Beauvoir와 마르셀 피에르Marcel Pierre 같은 부두교 사제들 역시 좀비를 만드는 것은 보코르bokor, 부두교 사제라고 주장합니다. 독약은 단지 부수적인 것이며, 부두교의 신비한 주술의 힘만이 좀비를 만든다는 것이지요. 부두교 죽음의 희생자들, 즉 아이티 좀비를 연구한 인류학자들은 흥미로운 의견을 내놓기도 했는데요. 좀비는 주술의 암시적 힘에 사로잡힌 자포자기 콤플렉스giving up complex 환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치유가 가능한 것처럼 공포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인데요. 아이티인에게 부두교는 단순한 종교의 의미를 넘어선, 삶 자체입니다. 신성과 세속, 물질과 정신, 삶과 죽음을 규정하는 윤리이자 철학이며 하나의 제도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티 좀비는 "병원성 질병에 걸리기 쉽게 몸을 허약하게 만드는 믿음의 악순환"에 스스로 갇힌 자라는 것입니다. 좀비가 된 희생자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악한 저주를 받아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고, 그 운명에 굴복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르셀은? 보코르이자 사악한 마법사인가. 아니면 자비로운 사제이자 치유자인 호웅간인가. 마르셀은 물론 두 다였지만, 사람 자체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았다. 보코르로서의 마르셀은 어둠을 섬기지만, 호웅간으로서의 마르셀은 빛의 편에 서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마르셀 역시 어둠과 빛 모두를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부두교에서는 이러한 양면성을 명백히 인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를 제도화했다. (본문 중에서)

 

 

   나르시스와 티 팜 같은 아이티 좀비들의 사례를 볼 때, 그들을 좀비로 만든 '사악한 기운'은 주술의 힘이 아니라 본디부터 그들 안에 있던 것이고, 좀비의 주요한 특성이 된 무감각 상태 역시 좀비 이전 그들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궁핍과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탐욕의 노예로 살아온 그들의 무감각한 정신이야말로 좀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좀비는 어둠을 섬기는 자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는.

 

      인간의 영혼이 혼란스러운 이상, 아이티는 언제나 아이티로 남을 것이오. (본문 중에서)

 

 

    삼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웨이드 데이비스는 좀비 독약과 좀비 상태에 관한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는 한편, 아이티 부두교의 실체와 그 뿌리가 된 식민지 역사를 매우 심도있게 탐사하는데요. 과학자가 쓴 탐사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매혹적인 문장과 생생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이 책을 읽고 보니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좀비들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공허하게 여겨집니다. 부패한 고깃덩이 같은 몸뚱이를 질질 끌고 다니며 인육을 탐하는 기괴한 육신들은 실제 좀비와는 거리가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책은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긴긴 노예의 역사와, 자기 안의 어둠에 굴복한 진짜 좀비를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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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대왕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여름입니다. 한낮의 폭염과 긴긴 열대야...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오는데요. 가슴을 뻥 뚫어줄 무언가 절실해지는 때입니다. 차고 맑은 계곡물, 얼음, 캔맥주, 냉면, 수박, 쭈쭈바...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는 사람은, 잘 만들어진 스릴러물 한두 편 정도 찾아 읽는 것도 무더위를 날리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여름, 하면 스릴러를 빼놓을 수 없죠. 한데, 요즘 나오는 스릴러물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기는커녕 영 께름해지기 일쑤. 지나치게 자극만 추구한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좋은 스릴러물도 물론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고요. 나이를 먹었나... 잔혹하고 써늘한, 소위 말해 심장이 쫄깃해지는... 그런 본격 스릴러도 슬슬 불편해지고요. 요즘 같아서는 초딩 때 심취했던 삼류 공포소설 같은 것이 오히려 더 그립습니다. '묘지기의 한' 같은... 표제부터 쌈박한 ^ * ^

 

     각설하고,

 

    책 소개를 할게요. 지금 소개하는 책은 독일 작가 호어스트 에버스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호어스트 에버스가 누구냐.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의 저자더군요. 읽었냐구요? 물론... 안 읽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읽지도 않은 책인데 마치 다 읽은 것 같은...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가는 그런 책이 드물게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제목만 알고 있는 책이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미 읽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바로 그런 책이었거든요. 표제가... 참 좋았습니다. 이제 와서 책 정보 검색을 해 봤는데요. '재기발랄한 논리', '시니컬하고 엉뚱한 베를린식 유머' 같은 문구만 보고도, 아, 호어스트 에버스야! 그랬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 <<베를린 대왕>>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실 텐데요. 베를린을 습격한 쥐떼들의 정체를 추적하는 이 소설은 추리물의 탈을 쓴 코믹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 쥐약이 싫으시면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퇴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건 좋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거죠? 쥐는 확실히 퇴치되나요?"

   "장담합니다. 좀 비싸지만 좋습니다."

   "아휴, 여기서 뛰노는 많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건물 주인이 틀림없이 비용을 낼 거예요. 그런데 친환경적인 퇴치법이라는 게 어떤 거죠?"

    토니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뱀을 이용하는 겁니다."

   "네?"

   "뱀요. 뒷마당에 열다섯 마리에서 많게는 스무 마리까지 풀어놓는 겁니다. 그러면 뱀들이 쥐를 잡아먹을 테니 좋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 다음에 뱀은 어떻게 되나요?"

   "악어요. 뱀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친환경적인 방법은 악어입니다. 하지만 악어를 풀어놓으려면 우선 여기다 늪을 설치해야 합니다. 아마 돈이 많이 들어갈 겁니다. 건물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들아봐야 됩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본문 중에서)

 

 

      지방도시 출신의 라너 경감이 갓 부임한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맡은 두 건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시종 '시니컬하고 엉뚱한 베를린식 유머'를 구사하는데요. 빵빵 터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뭐랄까, 심장을 슬금슬금 간지럽히는 그런 맛이 있습니다. 짐짓 진지한 얼굴로 천연스레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호어스트 에버스의 말발, 책날개에 박힌 그의 얼굴에도 딱 '능청꾸러기'라고 씌여 있으니 말 다 했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추리물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택가 뒤뜰에서 발견된 사체와 해충방제회사 사장의 죽음... 두 사건을 밝혀나가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거릴 정도는 아니라도 읽는 이의 궁금증을 충분히 유발합니다. 본격 추리물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급실망하겠지만요. 그렇지만 이 소설에는 본격 추리물 못지않은 매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간단하게 그 매력을 살펴봅니다.

 

 

 

    새로운 동료들은 그를 어디 한 군데 모자란 사람 취급했다. 그들은 신참 골려 먹기 목록에 있는 모든 방법을 써먹고 나서도 라너가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수법을 계속 개발해 이틀에 한 번꼴로 엿을 먹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촌닭처럼 농담 삼아 자신을 시골 보안관이라고 소개한 이후, 그가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동료들은 시골 보안관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등 뒤에서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렸다. 라너가 "베를린아, 각오해라! 이 시골 보안관이 나가신다!"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을 혼자 상상하며, 나름대로 웃기다고 생각해서 지어낸 거지 같은 별명이었다. (본문 중에서)

 

 

 

    추리물이라면 으레 등장하는 악당, 그러니까 '나쁜놈'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나쁜놈'보다는 그냥 '인간', '쥐새끼 같더라도' '인간적인' 인물들의 성격이 잘 살아있습니다. 주인공 라너와 그 주변인물들, 얼떨결에 사체를 은닉했던 남자들, 골때리는 쥐잡이들... 호어스트 에버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느긋한 코미디언'이라는 언론의 평가가 허언은 아님을 확인합니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쉽게 잊히지 않는 특성이 있고, 나쁜 놈처럼 보이는 인물에게도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몇만 마리일지 모르는 배고픈 쥐. (...) 그 사태는 쥐들에게도 낯설고 스트레스 가득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했다. 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왜 왔는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바로 쥐를 퇴치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일단 도와야 했다. 바로 그것이 비법이었다. 그러므로 우선 인간과 쥐를 진정시켜야 했다. (본문 중에서)

 

 

      '쥐떼들의 습격'이라는 소재도 엉뚱하면서도 흥미로운데요. 이 소설에서 '쥐'는 일반적인 동물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라너가 맡은 두 건의 사건은 베를린의 실상을 드러내는 물꼬가 됩니다. 베를린을 쥐락펴락하는 해충방제회사와 고급관료들의 은밀한 관계가 밝혀지는 것이죠. 쥐의 번식과 습격을 지시하는 베를린의 검은 권력. 그 권력의 영향권 안에 있는 베를린 고위층들... '쥐'는 바로 그들에 대한 비유로도 읽힙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 모든 검은 권력... 쥐들만큼이나 번식력 강한 인간의 지배욕과 그를 이용하는 '쥐새끼' 같은 권력층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수십만 마리의 쥐떼들과 대립하는 베를린 시민의 공포가 남일 같지만은 않습니다.

 

 

   스릴러에 대한 취향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눈물 콧물 핏물 정도는 빼줘야 한다는 분들도 있겠죠. 그런 분들은 아마 이 책을 넘기면서 하품을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읽지 마세요. 본격 스릴러의 강렬한 자극에 심장이 얼얼해진 분들... 뭔가 색다른 자극을 원하신다면 이 책이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방바닥에 엎뎌 쭈쭈바 하나 입에 물고... 호어스트 에버스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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