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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ㅣ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백 년의 세월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강산이 변해도 열 번은 변했으니까, 백 년이면 사람도 나무나 돌, 강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만큼 시간 앞에서 초연해질 수 있는 정도의 세월이 아닐까, 상상을 해보는 것이지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 내리면 내리는 대로 태양볕이 따가우면 또 그런 대로 제자리를 지키는 식물들처럼, 백 년의 세월 동안 사람의 몸과 마음도 식물성으로 변화해 가지 않을까. 이제는 백세시대'라 하죠. 실제로 백 살을 훌쩍 넘긴 노인들을 티븨에서 본 적도 있는데요. 먹고 말하고 듣는 데 큰 불편이 없어 보이는 생생한 모습에 놀라기는 했어요. 한데 이상하게도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이어서... 내 상상 속의 백 살 노인이 좀 더 현실적으로 여겨질 정도였죠. 동물적 감각과 욕구가 깨끗이 씻겨나간 식물성 몸과 식물성 마음.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알란 칼손은 행동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2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식물성 몸과 식물성 마음이라니! 아무래도 나만의 은근한 바람에 불과했던 걸까요. 티븨에서 보았던 비현실적인 장수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소개하는 이야기의 주인공 알란 역시 누구보다 생생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입니다. 여전히... 인간적'이라는 말이지요. 약해진 오줌발이 적신 슬리퍼에서는 지린내가 풍기고 그 위로 뻗은 두 다리는 나무토막처럼 무거워 질질 끌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마음만은 유연하고 자유로운 힘이 넘치는 백 세 노인 알란은 백 회 생일을 맞이한 날 아침, 양로원 창문을 타 넘어 도망칩니다. 어떤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창문 넘어 도망친 것. 그 자체일 뿐'이지요.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일단 도망치고 본 것입니다. 잠깐 스쳐간 생각을 따라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친 알란의 우연은 다른 우연을 만나 또 다른 우연으로 옮겨가는... 말하자면 긴 우연의 여정이 됩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본문 중에서)
우연의 여정. 성마른 아버지와 너무나도 의연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알란에게 이 우연의 여정'은 숙명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멀리 타국에서 날아온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을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숲에 나무를 베러 나가면서 어머니는 어린 알란에게 말합니다. "세상 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세상을 향한 뜨거운 분노와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아버지와 눈앞에 어떤 일이 닥쳐와도 불평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알란의 백 년 동안의 삶은 그야말로 기이하고 놀라운 우연과 모험으로 점철된 한 편의 대서사시죠.
알란은 왜 17세기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진득하게 기다리면 결국 다 죽게 될 텐데 말이다. (본문 중에서)
검둥이'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알란의 역사적인 모험이 시작되는데요. 스페인 내전의 한가운데에서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고 미국 국립연구소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부통령 해리 트루먼과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테헤란의 비밀경찰 감옥에 갇히거나 반동자로 몰려 블라디보스톡에서 노역을 하는가 하면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기도 하고요. 알란이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본의 아니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폭약 기술' 때문입니다. 본의가 아니라는 것'에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본디부터 알란은 정치나 철학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도 무관심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즉흥적인 욕망에 반응하는 자유롭고 가벼운 성품의 소유자인데요. 알란은 열 살의 나이에 폭약 회사에 취직해 폭약 제조 기술자가 됩니다. 정치적 이념도 사물에 대한 의심도 깊지 않은 그에게 폭약 제조 기술은 말 그대로 시한폭탄과도 같은 위험한' 재능인 셈이지만, 어떤 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낙관성이 수많은 위험으로부터 그를 구해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합니다. 폭약 제조 기술과 그 타고난 낙관주의는 알란의 삶에 크고 작은 불행을 안겨 주었지만, 다른 한편 놀라운 행운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인데요. 삶이란 우리에게 완전한 불행도 완전한 행운도 주지 않는다는 진실을 알란의 삶이 확인해 줍니다.
김정일은 원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마치 교과서를 읽는 듯한 어조로 자신의 역할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부친을 보호하는 것, 다시 말해 그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라도 대답했다.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가르쳐 줬다는 거였다. (본문 중에서)
소설은 백 세 노인 알란의 현재(양로원을 탈출한 시점부터 며칠 동안)와 과거(1905년 2월부터 2005년에 이르는 백 년 세월)를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역사책 속에서 튀어나온 실존인물들과 당시의 사건들이 소설적 상상력과 만나 의미 있는 삶의 진실을 들려줍니다. 알란의 양로원 탈출기'는 독립적인 이야기로도 손상이 없겠는데요. 익살스러운 추리물로 읽힐 만큼 흥미진진합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청중을 휘어잡는 재능이 있으셨다. 코담배 냄새를 물씬 풍기며 지팡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벤치에 앉아 계시던 그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그분의 손주인 우리가 입을 헤벌리고서 하던 질문도 아직 귀에 생생하다. <할아버지...... 그게...... 진짜 정말이에요......? > <진실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 라고 할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책의 서문)
알란의 백 년 세월에 담긴 크고 작은 일화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허무맹랑해 보일 수도 있겠는데요. 알란의 삶에서 의미있게 들여다 보아야 할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삶의 보편적 진실성에 있습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순수한 욕망에 귀기울이고 그에 전생애로 답하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