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대왕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여름입니다. 한낮의 폭염과 긴긴 열대야...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혀오는데요. 가슴을 뻥 뚫어줄 무언가 절실해지는 때입니다. 차고 맑은 계곡물, 얼음, 캔맥주, 냉면, 수박, 쭈쭈바... 그래도 뭔가 허전하다는 사람은, 잘 만들어진 스릴러물 한두 편 정도 찾아 읽는 것도 무더위를 날리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여름, 하면 스릴러를 빼놓을 수 없죠. 한데, 요즘 나오는 스릴러물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기는커녕 영 께름해지기 일쑤. 지나치게 자극만 추구한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좋은 스릴러물도 물론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이고요. 나이를 먹었나... 잔혹하고 써늘한, 소위 말해 심장이 쫄깃해지는... 그런 본격 스릴러도 슬슬 불편해지고요. 요즘 같아서는 초딩 때 심취했던 삼류 공포소설 같은 것이 오히려 더 그립습니다. '묘지기의 한' 같은... 표제부터 쌈박한 ^ * ^

 

     각설하고,

 

    책 소개를 할게요. 지금 소개하는 책은 독일 작가 호어스트 에버스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호어스트 에버스가 누구냐.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의 저자더군요. 읽었냐구요? 물론... 안 읽었습니다. 참 이상하죠. 읽지도 않은 책인데 마치 다 읽은 것 같은...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가는 그런 책이 드물게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제목만 알고 있는 책이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이미 읽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바로 그런 책이었거든요. 표제가... 참 좋았습니다. 이제 와서 책 정보 검색을 해 봤는데요. '재기발랄한 논리', '시니컬하고 엉뚱한 베를린식 유머' 같은 문구만 보고도, 아, 호어스트 에버스야! 그랬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 <<베를린 대왕>>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실 텐데요. 베를린을 습격한 쥐떼들의 정체를 추적하는 이 소설은 추리물의 탈을 쓴 코믹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 쥐약이 싫으시면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퇴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건 좋습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거죠? 쥐는 확실히 퇴치되나요?"

   "장담합니다. 좀 비싸지만 좋습니다."

   "아휴, 여기서 뛰노는 많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건물 주인이 틀림없이 비용을 낼 거예요. 그런데 친환경적인 퇴치법이라는 게 어떤 거죠?"

    토니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뱀을 이용하는 겁니다."

   "네?"

   "뱀요. 뒷마당에 열다섯 마리에서 많게는 스무 마리까지 풀어놓는 겁니다. 그러면 뱀들이 쥐를 잡아먹을 테니 좋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그 다음에 뱀은 어떻게 되나요?"

   "악어요. 뱀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친환경적인 방법은 악어입니다. 하지만 악어를 풀어놓으려면 우선 여기다 늪을 설치해야 합니다. 아마 돈이 많이 들어갈 겁니다. 건물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들아봐야 됩니다.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본문 중에서)

 

 

      지방도시 출신의 라너 경감이 갓 부임한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맡은 두 건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시종 '시니컬하고 엉뚱한 베를린식 유머'를 구사하는데요. 빵빵 터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뭐랄까, 심장을 슬금슬금 간지럽히는 그런 맛이 있습니다. 짐짓 진지한 얼굴로 천연스레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호어스트 에버스의 말발, 책날개에 박힌 그의 얼굴에도 딱 '능청꾸러기'라고 씌여 있으니 말 다 했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추리물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택가 뒤뜰에서 발견된 사체와 해충방제회사 사장의 죽음... 두 사건을 밝혀나가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거릴 정도는 아니라도 읽는 이의 궁금증을 충분히 유발합니다. 본격 추리물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급실망하겠지만요. 그렇지만 이 소설에는 본격 추리물 못지않은 매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간단하게 그 매력을 살펴봅니다.

 

 

 

    새로운 동료들은 그를 어디 한 군데 모자란 사람 취급했다. 그들은 신참 골려 먹기 목록에 있는 모든 방법을 써먹고 나서도 라너가 이제는 더 이상 방법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수법을 계속 개발해 이틀에 한 번꼴로 엿을 먹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촌닭처럼 농담 삼아 자신을 시골 보안관이라고 소개한 이후, 그가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할라치면 동료들은 시골 보안관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등 뒤에서 자기네들끼리 속닥거렸다. 라너가 "베를린아, 각오해라! 이 시골 보안관이 나가신다!"라고 큰소리치는 장면을 혼자 상상하며, 나름대로 웃기다고 생각해서 지어낸 거지 같은 별명이었다. (본문 중에서)

 

 

 

    추리물이라면 으레 등장하는 악당, 그러니까 '나쁜놈' 캐릭터가 이 소설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나쁜놈'보다는 그냥 '인간', '쥐새끼 같더라도' '인간적인' 인물들의 성격이 잘 살아있습니다. 주인공 라너와 그 주변인물들, 얼떨결에 사체를 은닉했던 남자들, 골때리는 쥐잡이들... 호어스트 에버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느긋한 코미디언'이라는 언론의 평가가 허언은 아님을 확인합니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쉽게 잊히지 않는 특성이 있고, 나쁜 놈처럼 보이는 인물에게도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몇만 마리일지 모르는 배고픈 쥐. (...) 그 사태는 쥐들에게도 낯설고 스트레스 가득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했다. 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왜 왔는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바로 쥐를 퇴치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일단 도와야 했다. 바로 그것이 비법이었다. 그러므로 우선 인간과 쥐를 진정시켜야 했다. (본문 중에서)

 

 

      '쥐떼들의 습격'이라는 소재도 엉뚱하면서도 흥미로운데요. 이 소설에서 '쥐'는 일반적인 동물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라너가 맡은 두 건의 사건은 베를린의 실상을 드러내는 물꼬가 됩니다. 베를린을 쥐락펴락하는 해충방제회사와 고급관료들의 은밀한 관계가 밝혀지는 것이죠. 쥐의 번식과 습격을 지시하는 베를린의 검은 권력. 그 권력의 영향권 안에 있는 베를린 고위층들... '쥐'는 바로 그들에 대한 비유로도 읽힙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 모든 검은 권력... 쥐들만큼이나 번식력 강한 인간의 지배욕과 그를 이용하는 '쥐새끼' 같은 권력층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수십만 마리의 쥐떼들과 대립하는 베를린 시민의 공포가 남일 같지만은 않습니다.

 

 

   스릴러에 대한 취향은 제각각일 것입니다. 눈물 콧물 핏물 정도는 빼줘야 한다는 분들도 있겠죠. 그런 분들은 아마 이 책을 넘기면서 하품을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읽지 마세요. 본격 스릴러의 강렬한 자극에 심장이 얼얼해진 분들... 뭔가 색다른 자극을 원하신다면 이 책이 그리 나쁘진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방바닥에 엎뎌 쭈쭈바 하나 입에 물고... 호어스트 에버스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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