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은 다산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래서 해당하는 도덕경 구절을 참조하면 당호의 의미가 쉽게 도출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지만, 정작 도덕경 구절 자체가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름아닌 여유당의 ‘與’와 ‘猶’ 두 글자의 해석이 어려운 것이다. 글자의 기본 뜻으로만 본다면 ‘더불다’와 ‘오히려’를 나타내지만, 도덕경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뜻은 전혀 아니거니와 여유당 당호에서도 역시 아니다. 그래서 이를 최대한 문맥상 어그러지지 않는 방향으로 번역하고 넘어가는데, 가령 박석무·정해렴이 편역한 «다산문학선집»(현대실학사 1996)에서 “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101)로 옮기고는 “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이름이며 猶는 겁이 많은 동물의 일종이다”(102)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박무영이 옮긴 «뜬세상의 아름다움»(태학사 2002)에서는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87)로 옮기고 있다. 박무영의 번역은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평행하는 의미로 보아 “與”와 “猶”를 자전에도 없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사실 박석무 번역은 역사적으로 전고를 갖고 있으며, 박무영 번역은 의미가 중복되기는 하지만 가장 조심스러운 해석이다. 더구나 두 번역자가 여유당 당호와 관련이 있는 도덕경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관련 주해서들을 참조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실제로, “與兮若冬涉川猶兮若畏四隣”와 관련하여 도덕경 해석서들을 들춰본 결과 이 두 방향에서 어긋난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 해석서들과 다산산문 번역자들이 “與”와 “猶”, 혹은 “與猶”에 관하여 제대로 해석한 것일까?
 

다산의 <여유당기>를 읽을 때도 그랬고 도덕경을 읽을 때도 그랬고 나는 “與猶”의 풀이가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를 파고들 만한 역량이 되지 못하여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鮑善淳의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심경호 번역, 이회문화사 1992)를 읽다가 “與猶”를 풀 수 있는 단서를 만났다. 그 요지를 말하자면, 왕인지의 “소리에서 구하면 제 뜻을 파악하게 되지만 글자 자체에서 뜻을 구하려 하면 잘못된다”(上求諸其聲則得, 求提其字則惑)는 가르침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인데다 경전을 읽는 서생들은 글자의 뜻과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심하여 표음부호(의성어 내지 의태어)로서의 한자어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따르면, 이러한 오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猶豫”(유예)이다. 가령, 북제의 안지추는 “猶”를 개[犬]로 풀이하고 “豫”를 개가 미리 앞서가서 기다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당나라의 공영달은 “猶”를 원숭이로, “豫”를 일종의 코끼리로 풀이하면서 두 짐승 모두 의심이 많다고 하였다. 안사고는 “猶”를 나무를 잘 타는 의심 많은 짐승으로, “豫”를 이 짐승의 우유부단함으로 풀이했다. 이런 식의 풀이는 일부 도덕경 해설서에서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풀이는 이음절의 표음부호인 “猶豫”를 분해하여 억지로 뜻풀이를 한, 엉뚱한 상상의 결과물이다. 고서에서는 “猶豫”와 통용하는 표현으로 猶預(유예), 由豫(유예), 由與(유여), 猶予(유여), 宂豫(용예), 優與(우여), 猶與(유여), 容與(용여), 游移(유이), 夷猶(이유) 등등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 “猶豫”가 표음부호였던 탓에 가능한 일이다.

“猶豫”에 상응하는 여러 표현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灩澦堆”(염여퇴)의 “灩澦”(염여)를 들 수 있다. 잘 알다시피, “灩澦堆”는 장강 삼협에 위치한 수중 암초로서 겨울에는 물 위로 드러났다가 물이 불어난 여름에는 물 속에 잠기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수많은 배가 좌초되었다. 협곡으로 들면 해와 달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양안의 암벽들, 위험한 급류 속의 수중 암초, 그리고 어두운 벼랑 꼭대기에서 들리는 구슬픈 원숭이 울음소리는 수많은 시인들의 심회를 건드리기에 충분했기에, 이백도 두보도 백거이도 그밖의 수많은 시인들도 관련 시를 남겼다. 이 “灩澦堆”는 “淫預堆”(음예퇴), “猶豫堆”(유예퇴)로 불리기도 했던 바, 이러한 대체가 가능했던 것 역시 “灩澦”가 의성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길밖에 없다. 요컨대, “유예”, “유여”, “염여” 등등은 급류가 암초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의 의성어, 혹은 급류가 암초 때문에 소용돌이처럼 휘돌거나 몰아치는 모양새의 의태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그 소리나 모양새를 “위 위”(yu yu) 하는 음으로 듣고 그 음에 가까운 문자를 써서 표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우우”, “워워”, “휘휘” “구구”, “과과”, “콰콰”, “쏴쏴”, “출렁출렁” 하는 음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급류가 수중 암초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의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 바로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이 그렇다. 가장 빠를 때에는 유속이 시속 40킬로미터에 이르는데, 그때에는 급류가 수중 암초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우 쏴쏴” 하고 20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돌이 우는 곳이라 하여 “울돌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혹시 “강강술래”라는 받는소리도 이 “과과 쏴쏴” 하는 바다의 울음소리에서 온 것이 아닐까? 어쨌든) “염여퇴”를 우리 식으로 번안하자면 “울돌”이 제격이겠다. 이처럼 글자의 의미에서 뜻을 구하지 않고 소리에서 뜻을 구하면 쉽게 풀이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서의 의성어와 그에 대한 오해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후대의 서생들은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 해독에 집착하는 관성 때문에 음운현상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경전이 쓰여질 당시의 사람들이 당시의 관행적인 의성어나 의태어 표현에 대하여 누구나 익히 알고 있기에 별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서슴없이 활용했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지당한 상식을 놓치면, “灩澦”(염여)를 두고 “소용돌이 물결이 돌 위를 내리칠 때 생기는 물안개가 마치 흩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 같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임어당, «쾌활한 천재» 80면)이라는 다소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설은 현대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고대시대부터 횡행했던 유서 있는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다산생가의 여유당 당호. 조심스러운 모범생 스타일의 평소 서체에 비해 힘찬 활력과 기세가 느껴진다.
이제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으로 되돌아가자. 우선 “與”와 “猶”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이 구절을 번역하면, “與로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猶로다!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가 된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급류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의 표음부호로 “猶”, “豫”, “與”를 주로 썼던 바, 이 문자들을 (우리말의 “우우”, “쏴쏴”처럼 ) 첩어로 만들어 소리의 지속을 모방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앞서 예로 들었던 다양한 표현들이 출현했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첩어를 각기 떼어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猶與”나 “與猶”라는 첩어를 쓰는 대신, “與兮”, “猶兮”로 따로 떼어놓고 있다. 이를 형식과 의미에 알맞게 번역하자면, “휘이!”, “휘이!”나 “출렁거림이여!”, “출렁거림이여!” 쯤 되겠다. 그러면 이 구절은 “출렁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출렁거림이여!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번역하는 편도 고려해 볼 만하다. 결국 이 구절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급류와 암초 앞에서 두려워하고 극도로 조심하는 모양새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정이며, 틀릴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경 해석서들 중에서 “與”와 “猶”를 의성어 내지 의태어로 해석한 주해서는 없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이 해석은 무척 어줍잖은 아마추어의 소산에 불과하겠다. 그러나 사뭇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與”와 “猶”가 대표적인 표음부호라는 사실에 바탕하고 있으며, 옛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 가졌던 외경심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경의 판본을 비교해 보면 설득력이 더 높아진다:


백서본 與呵 其若冬涉水 猷呵 其若畏四鄰
곽점본 夜乎 奴冬涉川 猷乎 其奴畏四鄰
왕필본 豫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다산본 與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다산본’이라는 판본명은 임의적인 것으로 다산이 당호를 지을 때 참조한 도덕경 유통본을 말한다. 위 텍스트는 “이곳”을 참조하여 구성했다. 국내에서 위 세 판본을 비교하고 있는 것으로는 이석명의 «백서 노자»(청계 2003)가 유일한 듯하다.)


백서본과 곽점본은 이십 세기에 발굴된 판본이므로, 다산 생존시에는 오직 왕필본만 유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산이 참조한 도덕경 판본은 예로부터 유통되었던 왕필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로되 ‘豫’ 자와 ‘與’ 자가 상이한 판본이었나 보다. 사실 이 두 글자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주 통용되었던 점을 고려하여, 주석자들은 고대로부터 ‘豫’와 ‘與’가 서로 통용되었다는 비평을 한다. 맞긴 맞는 비평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豫’와 ‘與’가 의미상으로가 아니라 음운상으로 통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與’, 夜’, ‘豫’라는 의미가 상이한 글자들이 음운상으로 통용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본문의 동일한 자리에 서로 통용하는 글자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발음 ‘여’, ‘야’, ‘예’ 등은 음운상으로 통용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猷’와 ‘猶’ 역시 표음부호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문에서는 이처럼 비슷한 음운을 모아 소리를 흉내낸 글자를 두고 연면자(聯綿字)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휘휘”, “출렁출렁”처럼 첩어를 통하여 의성어 내지 의태어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첩어를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거센 물줄기 소리’를 담은 글자가 후대에 들어서 그 원뜻에서 벗어나 ‘거센 물줄기 앞에서 겁을 내고 주저하는 모양새’로 의미가 전이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자연으로부터 시작된 글자가 인간화, 추상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르러 ‘豫’, ‘與’, ‘猷’, ‘猶’를 하나같이 ‘머뭇거리다’, ‘주춤거리다’, ‘망설이다’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 근거하여 마침내 자전에 글자의 의미가 등재된다. 이것이 최후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원뜻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오늘날 도덕경 15장을 해석하는 작업은 바로 이 최후의 단계에서 벌어지는 작업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은 ‘豫’, ‘與’, ‘猷’, ‘猶’와 같은 글자들이 어느 정도나 추상화된 단계에서 쓰여진 경전일까? 아니면 추상화되기 이전의 의성어 내지 의태어 단계에서 쓰여진 것인가? 이와 관련한 논의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일 텐데, 내 짐작으로는, 도덕경은 각종 소리글자들이 추상화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 다산은 과연 도덕경 15장의 “與”와 “猶”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여유당” 당호로 채택한 글자인 만큼 “與”와 “猶”에 대하여 분명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산의 명확한 풀이는 보이지 않으며,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고 넘어간 듯하다. 특히 그가 이 구절을 두고 부언한 구절을 읽어보면 “與”와 “猶”를 의성어로 보지 않았던 것같다. 그렇다면 다산은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의 구절을 “머뭇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주춤거림이여!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다산이 의도했던 여유당 당호의 뜻은 “머뭇거리고 주춤거림”, 혹은 “머뭇거리고 망설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박무영 번역의 «뜬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한 마디. 그는 <여유당기>의 마지막 문장을 “이것을 내 집에 현판으로 붙이려다 생각해 보고는 또한 그만두었다. 초천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문설주에 써 붙이고, 이렇게 이름 붙인 까닭을 아울러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문설주”는 부적절한 번역어이다. “문설주”가 아니라 “상인방”이나 “문미”[楣]로 번역해야 한다. 아마도 그가 양수리의 다산생가를 방문하여 “여유당” 당호가 어디에 걸려 있는가를 눈여겨 보았거나 일반적으로 당호가 어디에 걸리는가를 조사하기만 했더라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성의 결핍도 책만 읽는 후대 서생들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삼협의 풍경 중의 하나. 염여퇴는 이 삼협의 초입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염여퇴와 관련한 최신 정보 하나. 중국정부는 이 염여퇴가 뱃길에 위험한 요소라 하여 1950년대에 폭파해 버렸다고 한다. (웹 상의 정보여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사실이라면) 음, 이제 염여퇴는 완벽하게 문헌에만 존재하는 유적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런 정도라면 그럭저럭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얼마 전 지상 최대의 양쯔강 싼샤(삼협) 댐 건설로 인하여 삼협 내외의 유명한 유적들(무려 천여 곳을 상회하는 유적들)이 대거 수몰되기에 이른 것은 몹시 안타깝다. «중국문화답사기»를 쓴 위치우위가 그 유명한 삼협의 협곡들을 지나가면서, 바깥 풍광을 구경하지 않고 선실에서 조용함을 즐기던 이들을 상찬한 것도, 또 “역사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산천도 이곳에서 뒤로 물러나며, 시인 역시 이곳에서 빛을 잃는다”(107)고 말한 것도, 바로 이 싼샤 댐 건설로 인하여 허다한 유적들이 수몰되는 데 따른 좌절감의 우회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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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이런저런 상념들을 풀어놓은 이 글을 읽기 전에 관련 연보를 잠깐 확인해 두자:

1875년 비제, <카르멘> 초연 석달 뒤 사망
1878년 바그너와 니체의 최종적 단절
1881년 니체, <카르멘>을 처음 봄. 닷새 뒤 두번째 봄
1883년 바그너 사망
1888년 니체, «바그너의 경우» 저술
1888년 니체가 편지 형식으로 쓴 «바그너의 경우»는 “나는 어제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제의 걸작은 오페라 <카르멘>을 가리킨다. 오늘날에야 오디오에 시디를 집어넣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니 오페라를 스무 번째 들었다는 게 별다른 이야기거리가 아니겠지만, 당시에 스무 번째 오페라를 들었다는 것은 곧 스무 번째 오페라극장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니체는 1881년에 <카르멘>을 처음 들었으니, 그 이후 일년에 두어 번은 꼬박꼬박 <카르멘>을 듣기 위하여 오페라극장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의 의문문은 바로 이러한 있을 성싶지 않은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다. 또 제아무리 바그너리안이라해도 바그너의 어느 한 음악극을 스무 번이나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니, «바그너의 경우»의 첫 문장은 바그너리안을 도발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청년 니체는 바그너리안이었고 베토벤 예찬자였다. 그러나 청년이 아닌 니체는 비제를 열렬히 예찬했고 모차르트의 “황금의 심각함”, “명랑함”을 좋아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대한 언급은 단편적이기 때문에 “니체의 모차르트 예찬”이라는 표현은 쓰기가 힘든 반면, “니체의 비제 예찬”이라는 표현은 충분히 정당하다. 사실 니체가 비제의 음악을 두고 한 예찬 내용은 대부분 모차르트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가 미학의 제일 원칙으로 내세운, “선한 것은 가벼우며, 모든 신적인 것은 여린 발로 달린다”는 명제는, 비제보다는 오히려 모차르트 음악에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그래서 그가 비제를 극찬한 내용으로 모차르트를 예찬했더라면 후대에 그의 음악적 감각과 표현력이 더 훌륭하게 평가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듬직하다. 비제와 모차르트는 음악사적인 무게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체의 비제 예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음악적 감각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바그너 음악과 강렬히 대비시키기 위해 비제를 일부러 과도하게 높힌 것일까? 다시 말해 니체의 비제 예찬에는 (바그너리안의 입장에서 보기에) 뭔가 악의적인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이래저래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인데, 먼저 니체가 비제를 예찬했던 대목을 일부나마 읽어보자:

사람들은 이 작품[카르멘]으로써 바그너식 이상의 온갖 수증기, 축축한 북방과 작별을 합니다. 이미 줄거리만으로도 그로부터 구원합니다. 줄거리는 메리메에 의하여 격정의 논리, 가장 짧은 선, 탄탄한 필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열대에 속하는 것, 공기의 건조함, 공기의 청명함(limpidezza)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기후가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감각, 다른 감수성, 다른 명랑함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명랑한 것이지만, 프랑스식이나 독일식의 명랑함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음악의 명랑함은 아프리카식입니다; 이 명랑함에는 숙명이 있으며, 그것의 행복은 짧고 돌발적이며 양해를 모릅니다. 이제까지 유럽의 기존 음악에는 없었던 언어가 비제에게 있다는 점에서 저는 그를 질투합니다 — 한층 더 남방적이고 한결 더 짙은 갈색이고 한층 더 그을린 감수성이 있다는 점에서 . . .

— 니체, «바그너의 경우» 2

니체는 비제를 예찬하면서 날씨와 기후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즉 축축한 날씨의 북방(바그너)과 공기가 청명한 남방(비제)을 대비시키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공기의 건조함, 공기의 청명함”은 니체의 경험을 가장 가깝게 비춰주는 요소인 동시에, 고전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가령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에서도 “공기의 건조함”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도 신성한 공기(에테르)는 건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유럽의 공기가 눅눅하다, 즉 축축한 날이 많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조한 공기를 별도로 예찬하지 않는 것도 축축한 날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장마철에 한국을 방문한 맨유의 스콜스가 “한국에 오게 돼 기쁘다. 이번이 두번째다. 비 오는 날씨가 맨체스터와 비슷하다”고 했다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우리나라 날씨는 원래 이렇지 않다고 설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자연적 환경은 누구나 늘상 거론할 수 있는 요소이기에 역설적으로 무시되는 요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요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비제는 끝없는 바다의 파도처럼 나를 도취시켰고 압도하였다. 다음날 기차가 나를 국경 넘어 넓은 세상으로 실어갈 때 카르멘의 멜로디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뮌헨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고대문화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비제의 음악과 합쳐서 내 속에 내가 그 깊이와 의미의 무게를, 그저 예감할 수는 있으나 파악할 수는 없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봄과 같은, 결혼의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1900년 12월 1일에서 9일 사이의 흐린 주간이었다.

— 아니엘라 아훼 정리, 이부영 번역, «회상, 꿈, 그리고 사상» 131면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C.G. 융의 자서전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융 역시 <카르멘>을 처음 듣고 압도당했다. 어쩌다 한 사상가가 비제를 예찬했던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또 다른 사상가가 거의 비슷하게 예찬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뭔가 내가 모르는 필연적인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혹시 19세기 내지 20세기 초의 독일어권 사상가들은 남방의 요소, 정열의 요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는 <카르멘>을 처음 듣고 페터 가스트에게 쓴 편지에서 “격정과 아름다움의 영혼”을 언급했으며, 융은 “봄과 같은, 결혼의 축제 같은 분위기”를 언급했다. 한 마디로 그들이 비제의 음악에서 발견한 것은 비독일적 요소들인 셈이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 비제의 음악과 같은 “음악의 남방”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의 희소성이 비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경험의 희소성은 니체와 융에게서 하나의 날씨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에게 카르멘은 맑고 투명하고 건조한 날씨보다 더욱 만나기 힘든 음악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의 오페라란 오늘날처럼 영상매체나 음반을 통하여 늘상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많아야 한두 번 접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경험의 희소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음악이 음반으로 존재하지 않고 공연이나 연주회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음악은 훨씬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더구나 그 음악이 살아오는 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부류의 음악이라면 더욱 놀라울 것임은 분명하다. 재작년 연말에 황병기 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들과 그의 가야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지만, 그 음악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황병기가 서정주의 <추천사>를 가사로 하여 작곡한 가곡이었다. 다른 곡들은 모두 음반을 통하여 익히 들어왔던 터라 새삼스럽거나 놀라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추천사>를 듣는 순간 나는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의 그 능청능청대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무반주의 느린 진양조로 시작되는 “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는 구절에서는 정신이 아뜩했다. 약간은 과장된 듯한 창자 강권순의 표정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집에 돌아와 <추천사>가 녹음된 음반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곡은 아직 음반에 녹음되지 않은 음반미발표곡이었고, 그래서 더 이상 들어볼 기회도 없었다. 그 음악은 온전히 일회적이었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되풀이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얼마나 자주 그 가곡을 떠올렸던가. 그러나 이렇게 기억만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이 어쩌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라 생각하며 더욱 좋아했다. 더불어 이 경험을 가지고 니체의 비제 예찬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나는 어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는 니체의 문장은 얼마나 도발적이고 얼마나 집요한가! 그러고 보면, “카르멘의 멜로디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융의 서술도 현대인의 서술보다 훨씬 진실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추천사>가 녹음된 음반이 출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황병기 가야금작품집 제5집 «달하 노피곰» 음반에 그 가곡이 실려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나에게서 하나의 진기한 경험이 막을 내린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어제 이 음반이 집에 도착했고, 지금 나는 서정주 작사, 황병기 작곡, 강권순 창의 <추천사>를 듣고 있다.

이 가곡이 후대의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이미 평가가 끝난 것이나 많은 평가가 이루어진 작품에 대하여 평하는 것은 안전하다. 지금 이 시대, 현 시기에 출현하는 새로운 예술, 동시대 예술, 소위 “컨템포러리” 예술에 대하여 평하는 것에 비하자면 이전 세대의 예술을 평하는 것이 좀더 안전하고 쉽다는 말이다. 그러나 니체와 융이 들었던 <카르멘>은, 나의 경험으로 번역하자면, 황병기가 작곡한 <추천사>처럼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괴테의 감식안이 크게 그리친 사례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그가 동시대의 베토벤을 애써 무시하고 오히려 지금은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않는 다른 동시대 음악가를 고평가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구보다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 간파했던 그 괴테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동시대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니체는 정말 겁없이 동시대 예술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즉 니체 당시에 바그너의 음악과 비제의 음악은 웬만한 감식안이 아니고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하기도 어려운 동시대 예술이었지만, 니체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젊은 시절에는 바그너의 선전대 역할을 했고 후기에는 그와 반대로 비제를 예찬했다. 두 음악가가 동시대 예술가이면서도 그 음악언어는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니체의 흥분상태를 잘 입증해 준다.

이 대목에서 바그너의 음악극 이론과 비제의 음악을 비교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으나, 이는 또 한 편의 글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아무튼 나는 니체의 비제 예찬이라는 숙제를 경험의 희소성의 문제, 그리고 동시대 예술의 문제로 풀고 싶다. 현시대의 정보 소통은 전지구적이고 동시적이어서 현대인은 옛 시대의 사람들만큼 경험의 희소성을 겪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의 동시대 예술은 옛 시대의 동시대 예술보다 새로움이 적고 생소하지 않다. 예술과 관련한 거의 모든 시도가 이미 행해졌고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래서 현대의 평론은 태생적으로 옛 시대의 평론처럼 모험적일 수 없으며,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적다. 이것이 현대의 비극이며 이것이 옛 시대의 풍요를 말해 주는 것이다. 풍요는 창조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존의 예술적 관념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동시대 예술의 출현 못지않게 그 예술을 간파해 내는 과정도 창조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니체 당시에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평하는 것보다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 즉 바그너와 비제를 평하는 것이 좀더 창조적이고 흥분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니체의 비제 예찬은 악의적인 과장이 아니라 필연적인 진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비제라는 인물은 진정 “새로운 아름다움과 매혹을 보았던, 한 편의 음악의 남방을 발견했던 최후의 천재”(«선악의 저편» 254)였다. 니체가 보기에 음악은 비제의 음악처럼 “지중해의 음악이 되어야 한다”(«바그너의 경우» 3).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 “음악의 남방”, “지중해의 음악” 등의 표현은 독일인이 경험하기 힘든 날씨와 예술,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니체는 위악적으로 비제를 예찬한 것이 아니다.
 

서정주. 나 역시 이 시인의 시 앞에서 언제나 커다란 갈등을 한다. 갈등하면서도 그의 시를 좋아한다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다. <추천사>를 무척 좋아했던 나의 이십대 시절을 돌아보자니, 확실히 내게는 낭만주의 성향이 있었던가 보다. 그런데 그 시절에 주목하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새삼 서정주를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 2연의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香丹아”이다. 이 싯구는 서정주가 여인들이 베갯모에 수놓은 자수를 이미 1950년대에 눈여겨보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풀꽃더미, 나비, 꾀꼬리 등은 베갯모 자수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베갯모의 풀꽃더미, 작은 나비들, 새들은 춘향이 수를 놓았던 것들이지만 춘향은 그것들을 훌쩍 떠나고자 한다. 춘향은 그것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인다. 춘향은 더 이상 풀꽃더미, 나비, 새들 속에서 “西으로 가는 달 같이” 천천히 허우적일 수는 없다. 춘향은 “울렁이는 가슴”을 깨끗이 쓸고 먼 바다로, 먼 하늘로 날아오르고자 한다. 향단은 그네를 밀어 춘향의 울렁이는 가슴을 저 하늘로 저 바다로 아주 밀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1연, 2연, 마지막 연을 마무리하는 “향단아” 하는 부름은, 춘향이 먼 하늘로 먼 바다로 풍덩 빠져드는 소리, 의성어처럼 들린다. 황병기의 곡은 이러한 “울렁이는 가슴”과 “밀어올림”의 주제에 뛰어나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집중은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장단과 강약 구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강권순의 창은 이를 대비적으로 잘 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황병기의 <추천사>를 처음 들었을 때나 무수히 들어본 지금이나 서정주의 <추천사>를 읽을 때와 거의 동일한 감정이 내게서 일어난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체험이다. 강권순의 창은 재작년 공연장에서 들었을 때에 더 극적이고 흥이 더 들어갔던 듯한데, 녹음된 음반에서는 그때보다는 절제한 듯하다. 아마도 가곡의 단아함과 민요의 격정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강권순의 창이 아쉽지는 않은데, 가야금 반주가 너무 크게 녹음된 점은 아쉽다.

황병기가 작곡한 <추천사>를 들으면서 본문비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추천사>는 원래 «서정주시선»(1955년)에 처음 실렸던 시인데, 현재 그 시집은 판매되지 않는다. 하지만 근간된 민음사판 서정주 전집(1994년)은 초판본의 원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다행히도 원문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 서정주의 시들은 각종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데다가 한글표기법이 바뀔 때마다 원문의 옛 표기법이 편집자 임의대로 수정된 경우가 많았고, 또 그 수정이 시인 생존시에 벌어진 일이라서 과연 시인이 그 수정작업에 관여했는지 여부에 따라 원문을 확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황병기의 <추천사>와 민음사 전집판의 <추천사>의 불일치도 이러한 원문에 대한 무관심과 난삽한 수정작업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가령,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전집판),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음반),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음반내지)가 각각 다르고, “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눌로”(전집판),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나라로”(음반),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음반내지)가 각각 다르다. 이러한 상이함은 민음사 전집판이 초판본을 따르고, 황병기가 과거의 수정본을 따르고, 음반내지가 비교적 최근의 수정본을 따른 데서 비롯했을 것이다. 음반내지야 작품과 하등 무관한 것이니 음반사의 불성실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서정주의 시와 황병기의 곡이 서로 본문이 다르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고창 선운사 들머리의 바윗돌에 새겨놓은 <禪雲寺 洞口>라는 시 역시 이러한 원문의 불일치 문제를 남기고 있으니, 본문비평이 생각보다 경시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추천사>가 황병기의 가야금작품집 음반에 실려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제로 <추천사>를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이 얼마나 도발적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로 <추천사>를 스무 번 이상 들었으며, 이는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손쉽게 가능한 현실은 옛 시대의 문장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러한 손쉬운 현실과 허다한 정보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 “바람이 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香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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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7-28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왜그리 비제를 좋아했나..반조님 글을 읽으니 이해가 되네요.^^ 독일같은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스페인같은 남부의 분위기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긴 하죠. 황병기씨 작품은 저도 <비단길> 이나 <미궁>같은 작품을 통해서 접해 봤는데 기존의 다른 국악과는 다르게 그만의 독창적이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음악이 처음부터 깊은 감동을 주더군요. 그동안 안듣고 있었는데 저도 얼른 이번에 새로나온 음반하나 구입해서 들어봐야 겠습니다.^^

반조 2007-07-29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비제를 처음 들었을 때 일종의 문화충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게아니라 카르멘을 보고 나서 페터 가스트에게 쓴 편지에서, 니체는 스페인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지요.

yoonta 2007-07-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비제를 좋아했던 이유중에는 그의 철학의 영향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전통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 생의 의지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충만함같은 분위기를 스페인과 같은 남부유럽의 라틴적 분위기속에서 발견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하게 되네요. 그런데 니체는 스페인은 여행한 적이 없나보군요.
 

냐나틸로카 엮음, 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고요한 소리, 2006)을 읽어본다. 이 책의 원저는 독일인 냐나틸로카 스님이 아함부 경전에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관련한 대목을 주제별로 묶어서 영어로 번역한 책 «The Word of the Buddha»이다. 이 책을 역자 김재성이 팔리어 텍스트를 함께 참고하여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제까지 접해본 아함부 경전의 우리말 번역서들 중에서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 번역본이 지속적으로 개정되면서 3판에 이른 것만 보아도 그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말 번역본이 3판에 이른 경우는 나도 처음 접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들이 있어 몇 군데 소개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이것은 나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망한 생각은 병이며, 질병이고, 가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허망한 생각을 극복하면 그는 침묵의 성자라고 한다. 이 침묵의 성자에게는 더 이상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으며, 떨리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서 태어나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이를 먹어 늙겠는가? 늙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이 있겠는가? 죽음이 없는데 어떻게 떨리는 것이 있겠는가? 떨리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욕망하는 것이 있겠는가?

— «중부» 140 “界分別經” MN III 246
 

비구들이여, 태어남[生]이란 무엇인가. 생명 있는 존재들이 이런 저런 유정(有情)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 태어나진 상태, 지각이 태어나는 것, 존재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생겨남,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의 발생 등, 비구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 «장부» 22 “大念處經” DN II 305-307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화살을 뽑아라.

— «숫타니파타» Sn 592
 

비구들이여, 물질[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行], 의식[識]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말한다.

— «상응부» XXII 29 “歡喜” SN III 31
 

비구들이여, 청정한 범행의 목적은 재물, 명예,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며, 계(戒), 정(定), 지견(知見)을 얻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자유(akuppā cetovimutti)가 청정한 범행의 목적이며, 핵심이며, 궁극의 도달점이다.

— «중부» 29 “心材喩大經” MN I 197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등불(또는 섬)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아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법을 등불(또는 섬)로 삼고, 법을 피난처로 삼아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 «장부» 16 “大般涅槃經” DN II 100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아 너희들에게 가르친 이 법을 너희들은 잘 간직하고, 잘 보존하고, 잘 닦으며, 자주 실행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복리와 안녕을 위해서, 세상의 위안을 주기 위해서, 천상의 천신들과 인간들의 행복과 복리와 안녕을 위해서 이 청정한 범행(梵行)이 잘 유지되고 오래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 «장부» 16 “大般涅槃經” DN II 120

냐나틸로카 스님의 «The Word of the Buddha»의 영어 원문은 웹으로 공개되어 있다. 이 책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초기경전에서 간추려 번역한 텍스트라면, «Fundamentals of Buddhism: Four Lectures»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냐나틸로카 스님의 해설서이다. 아울러, 불교 용어와 교리를 정리해 놓은 사전 «Buddhist Dictionary»도 웹으로 공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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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7-1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담아갑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17)로 시작되는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이부영 옮김; 집문당 1990)은, 당대의 혹독한 편견과 냉대를 무릅쓰고 극도로 고독한 자리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대면하면서 인간의 내면,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정신의학자 C.G. 융의 자전적 저술이다. 이 책은 융의 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부분은 융이 집필하고 나머지는 융이 말한 것을 조력자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여기에서 융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내적인 체험들을 중시하고서 그의 생애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꿈과 환상과 명상, 그리고 체험이 주 내용을 구성한다. 나보다 앞선 세대의 번역이어서 그런지 번역어가 낯선 면이 있지만 요즘 소장학자들의 상투적인 번역어(독한사전 수준의 한글)에 많이 지쳐 있는 나는 오히려 무척 반가웠다. 다만 번역어에 대응하는 독일어를 일일이 확인하기가 어렵고(가령, 심혼, 영혼, 귀령, 영, 정신, 마음, 자아, 나 등등) 아주 가끔씩 비문과 엉뚱한 번역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잘 읽히는 문장이다. 나의 이 글은 이 책에 대한 소개서라기보다는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융의 감동적인 생애에 대한 약간의 안내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알고 있지만, 그 탐구 결과를 융처럼 학문적인 세계로 옮겨놓은 이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자기 자신을 탐구하여 ‘앎’에 이르렀던 이들은 그것을 像이나 언어로 옮기기를 꺼렸으나, 융은 그 ‘앎’, 그 ‘경험’을 어떻게든 像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과연 그 앎, 그 경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서양의 전통에서 그 앎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는 ‘그노시스’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그노시스’를 영지주의의 언어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바람에 어두운 언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언어 대신에 ‘성스러움’이라는 대단히 지적이고 신학적인 용어가 사랑받았다. 그러나 ‘성스러움’은 더 이상 ‘계시’가 불가능한 시대에 계시가 가능했던 시대의 경험을 추억하는 세련된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하느님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도그마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의 의미»(분도출판사 1987)라는 책을 통하여 ‘누멘’을 등장시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그는 그 책에서 라틴어 ‘누멘numen’이란 용어를 ‘성스러움’으로 탈바꿈 되기 이전의 사태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 이후로 ‘누멘’, 혹은 ‘누멘적인 것’(번역서는 ‘누미노제적인 것’으로 옮기고 있다)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세계관에 포섭되기 이전의 ‘성스러운 경험’을 함의하게 되었다.

그 ‘누멘’, ‘누멘적인 것’이 인간에게 다가오면 그 인간은 필연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선악이 없다, 아니 선악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 ‘누멘’의 경험들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러한 경험들은 도움을 주거나 파괴적인 영향을 인간에게 준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는 그 체험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비교적 압도적인 힘으로 느낀다. 그 체험이 그의 의식의 인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올바른 인식을 할 때 그는 그 체험을 마나Mana, 데몬Dämon, 혹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과학적인 인식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제공하고 있다.(380)

융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마나니 데몬이니 신이니 하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사용한다. 무의식의 탐구는 곧 자기 자신의 탐구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게 되었을까? 융 스스로가 평생에 걸쳐 그 누멘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그러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에 대한 아무런 전략적 고려 없이 그 경험을 세상에 쏟아내고 말았다. 융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니체가 경험한 바와 같은 것을 이미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터였다:

어느 한순간, 나는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엄청난 감동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을 느꼈다. 나의 등 뒤에는 마치 안개의 壁과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안개벽 뒤에서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순간, 나에게 가 생겨난 것이다. 에도 나는 존재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가 여기 있다. 여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에는 그것이 나와 함께 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가 하고자 했다.(45-46)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自我를 확립한 순간부터 神의 통일성, 위대함, 그리고 超人性은 내 환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53)

하늘의 별세계와 끝없는 공간에서 오는 입김이 나에게 와닿는 것 같은, 혹은 어떤 영혼이 눈에 띄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 아득히 지나간 과거의 것, 그러나 언제나 존재하며 超時間的인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듯한 영혼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82)

열두 살에 처음 겪었던 이런 부류의 경험들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주변세계는 모두 “신학적 종교”로 굳어져 있었고 그의 체험은 그런 종교에서 용인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아이였고, 그 영적 체험을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마저 일찍부터 알았다:

거기에 관해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도 접촉할 만한 구석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고 나를 대하는 것처럼 느꼈으므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80)

그리하여 내가 아는 어느 신학자도 “어둠을 비치는 빛”을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결코 “신학적 종교”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신학적 종교”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신의 체험에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2)

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 천진난만한 사람은 사람이 누구에게 그가 모르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이 그 동료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124)

이러한 누멘의 체험, 그리고 그 체험에 따른 외로움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융이 대학시절 처음 니체를 읽었을 때 몹시 흥분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니체의 위험을 잘 간파했다:

나는 끝없이 열광하였다 . . . 강렬한 체험이었다 . . . 니체는 자기의 제2호를 그의 생애의 후기, 그러니까 중년 이후에 가서야 발견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제2호를 이미 이른 청소년기부터 알고 있었다. 니체는 순진하고도 경솔하게 이 arrheton, 이름붙일 것이 아닌 것에 관해서 마치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말했다 . . . 그는 그의 제2호를 거침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계에 꺼내 보인 것이다. 그는 그의 忘我境을 함께 느끼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어린애 같은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교양있는 속물을 찾았을 뿐이고 비극적 희극인 것은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 . . 모두 연관성을 잃은 지식에 마음이 팔린 이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부질없는 시도를 한 것이다. 게다가 그 — 줄타는 사람은 그 자신을 넘어서 버렸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처신을 알지 못했다.(123-124)

선불교에서도 자신이 경험했던 경계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설사 목숨을 나눈 도반일지라도 그 경계를 드러내서는 안되며 오직 선지식에게만 드러내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제자가 그러한 점검을 무시한 채 전면에 나선다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를 수도 있다. 이른바 ‘마구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깨달음의 종교에는 예외없이 이런 비의성이 있다. 이 비의성은 누멘의 강렬한 경험 이후 그 경험자 자신이 자칫 파괴환상으로 내달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비의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누멘의 경험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혼란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자나 경험을 전달받는 자나 누멘의 경험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성스럽고 위험한 것이다.


융은 니체의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동일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간파했으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두고 거리낌없이 “복음전달자”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어린시절부터 인간세계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니체처럼 팽창(Inflation)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정신의로 활동하던 초기시절까지 자신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전달하지 않았고 또 전해 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 채 조용히 연구만 했다.

그런 그는 당시 정신의학의 추상화된 진료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진정한 치료[는] . . . [환자의] 개인적인 역사를 탐색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139)임을 확신하였으며, 그리하여 환자의 개인사와 심리적 비밀들을 토대로 진료하면서 “피해망상과 환각이 하나의 의미의 핵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 . . 정신병에서 인간 존재의 바탕을 만나는 것이다.”(149) 이를테면, 정신병 환자는 인생사에서 비극적 사건을 겪은 적이 있으며, 그 사건에 따른 멸시감과 모멸감을 代償하기 위해 현세 외적인 환상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 환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집단적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만년의 융
융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에 어울리는 주거”를 위해 호숫가에 손수 집을 짓고 살았다

융은 그 스스로도 꿈과 환상을 자주 접한 보기드문 인간형,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거의 “영매”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가 자서전에서 이야기하는 꿈과 환상들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기묘하고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런 환상들을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는 횔덜린이나 니체처럼 정신적 붕괴에 이를 뻔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환상 속에서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 . . 그 폭우에 부서졌다. 니체와 횔데를린과 그밖의 많은 것이 부서졌다. 그러나 내 속에는 마력 같은 것이 있어 처음부터 나를 지탱해 주고 있어서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202) 이것은 그 자신이 무의식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으려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환자를 이해하기 위한 거인적인 노력, “환자를 위해서 감행하는 것”(203)이었다. 이것이 그를 그 위험에서 버티게 해 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이 7장 <무의식과의 대면>에 실려 있다. 그의 무의식과의 대면은 1913년부터 1919년까지 6년 간에 걸친 고독하고 위험하고 처절한 과정이었다.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는 결국 위험한 문을 열었고,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 파의 사상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이르기까지 — 대부분 인기 없는, 애매모호한, 그리고 위험한 — 세계의 다른 극을 향한 하나의 탐험여행”(215)을 했다.

이때부터 나의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나에게 중요했고 내가 찾던 인식들은 당시의 학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원초적 체험을 몸소 겪어야 했고 게다가 내가 체험한 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확립해야 했다. 그렇게 안 했더라면 그 체험은 생명력이 없는 주관적 전제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영혼에 봉사하는 것을 나의 역할로 삼았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고 또한 미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커다란 보배였다. 내가 그 영혼의 말을 적은 것은 나의 존재를 비교적 전체성으로서 살고 견디어내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218)

그는 이 기간에 이후에 펼쳐낼 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핵심을 건져올렸다. 그러므로, 그는 경험주의자이고, 그의 저작들은 한 영적인 인간이 누멘의 체험을 한 이후 그 체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끈기 있게 탐구한 기록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내적인 像을 추적하던 그 몇 해는 나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속에서 온갖 본질적인 것이 결정되었다. 모든 것이 그때 시작되었다. 뒤의 세부적인 것은 다만 보충하거나 보다 더 분명히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당시 무의식에서 터져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더 철저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을 일생을 두고 하여야 할 작업의 原物質prima materia이었다.(228)


이처럼 누멘을 체험하고 또 탐구했던 그가 동양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불교, 요가, 도가, 주역, 중국연금술, 선불교 등 그의 관심사는 폭넓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서양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양의 고중세 신화의 이미지들을 빌어 무의식의 내용을 읽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동양인인 우리는 그의 꿈과 환상과 이미지들에 대하여 이질적인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무의식의 어두운 면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과연 이런 것이 있겠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의문은 동양인인 우리가 선불교나 도가의 가르침을 통하여 언제나 자연과 더불어 상상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리라.

우리는 자연의 사물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면, 혹 서양인은 신화의 이미지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을까? 혹시 명상이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융은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는 위험한 명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런 낯선 요소에도 불구하고 융은 ‘아는 자’에 가까웠고, 그래서 평생 외로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내부적으로만 침잠하거나 외적으로 팽창하는 대신 그 앎을 세상의 언어로 내놓기 위해 평생을 겸허하게 고투한 학자였다.

어릴 때 나는 외로웠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도 모르고, 전혀 알고자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보다 남에게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달할 수 없거나, 자기는 어떤 생각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간주될 때 생기는 것이다. 나의 고독은 나의 어린 시절의 꿈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과 작업을 할 시기에 최고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그는 외로워진다.(401)

융의 자전적 저술을 읽으면서 나는 니체와 횔덜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서양에서는 누멘을 체험했던 자가 정신적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던가? 아니, 서양인들 대부분은 그들이 누멘을 체험했다는 사실조차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그들이 ‘미쳤다’는 데에만 동의하는 듯하다. 참 무서운 일이다. 동양에서는 니체나 횔덜린의 예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정도의 누멘의 체험은 동양의 전통종교에서 충분히 흡수하고도 남을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와 횔덜린의 사례는 신학적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닐까? 신학적 종교가 거의 모든 정신세계를 장악한 시대에 누멘을 체험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넘어 절망과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이들을 지도할 만한 자가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누멘의 부정적 영향 아래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누멘은 누멘을 경험한 자를 높히면서 동시에 낮추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긍정 아니면 절대부정을 향한다. 그러고 보니, 니체는 “높힘과 낮춤”(Erhöhung und Erniedrigung)이라는 용어를 자주 썼다. 아, 니체여, . . .

그런 면에서 극도의 고독과 커다란 위험을 견뎌낸 융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나는 틈틈이 그의 저술을 읽을 필요를 느낀다.

때때로 나는 마치 내가 자연의 풍경과 사물 속으로 퍼져들어가 모든 나무 속에 살며, 출렁이는 파도 속에, 구름 속에, 오고가는 동물들 속에, 그리고 그밖의 모든 사물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257)

반면에, 니체는 모든 사물들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그와 정반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내 운명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는 ‘무시무시한 그 무엇’에 대한 회상이 따라다니리라, — 지상에 존재한 바 없었던 하나의 위기에 대한 회상이, 더없이 심오한 양심충돌에 대한 회상이, 이제까지 사람들이 믿어왔고 권장 받았고 성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에 대항하게 만든 하나의 결단에 대한 회상이 . . . 나는 인간이 아니라 다이나마이트다.(KSA 6,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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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6-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이 너무 멋집니다.
융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조 2007-06-06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 님께서 답글을 남기시자마자 제가 니체의 말을 덧붙혔습니다. 그러므로, 달팽이 님께서 언급하신 '마지막 말'은 융의 말이겠군요^^

그리고 융의 기본저작물 아홉 권은 한국융연구원에서 이미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양질의 번역일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이 자서전 번역 수준도 괜찮은 듯합니다.

yoonta 2007-06-1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반조님^^ 고싱가 숲이라는 홈페이지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라딘에 서재도 있으셨군요. 서재에 있는 니체관련 글들과 이 융관련 글을 읽어보니 님은 불교적 깨닭음 혹은 영지주의적 그노시스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시군요. 양자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의견에 저도 공감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융은 어렸을때부터 "신비적 경험" 즉 누멘을 경험하고 체험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필연적으로 서양의 연금술과 신비주의같은 경향을 후기에는 띄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의식이전의 체험 혹은 경험을 일반사람들은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글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융도 그것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 같고요. 프로이트나 라캉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융의 이런 실체적인 무의식이나 원형 이론을 거부하죠. 그 거부의 이유는 아마도 그 일반적이지않고 독특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융과같은 실체적인 특성을 가진 희귀한 형태의 무의식이나 신비체험보다는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일상생활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무의식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었던 것이고요. 양자사이에는 다 장단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니체도 융과같은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이네요.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

반조 2007-06-1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반갑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니체와 불교에 관심이 많습니다. 융과 영지주의는 최근에 접하게 되었어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무지렁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저는 책읽기와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프로이트나 라깡, 들뢰즈 등을 공부할 날이 올런지 모르겠네요.

니체 식으로 말하면, 인문학을 하시는 분들의 통찰력 있는 글과 논의에 참여하자면 "배우로서의 예술가", "배우로서의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저는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배역"에 충실하지는 못할 것같아요. 어느 한 배역에 충실해야 전문가가 될 수 있는데 말이죠. 이 때문에 저는 여러 훌륭한 학자들로부터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저는 프로이트나 라깡에 대해서는 일면식도 없지만, yoonta 님의 "프로이트나 라캉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융의 이런 실체적인 무의식이나 원형 이론을 거부하죠. 그 거부의 이유는 아마도 그 일반적이지않고 독특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는 견해에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니체도 융과 같은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니체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용인되지 못하는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령 그 해석을 용인한다해도 학문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말겠지요. 니체의 1881년의 경험은 그저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었던 것이라고 보는 듯해요. 저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고서 니체가 누멘을 체험했다고 보았는데, 이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는 없는 듯합니다. 이 입장에 동조한 유일한 인물로는 이제까지 오쇼 라즈니쉬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차라투스트라 때문에 오쇼를 접한 아주 희귀한 경로를 거쳤습니다.) 그러다가, 융의 자서전을 읽고 융 역시 단번에 니체의 누멘 체험을 간파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요. 그래서 융의 자서전이 무척 반갑기도 했습니다.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내 인생을 엮었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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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 H97BD
대한성서공회 편집부 엮음 / 대한성서공회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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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김현의 일기 1986~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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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초중반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은 책. 이 책을 읽고서 성실하게 살기로 마음 먹다. 김현의 저작들을 탐독하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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