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은 다산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래서 해당하는 도덕경 구절을 참조하면 당호의 의미가 쉽게 도출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지만, 정작 도덕경 구절 자체가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름아닌 여유당의 ‘與’와 ‘猶’ 두 글자의 해석이 어려운 것이다. 글자의 기본 뜻으로만 본다면 ‘더불다’와 ‘오히려’를 나타내지만, 도덕경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뜻은 전혀 아니거니와 여유당 당호에서도 역시 아니다. 그래서 이를 최대한 문맥상 어그러지지 않는 방향으로 번역하고 넘어가는데, 가령 박석무·정해렴이 편역한 «다산문학선집»(현대실학사 1996)에서 “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101)로 옮기고는 “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이름이며 猶는 겁이 많은 동물의 일종이다”(102)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박무영이 옮긴 «뜬세상의 아름다움»(태학사 2002)에서는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87)로 옮기고 있다. 박무영의 번역은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평행하는 의미로 보아 “與”와 “猶”를 자전에도 없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사실 박석무 번역은 역사적으로 전고를 갖고 있으며, 박무영 번역은 의미가 중복되기는 하지만 가장 조심스러운 해석이다. 더구나 두 번역자가 여유당 당호와 관련이 있는 도덕경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관련 주해서들을 참조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실제로, “與兮若冬涉川猶兮若畏四隣”와 관련하여 도덕경 해석서들을 들춰본 결과 이 두 방향에서 어긋난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 해석서들과 다산산문 번역자들이 “與”와 “猶”, 혹은 “與猶”에 관하여 제대로 해석한 것일까?
 

다산의 <여유당기>를 읽을 때도 그랬고 도덕경을 읽을 때도 그랬고 나는 “與猶”의 풀이가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를 파고들 만한 역량이 되지 못하여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鮑善淳의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심경호 번역, 이회문화사 1992)를 읽다가 “與猶”를 풀 수 있는 단서를 만났다. 그 요지를 말하자면, 왕인지의 “소리에서 구하면 제 뜻을 파악하게 되지만 글자 자체에서 뜻을 구하려 하면 잘못된다”(上求諸其聲則得, 求提其字則惑)는 가르침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인데다 경전을 읽는 서생들은 글자의 뜻과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심하여 표음부호(의성어 내지 의태어)로서의 한자어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따르면, 이러한 오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猶豫”(유예)이다. 가령, 북제의 안지추는 “猶”를 개[犬]로 풀이하고 “豫”를 개가 미리 앞서가서 기다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당나라의 공영달은 “猶”를 원숭이로, “豫”를 일종의 코끼리로 풀이하면서 두 짐승 모두 의심이 많다고 하였다. 안사고는 “猶”를 나무를 잘 타는 의심 많은 짐승으로, “豫”를 이 짐승의 우유부단함으로 풀이했다. 이런 식의 풀이는 일부 도덕경 해설서에서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풀이는 이음절의 표음부호인 “猶豫”를 분해하여 억지로 뜻풀이를 한, 엉뚱한 상상의 결과물이다. 고서에서는 “猶豫”와 통용하는 표현으로 猶預(유예), 由豫(유예), 由與(유여), 猶予(유여), 宂豫(용예), 優與(우여), 猶與(유여), 容與(용여), 游移(유이), 夷猶(이유) 등등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 “猶豫”가 표음부호였던 탓에 가능한 일이다.

“猶豫”에 상응하는 여러 표현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灩澦堆”(염여퇴)의 “灩澦”(염여)를 들 수 있다. 잘 알다시피, “灩澦堆”는 장강 삼협에 위치한 수중 암초로서 겨울에는 물 위로 드러났다가 물이 불어난 여름에는 물 속에 잠기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수많은 배가 좌초되었다. 협곡으로 들면 해와 달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양안의 암벽들, 위험한 급류 속의 수중 암초, 그리고 어두운 벼랑 꼭대기에서 들리는 구슬픈 원숭이 울음소리는 수많은 시인들의 심회를 건드리기에 충분했기에, 이백도 두보도 백거이도 그밖의 수많은 시인들도 관련 시를 남겼다. 이 “灩澦堆”는 “淫預堆”(음예퇴), “猶豫堆”(유예퇴)로 불리기도 했던 바, 이러한 대체가 가능했던 것 역시 “灩澦”가 의성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길밖에 없다. 요컨대, “유예”, “유여”, “염여” 등등은 급류가 암초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의 의성어, 혹은 급류가 암초 때문에 소용돌이처럼 휘돌거나 몰아치는 모양새의 의태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그 소리나 모양새를 “위 위”(yu yu) 하는 음으로 듣고 그 음에 가까운 문자를 써서 표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우우”, “워워”, “휘휘” “구구”, “과과”, “콰콰”, “쏴쏴”, “출렁출렁” 하는 음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급류가 수중 암초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의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 바로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이 그렇다. 가장 빠를 때에는 유속이 시속 40킬로미터에 이르는데, 그때에는 급류가 수중 암초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우 쏴쏴” 하고 20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돌이 우는 곳이라 하여 “울돌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혹시 “강강술래”라는 받는소리도 이 “과과 쏴쏴” 하는 바다의 울음소리에서 온 것이 아닐까? 어쨌든) “염여퇴”를 우리 식으로 번안하자면 “울돌”이 제격이겠다. 이처럼 글자의 의미에서 뜻을 구하지 않고 소리에서 뜻을 구하면 쉽게 풀이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서의 의성어와 그에 대한 오해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후대의 서생들은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 해독에 집착하는 관성 때문에 음운현상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경전이 쓰여질 당시의 사람들이 당시의 관행적인 의성어나 의태어 표현에 대하여 누구나 익히 알고 있기에 별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서슴없이 활용했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지당한 상식을 놓치면, “灩澦”(염여)를 두고 “소용돌이 물결이 돌 위를 내리칠 때 생기는 물안개가 마치 흩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 같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임어당, «쾌활한 천재» 80면)이라는 다소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설은 현대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고대시대부터 횡행했던 유서 있는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다산생가의 여유당 당호. 조심스러운 모범생 스타일의 평소 서체에 비해 힘찬 활력과 기세가 느껴진다.
이제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으로 되돌아가자. 우선 “與”와 “猶”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이 구절을 번역하면, “與로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猶로다!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가 된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급류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의 표음부호로 “猶”, “豫”, “與”를 주로 썼던 바, 이 문자들을 (우리말의 “우우”, “쏴쏴”처럼 ) 첩어로 만들어 소리의 지속을 모방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앞서 예로 들었던 다양한 표현들이 출현했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첩어를 각기 떼어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猶與”나 “與猶”라는 첩어를 쓰는 대신, “與兮”, “猶兮”로 따로 떼어놓고 있다. 이를 형식과 의미에 알맞게 번역하자면, “휘이!”, “휘이!”나 “출렁거림이여!”, “출렁거림이여!” 쯤 되겠다. 그러면 이 구절은 “출렁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출렁거림이여!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번역하는 편도 고려해 볼 만하다. 결국 이 구절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급류와 암초 앞에서 두려워하고 극도로 조심하는 모양새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정이며, 틀릴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경 해석서들 중에서 “與”와 “猶”를 의성어 내지 의태어로 해석한 주해서는 없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이 해석은 무척 어줍잖은 아마추어의 소산에 불과하겠다. 그러나 사뭇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與”와 “猶”가 대표적인 표음부호라는 사실에 바탕하고 있으며, 옛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 가졌던 외경심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경의 판본을 비교해 보면 설득력이 더 높아진다:


백서본 與呵 其若冬涉水 猷呵 其若畏四鄰
곽점본 夜乎 奴冬涉川 猷乎 其奴畏四鄰
왕필본 豫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다산본 與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다산본’이라는 판본명은 임의적인 것으로 다산이 당호를 지을 때 참조한 도덕경 유통본을 말한다. 위 텍스트는 “이곳”을 참조하여 구성했다. 국내에서 위 세 판본을 비교하고 있는 것으로는 이석명의 «백서 노자»(청계 2003)가 유일한 듯하다.)


백서본과 곽점본은 이십 세기에 발굴된 판본이므로, 다산 생존시에는 오직 왕필본만 유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산이 참조한 도덕경 판본은 예로부터 유통되었던 왕필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로되 ‘豫’ 자와 ‘與’ 자가 상이한 판본이었나 보다. 사실 이 두 글자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주 통용되었던 점을 고려하여, 주석자들은 고대로부터 ‘豫’와 ‘與’가 서로 통용되었다는 비평을 한다. 맞긴 맞는 비평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豫’와 ‘與’가 의미상으로가 아니라 음운상으로 통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與’, 夜’, ‘豫’라는 의미가 상이한 글자들이 음운상으로 통용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본문의 동일한 자리에 서로 통용하는 글자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발음 ‘여’, ‘야’, ‘예’ 등은 음운상으로 통용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猷’와 ‘猶’ 역시 표음부호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문에서는 이처럼 비슷한 음운을 모아 소리를 흉내낸 글자를 두고 연면자(聯綿字)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휘휘”, “출렁출렁”처럼 첩어를 통하여 의성어 내지 의태어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첩어를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거센 물줄기 소리’를 담은 글자가 후대에 들어서 그 원뜻에서 벗어나 ‘거센 물줄기 앞에서 겁을 내고 주저하는 모양새’로 의미가 전이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자연으로부터 시작된 글자가 인간화, 추상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르러 ‘豫’, ‘與’, ‘猷’, ‘猶’를 하나같이 ‘머뭇거리다’, ‘주춤거리다’, ‘망설이다’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 근거하여 마침내 자전에 글자의 의미가 등재된다. 이것이 최후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원뜻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오늘날 도덕경 15장을 해석하는 작업은 바로 이 최후의 단계에서 벌어지는 작업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은 ‘豫’, ‘與’, ‘猷’, ‘猶’와 같은 글자들이 어느 정도나 추상화된 단계에서 쓰여진 경전일까? 아니면 추상화되기 이전의 의성어 내지 의태어 단계에서 쓰여진 것인가? 이와 관련한 논의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일 텐데, 내 짐작으로는, 도덕경은 각종 소리글자들이 추상화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 다산은 과연 도덕경 15장의 “與”와 “猶”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여유당” 당호로 채택한 글자인 만큼 “與”와 “猶”에 대하여 분명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산의 명확한 풀이는 보이지 않으며,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고 넘어간 듯하다. 특히 그가 이 구절을 두고 부언한 구절을 읽어보면 “與”와 “猶”를 의성어로 보지 않았던 것같다. 그렇다면 다산은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의 구절을 “머뭇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주춤거림이여!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다산이 의도했던 여유당 당호의 뜻은 “머뭇거리고 주춤거림”, 혹은 “머뭇거리고 망설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박무영 번역의 «뜬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한 마디. 그는 <여유당기>의 마지막 문장을 “이것을 내 집에 현판으로 붙이려다 생각해 보고는 또한 그만두었다. 초천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문설주에 써 붙이고, 이렇게 이름 붙인 까닭을 아울러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문설주”는 부적절한 번역어이다. “문설주”가 아니라 “상인방”이나 “문미”[楣]로 번역해야 한다. 아마도 그가 양수리의 다산생가를 방문하여 “여유당” 당호가 어디에 걸려 있는가를 눈여겨 보았거나 일반적으로 당호가 어디에 걸리는가를 조사하기만 했더라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성의 결핍도 책만 읽는 후대 서생들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삼협의 풍경 중의 하나. 염여퇴는 이 삼협의 초입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염여퇴와 관련한 최신 정보 하나. 중국정부는 이 염여퇴가 뱃길에 위험한 요소라 하여 1950년대에 폭파해 버렸다고 한다. (웹 상의 정보여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사실이라면) 음, 이제 염여퇴는 완벽하게 문헌에만 존재하는 유적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런 정도라면 그럭저럭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얼마 전 지상 최대의 양쯔강 싼샤(삼협) 댐 건설로 인하여 삼협 내외의 유명한 유적들(무려 천여 곳을 상회하는 유적들)이 대거 수몰되기에 이른 것은 몹시 안타깝다. «중국문화답사기»를 쓴 위치우위가 그 유명한 삼협의 협곡들을 지나가면서, 바깥 풍광을 구경하지 않고 선실에서 조용함을 즐기던 이들을 상찬한 것도, 또 “역사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산천도 이곳에서 뒤로 물러나며, 시인 역시 이곳에서 빛을 잃는다”(107)고 말한 것도, 바로 이 싼샤 댐 건설로 인하여 허다한 유적들이 수몰되는 데 따른 좌절감의 우회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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