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휘대에 처음 나타나던 바로 그 순간 빈을 정복했다. 청중에 대한 그의 지배는 마지막까지 깨지지 않았다."(64) — 브루노 발터가 빈 오페라단의 지휘대에 오른 구스타프 말러를 두고 평한 말이다.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이고 독재적이었던 지휘자 말러가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빈의 청중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작곡가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작곡가의 "작품을 완벽하고 명료하고 남김없이 드러내는 공연"(131)을 위해 악단에게 "절대적인 엄밀성"을 요구했으며, "악보에 대해 광적으로 충실"(126)했다. 그래서 "그의 연주에서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인 수정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129)



"구스타프 말러, 천상과 지옥의 두 얼굴"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그 예술가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해석의 명료함이란 있을 수 없다. 이 명료함은 한낮의 이성적인 명료함이 아니라, 어둠 속의 파도소리를 맑고 뚜렷하게 한 점의 의혹도 없이 들을 수 있는 명료함이다.

말러의 탁월한 해석을 지배하는 것은 '명료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낮과 같은 명료함은 아닙니다. 음악은 한낮의 예술은 아니지요. 그늘 없는 영혼에게는 음악이 비밀스런 뿌리나 궁극적인 깊이를 내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어둠 속에서 이해되고 느껴져야 합니다. 그것은 지중해의 청량한 푸른색이 아니라 대양의 어둠침침한 한숨 소리를 닮았습니다. 말러의 영혼에는 어둠이 파도치고 있습니다. 그의 눈은 밤에 익숙해져 있으며 음악의 깊이를 인식하기 위해 태어난 눈입니다.(129-130)

어느 작곡가의 작품을 통하여 대양처럼 망망한 어둠이 파도치는 소리, 그 장면, 그것을 명료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지휘자는 그 작곡가의 악보나 지시사항에 최대한 복종하는 가운데 작품을 해석할 수 있다. 말러에게는 특히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악보가 신성불가침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두 작곡가의 내면을 명료하게 파악했던 것일까? 과연 말러의 음악에는 모차르트적인 아름다움과 바그너적인 고통, "천상과 지옥의 두 얼굴"(13)이 혼재해 있다. 거장들의 내면을 이해했다는 것은 관습적인 수준의 감정들, 의지들, 신앙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높은 위치에서는 격렬한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감정들마저 극히 섬세하게 장악할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정 교향곡>(Symphonia Domestica)의 공연이 기억납니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격렬한 폭풍우와 그런 폭풍의 고삐를 풀어놓은 지휘자의 고요한 자세가 너무 대조적이어서 으스스할 정도였습니다.(132)

감정의 극한, 의지의 극한, 아름다움의 극한, 고통의 극한은 다름아닌 죽음이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언제나 죽음의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그 까닭은 죽음이 여타의 감정과 여타의 의지와 여타의 아름다움을 단번에 소멸시킬 수 있는 최대치의 감정, 최대치의 의지, 최대치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최대치의 자리에서 창조성이 나타난다. "거장들의 작품이 영원성을 가지는 이유는 거기 들어 있는 창조적 힘과 감정의 깊이와 또 무엇보다도 아름다움 때문"(177)이다.
 

사실 죽음 앞에서는 죽음 이외의 모든 것이 모두 피상적이므로, 그 죽음을 정면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이 드러나야 한다. 물론 앤디 워홀처럼 피상성을 인간 삶의 본질로 규정하는 예술가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들은 창조성을 위해 피상성을 최대치로 걷어내는 작업을 한다. 인간의 도덕, 인간의 제도, 인간의 종교마저 피상성으로 간주하는 예술가는 그래서 피상성의 끝인 죽음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모차르트도 "죽음의 영상은 저한테는 더 이상 섬뜩한 모습을 전혀 띠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대단히 아늑하고 위안이 되는 것"(1787.4.4,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이라고 했다. 이 죽음은 예술적 창조를 위한 죽음, 곧 나라는 존재의 죽음, 새로운 나의 탄생이다. 나라는 존재의 죽음과 탄생은 작품을 해석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그는 열정적인 연주에 몰두하여 자기를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넘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들어가며, 그런 상태에서 가장 강렬한 의미를 얻습니다. 그와 같은 황홀경 속에서 느슨해진 개인적 속박을 초월하며 타자의 재현이 공동의 창작, 거의 '나'의 창작이 됩니다. [...] '타자'가 흘러넘치는 마음과 상상력은 일종의 혼연일체를 만들어냅니다. 창조자와 재현자 사이에 놓인 장벽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지휘자는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말러는 설사 공감이 가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작곡가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진실할 연주를 하곤 했습니다.(131)

이렇듯, 브루노 발터가 "말러 사망 25주년 기념일을 맞아" 말러를 회상하며 "감정이 한껏 북받쳐 오른 채 써내려간"(13)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마티 2005, 김병화 옮김)은 천재에 대한 천재의 보고서, 브루노 발터가 그린 말러의 초상이다. 말러는 발터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며, 발터는 말러로부터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짧은 글에서 그 어떤 학자의 책에서보다도 훨씬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예술, 예술가, 창작, 연주, 해석 등에 관한 무수한 영감을.

그러나 브루노 발터는 말러와는 달리 온화한 지휘자였고 종교적인 가르침에 충실했다. 브루노 발터가 "여러 해 뒤, 내 영혼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거치면서 그[말러]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던 시기"(34)는 바로 그 성향의 차이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에 일생동안 충실했던 듯한 발터는 그 성향상 감정이라는 요소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도덕적인 가르침은 거의 예외없이, 니체의 표현을 빌면, "좀더 온화하고 좀더 인간에게 친밀한 사상들"과 감정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음악에 들어 있는 감정이라는 요소와 극적이고 시적인 표현의 측면을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고, 절대적인 정확성을 희생하더라도 한 작품의 정신적 내용을 충분히 표현하는 태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더욱 유익했습니다. 즉 작품의 전체적인 활력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정확성을 희생시키려는 성향이 내게 있었던 것이지요.(35-36)

바로 이것이 내가 이십대 시절부터 삼십대 전반까지 그토록 브루노 발터에 열광했으면서도 이제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된 원인일 것이다. 브루노 발터의 지휘는 낭만적이고 서정적이다. 그의 해석은 인간들의 황혼처럼 아름답지만, 지금의 나는 그 온화하게 채색된 황혼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그러나 말러의 음악은, 브루노 발터가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언급하면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음악이다. 이 작품은 열정적이고 거칠고 영웅적이고 충일하고 불꽃같고, 엄숙하고 부드럽게 감정의 모든 범위를 망라하고 있지만 '오로지' 음악일 뿐"(167)이다. 혹은 말러 자신의 말처럼, "이 교향곡은 열정적이고 거칠고 비극적이고 엄숙하며 인간의 모든 감정으로 가득하지만, 단지 음악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질문의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교향곡 5번에 대한 해설은 이채훈의 "말러 교향곡 5번에 나의 삶을 투영한다"를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교향곡 5번을 두고 "싸늘한 오후의 햇살"이라고 평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감각이다.)

위와 같은 말러 교향곡 5번에 대한 서술은 다른 거장들의 음악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거장들의 작품은 거장들의 내면에서 비롯한 것이며, 거장들의 내면은 관습적인 감정이나 도덕이나 형이상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대한 작품은 관습적인 감정들과 도덕적인 가르침들의 뿌리를 건드리며, 사람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을 피상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해석자의 정신세계에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가르침이 우위에 서면 위대한 작품은 필연적으로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채색되고 만다. 온화한 사상이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예술가들의 해석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해석 논쟁은 다름아닌 서로 상이한 정신성 간의 피할 수 없는 싸움, 명운을 건 싸움이다. 해석의 마당에서도 이러할진대, 작품의 창조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치명적인 차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함부르크 시절 말러의 작업실에는 티치아노(혹은 조르조네)의 <콘체르토> 복제품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돌린 수도사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과는 무관하게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의 수도사는 흡사 "나는 이 공간의 사람이 아니다", "이 음악은 이 시간, 이 시대의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의 주위에는 아름다운 옷을 걸친 남자와 여자가 있다. 비올라를 든 남자(음악가? 진정한 음악가는 그가 아니다)는 마치 권력자처럼 수도사를 제어하려는 자세이다. 여자는 감상자에게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감상자를 꿰뚫어봄으로써 그 욕망에 불과한 아름다움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수도사는 (감상자, 여타 음악가들을 포함한) 인간들의 온갖 감정과 욕망과 권력이 난무하는 공간에서 그것들의 뿌리를 확인한 음악가이다. 이 수도사, 이 진정한 음악가는 멀리 내다보고 "나의 시대는 앞으로 올 것이다"(14)라고 누누히 말했던 말러이며, 욕망과 권력의 아우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이 아우성을 여실히 드러내려면 예술가는 이 아우성 위에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음악일 뿐"이라고 말하는 말러 자신이다. 이런 말러를 위해서는 고전주의의 전아한 세계와 낭만주의의 무한한 상상력이 필수적이다.

말러 작품의 근본은 그가 진정한 음악가라는 단순한 사실에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천성적으로 낭만주의자였습니다. <탄식의 노래>와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보십시오. 그러나 후반의 발전과정을 보면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적 요소 사이의 갈등 및 혼합이 나타납니다.

고전주의적 요소란 그에게서 솟구쳐 나온 음악에게 형식을 부여하고 그의 웅건한 힘과 상상력과 감수성을 통제하고 통달하려는 결단입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낭만적 요소란 과감하고 제약 없는 상상력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즉 그의 '야행적' 성격, 표현의 과잉으로 치달아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적이거나 그 밖의 다른 이념들을 그의 음악적 상상력 속으로 뒤섞어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상상력은 소용돌이 같은 음악의 내면세계이며 감동 넘치는 박애주의이며, 시적인 상상력과 철학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감정이었습니다.(136-137)

"감동적인 박애주의"와 "종교적인 감정", 이 두 마디에서 브루노 발터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종교적인 감정을 여타 감정들이 소멸할 때 다가오는 신비한 감정으로 보는 것은 탁월한 해석이지만, 그것을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에서 비롯한 감정과 동일시하게 되면 거장의 작품은 온화한 색채를 입고 타락하게 된다. 말러는 에누리없이 첫번째 해석의 지지자였을텐데, 브루노 발터는 어느 쪽이었을까? 그는 두 해석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을까?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 사랑에도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고 죽음에도 여러 종류의 죽음이 있다. 우리는 섣불리 우리의 사랑과 죽음을 거장들의 그것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사랑과 죽음은 "천상과 지옥"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영역 밖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천상과 지옥에 존경을 표해야 마땅하다. 그들에겐 천상도 아름답고 지옥도 아름답다.

말러는 1896년에 한 음악잡지의 편집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단지 꽃과 새, 숲의 향기 등을 염두에 두는 것은 제가 보기에 좀 이상합니다. 위대한 디오니소스, 판 신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203)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part 1), Claudio Abbado, Lucerne Festival Orchestra 2004.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part 2), Claudio Abbado, Lucerne Festival Orchestr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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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는 워낙에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인의 관심을 덜 받는 화가에 속할 것이다. 나 역시 김홍도의 만년 작품들을 보기 전까지는 풍속화 정도만 보았던 문외한이었다. 더구나 전공이 서양인문학이었던 데다가 관심마저 서양의 문화에 경도되어 있어서 우리나라 옛 미술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서양의 학문과 문화와 정신에 한계를 느꼈고 그 전환기의 시점에 우리나라 곳곳의 문화유적지를 찾아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장 동양문화에 심취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제는 급기야 서양의 문화, 정신, 미술에 대하여 시큰둥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이 모르는 분야로 접어들 때에는 처음 한동안은 헤매기 마련인데 복되게도 미술도록을 대거 소장한 아내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고미술 분야의 중요 도록들을 대략이나마 훑어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김홍도의 만년 작품들도 결혼 이후에 비로소 접했던 것이니, 처음 보았을 때 과연 이게 김홍도의 그림이란 말인가 하고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그림들에 크게 감동한 나는 만년 작품들 중의 하나인 소림명월도를 오려 내 블로그의 이미지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들에 등장하는 김홍도 특유의 나무들을 보고서 나는 그것들이 우리나라 산야에서 전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곳곳을 답사하고 다닐 때도 그런 나무들은 쉽사리 목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한 때 시골에서 비산비야의 풍경과 함께 11월, 그리고 2월을 보내면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삼한사온의 날씨에서 사온의 날에, 따스한 햇빛과 맑은 바람이 있는 가을/겨울, 겨울/봄 어느 날에, 산야의 곳곳에 김홍도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나무들은 평상시에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따스한 초겨울 날씨의 비산비야, 어느 호젓한 곳에서 문득 우수수 드러나는 풍경이었다. 그 처처의 풍경을 목도한 이후로 11월과 2월의 비산비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절과 장소가 되고 말았다. 확실히 김홍도는 겨울로 접어들거나 겨울에서 빠져나오는 시절의 허름한 산야를 좋아했던 듯하다. 그것은 냉엄한 정신적 풍경도 아니고 춘설의 끼긋한 꽃도 아니다. 꽃이 있어도 그 허름한 잎사귀와 나뭇가지에 숨어 있을 뿐이다. 봄날의 무르익은 감정이나 여름날의 무성한 풍요, 가을날의 화려함, 겨울날의 차가움 등등의 직설적인 언어들은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홍도가 만년에 그린 <병진년화첩>에 실려 있는 “소림명월도” 역시 틀림없이 11월이나 2월 어느 날의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쓸쓸하거나 처연하지 않다. 나무의 메마른 잎들은 까칠하지 않고 부드럽다. 나목의 나뭇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를 때면 보통은 겨울 찬바람에 스산하기 마련인데, 이 그림은 그런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조선시대에 적적함의 대표적 정서였던 <추성부>도 김홍도가 그림으로 옮겨놓으면 어쩐지 쓸쓸하지 않다. 이게 다 그 나무들 탓이런가?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수묵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병진년화첩>은 김홍도가 52세 원숙기에 그린 화첩이다. 그는 육십을 갓 넘어서 타계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만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첩은 전체 20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여지없이 11월과 2월의 나무들이 등장하는데, 그 나무들은 이제 보편적 조형을 획득한 듯 시절을 불문하고 여러 그림에서 그 허름한 골간을 은연히 드러내고 있다. 늙어서 되돌아보는 생의 풍요로움은 결국은 다 스러지는 것들이 아닌던가? 결국은 스러지고 남는 것이 아름답고 정겨운 것이 아니던가? 이제, 살아 있는 두두물물마다 그 나무들이 아스라히 서 있음을 들여다 볼진저!
 

<병진년화첩>보다는 <단원절세보첩>(檀園折世寶帖)이라는 명칭이 정당하다고 구체적으로 논했던 이는 오주석이다. ‘병진년’이라는 말이 제작시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지칭하는 바가 없으므로, ‘절세(絶世)의 보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 ‘단원절세보’라는 명칭이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칭은 김홍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한지가 쓴 것이므로 본래의 화첩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원절세보’가 단원 스스로가 부여한 명칭이 아니고 유한지의 해석이 들어간 명칭이라면 두루 통용되는 ‘병진년화첩’을 굳이 버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의미를 던져주는 명칭, 해석을 가하는 명칭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절세(絶世)라는 말은 그 의미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나는 비교적 덜 해석적인, 그러니까 각자의 해석권으로 덜 끌려들어간 ‘병진년화첩’이라는 명칭이 좋다. 물론 이 명칭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주석은 이 명칭을 작품 제목으로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건조하다고 평했으나, ‘병진년’이 원숙기의 김홍도를 가리키는 만큼 나로서는 명칭의 정당성과는 별도로 그 어떤 해석보다는 깊은 울림을 준다. 생이라는 것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는 한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 모름지기 누군가의 만년은 귀하게 여길 일이다. 하물며 김홍도의 만년임에랴.

‘折世’라는 말이 오주석의 조심스러운 추정대로 ‘絶世’를 뜻하는지도 의문이다. 혹시 ‘折世’가 ‘급작스레 세상을 뜨다’는 의미는 아닐까? 그러니까 ‘夭折’과 ‘逝世’를 합한 의미가 아닐까? 유한지는 단원의 죽음을 황망하고도 애석하게 받아들였고 그의 죽음 이후 이 화첩을 완상하게 된 까닭에 ‘折世寶’라는 이름을 붙히지는 않았을까? 이를테면 유묵첩(遺墨帖)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려 부른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김홍도 평전은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열화당, 1998)가 가장 자세하다. 이 평전은 오주석이 호암미술관 객원연구원 소속으로 1995년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에 관여하면서 도록과 더불어 논고집 형식으로 간행되었던 것을 저본으로 하여 1998년 열화당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리고 오주석의 타계 이후 2006년 솔출판사에서 판형을 키워서 재출간했다. 열화당판의 몇 가지 오류를 수정했다고 한다.

오주석의 <단원 김홍도>가 아직 글솜씨가 무르익지 않은 소장 시절의 글이라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솔출판사 1999, 2005(2)),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솔출판사 2006)는 완숙기에 접어들면서 작성한 글들이다. 그는 김홍도의 그림을 사랑하고 경모했던 만큼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는 김홍도 그림을 소개하는 글이 여러 편 있다. 그의 글들은 감동적이고 완미하다. 아울러,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2>(돌베개 1998)에는 오주석이 쓴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단원절세보첩>을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만큼 독자들은 이 글에서 화첩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책들이 김홍도에 관한 글을 싣고 있거나 김홍도를 전면적으로 다룬 책이므로 반복되는 내용이 없잖아 있으나, 오주석의 짧은 생애를 추모하며 대하노라면 반복적인 내용조차도 아끼면서 읽게 된다.

도록으로는 앞서 말한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삼성문화재단)이 271 개의 도판과 작품해제를 싣고 있어 으뜸이다. 그 다음으로 199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펴낸 <단원 김홍도>(통천문화사)를 꼽을 수 있는데 판형이 앞의 책보다 크고 화질이 좋아 자세히 살피기엔 최적이지만 도판이 많지 않은 것이 흠이다.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이 함께 협력하여 연 것이기에 앞으로 이때보다 더 나은 도록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애석하게도 두 도록 모두 현재로서는 구입할 수가 없다. 하나는 비매품이고 하나는 품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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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 <단원 김홍도>는 열화당판(1998)과 솔출판사판(2006) 두 종이 있다. 그리고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의 1999년 초판은, 주제로 삼고 있는 그림들을 책 말미에 도판으로 싣고 있다. 제본상태가 좋지 않아 도판들이 책에서 떨어지는 흠은 있어도 화질만큼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고 격조가 있다. 도판 그대로 표구를 해도 좋을 정도이다.

솔출판사는 2005년에 재판을 찍으면서 제목을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로 고치고 도판을 다시 인쇄했다고 하는데, 화질이 초판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이다. 판형이 같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로 유추해서 판단하건대,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은 그림의 도판을 별도로 첨부하지 않고 내용 가운데 삽입한 듯하다. 그런데 종이질 때문인지 뭔지 하여튼 도판의 운치와 격이 훨씬 떨어지는 느낌이다. 책 편집도 난삽한 편이다. 다음에 새로운 판을 찍는다면 부디 도판인쇄와 편집, 판형 등 모든 면에서 1999년판으로 되돌렸으면 한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는 그의 유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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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71203 나목 裸木
    from 木筆 2007-12-04 14:04 
    김홍도, <병진년화첩> 중 “소림명월도”, 1796년, 종이·수묵담채 26.7×31.6cm, 호암미술관 소장 땀을 내주지 않으니 몸이 답답해한다. 찬바람이 불긴 하였지만, 퇴그 ㄴ 뒤, 챙겨 오밀조밀 달음질로 한바퀴 천천히 음미하며 내달렸다. 이내 몸은 더워져 봄같은 마음이다. 한결 후련하다. 10K 몸을 좀 가볍게 할 요량이다. 마음을 조금 되바라지게 먹을 생각이기도 하지만, 무거워지고 둔해지니 맘도 몸도 불편하다. 
 
 
2007-11-24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4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산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은 다산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래서 해당하는 도덕경 구절을 참조하면 당호의 의미가 쉽게 도출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지만, 정작 도덕경 구절 자체가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름아닌 여유당의 ‘與’와 ‘猶’ 두 글자의 해석이 어려운 것이다. 글자의 기본 뜻으로만 본다면 ‘더불다’와 ‘오히려’를 나타내지만, 도덕경의 문맥에서도 이러한 뜻은 전혀 아니거니와 여유당 당호에서도 역시 아니다. 그래서 이를 최대한 문맥상 어그러지지 않는 방향으로 번역하고 넘어가는데, 가령 박석무·정해렴이 편역한 «다산문학선집»(현대실학사 1996)에서 “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101)로 옮기고는 “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이름이며 猶는 겁이 많은 동물의 일종이다”(102)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박무영이 옮긴 «뜬세상의 아름다움»(태학사 2002)에서는 “망설이기를[與]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겁내기를[猶]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87)로 옮기고 있다. 박무영의 번역은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평행하는 의미로 보아 “與”와 “猶”를 자전에도 없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사실 박석무 번역은 역사적으로 전고를 갖고 있으며, 박무영 번역은 의미가 중복되기는 하지만 가장 조심스러운 해석이다. 더구나 두 번역자가 여유당 당호와 관련이 있는 도덕경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관련 주해서들을 참조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실제로, “與兮若冬涉川猶兮若畏四隣”와 관련하여 도덕경 해석서들을 들춰본 결과 이 두 방향에서 어긋난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 해석서들과 다산산문 번역자들이 “與”와 “猶”, 혹은 “與猶”에 관하여 제대로 해석한 것일까?
 

다산의 <여유당기>를 읽을 때도 그랬고 도덕경을 읽을 때도 그랬고 나는 “與猶”의 풀이가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전공자도 아닌 내가 이를 파고들 만한 역량이 되지 못하여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년에 鮑善淳의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심경호 번역, 이회문화사 1992)를 읽다가 “與猶”를 풀 수 있는 단서를 만났다. 그 요지를 말하자면, 왕인지의 “소리에서 구하면 제 뜻을 파악하게 되지만 글자 자체에서 뜻을 구하려 하면 잘못된다”(上求諸其聲則得, 求提其字則惑)는 가르침이다.

한자는 표의문자인데다 경전을 읽는 서생들은 글자의 뜻과 의미에 치중하는 경향이 심하여 표음부호(의성어 내지 의태어)로서의 한자어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따르면, 이러한 오해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猶豫”(유예)이다. 가령, 북제의 안지추는 “猶”를 개[犬]로 풀이하고 “豫”를 개가 미리 앞서가서 기다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당나라의 공영달은 “猶”를 원숭이로, “豫”를 일종의 코끼리로 풀이하면서 두 짐승 모두 의심이 많다고 하였다. 안사고는 “猶”를 나무를 잘 타는 의심 많은 짐승으로, “豫”를 이 짐승의 우유부단함으로 풀이했다. 이런 식의 풀이는 일부 도덕경 해설서에서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풀이는 이음절의 표음부호인 “猶豫”를 분해하여 억지로 뜻풀이를 한, 엉뚱한 상상의 결과물이다. 고서에서는 “猶豫”와 통용하는 표현으로 猶預(유예), 由豫(유예), 由與(유여), 猶予(유여), 宂豫(용예), 優與(우여), 猶與(유여), 容與(용여), 游移(유이), 夷猶(이유) 등등이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다 “猶豫”가 표음부호였던 탓에 가능한 일이다.

“猶豫”에 상응하는 여러 표현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灩澦堆”(염여퇴)의 “灩澦”(염여)를 들 수 있다. 잘 알다시피, “灩澦堆”는 장강 삼협에 위치한 수중 암초로서 겨울에는 물 위로 드러났다가 물이 불어난 여름에는 물 속에 잠기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수많은 배가 좌초되었다. 협곡으로 들면 해와 달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양안의 암벽들, 위험한 급류 속의 수중 암초, 그리고 어두운 벼랑 꼭대기에서 들리는 구슬픈 원숭이 울음소리는 수많은 시인들의 심회를 건드리기에 충분했기에, 이백도 두보도 백거이도 그밖의 수많은 시인들도 관련 시를 남겼다. 이 “灩澦堆”는 “淫預堆”(음예퇴), “猶豫堆”(유예퇴)로 불리기도 했던 바, 이러한 대체가 가능했던 것 역시 “灩澦”가 의성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길밖에 없다. 요컨대, “유예”, “유여”, “염여” 등등은 급류가 암초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의 의성어, 혹은 급류가 암초 때문에 소용돌이처럼 휘돌거나 몰아치는 모양새의 의태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그 소리나 모양새를 “위 위”(yu yu) 하는 음으로 듣고 그 음에 가까운 문자를 써서 표기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우우”, “워워”, “휘휘” “구구”, “과과”, “콰콰”, “쏴쏴”, “출렁출렁” 하는 음으로 표기했을 것이다.

급류가 수중 암초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의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 바로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이 그렇다. 가장 빠를 때에는 유속이 시속 40킬로미터에 이르는데, 그때에는 급류가 수중 암초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우 쏴쏴” 하고 20리 밖까지 들린다고 한다. 그래서 돌이 우는 곳이라 하여 “울돌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혹시 “강강술래”라는 받는소리도 이 “과과 쏴쏴” 하는 바다의 울음소리에서 온 것이 아닐까? 어쨌든) “염여퇴”를 우리 식으로 번안하자면 “울돌”이 제격이겠다. 이처럼 글자의 의미에서 뜻을 구하지 않고 소리에서 뜻을 구하면 쉽게 풀이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고서의 의성어와 그에 대한 오해의 역사를 살펴보건대, 후대의 서생들은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 해독에 집착하는 관성 때문에 음운현상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경전이 쓰여질 당시의 사람들이 당시의 관행적인 의성어나 의태어 표현에 대하여 누구나 익히 알고 있기에 별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서슴없이 활용했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지당한 상식을 놓치면, “灩澦”(염여)를 두고 “소용돌이 물결이 돌 위를 내리칠 때 생기는 물안개가 마치 흩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 같다고 해서 붙혀진 이름”(임어당, «쾌활한 천재» 80면)이라는 다소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해설은 현대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고대시대부터 횡행했던 유서 있는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다산생가의 여유당 당호. 조심스러운 모범생 스타일의 평소 서체에 비해 힘찬 활력과 기세가 느껴진다.
이제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으로 되돌아가자. 우선 “與”와 “猶”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이 구절을 번역하면, “與로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猶로다!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가 된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급류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의 표음부호로 “猶”, “豫”, “與”를 주로 썼던 바, 이 문자들을 (우리말의 “우우”, “쏴쏴”처럼 ) 첩어로 만들어 소리의 지속을 모방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앞서 예로 들었던 다양한 표현들이 출현했다.

그런데 도덕경에서는 첩어를 각기 떼어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猶與”나 “與猶”라는 첩어를 쓰는 대신, “與兮”, “猶兮”로 따로 떼어놓고 있다. 이를 형식과 의미에 알맞게 번역하자면, “휘이!”, “휘이!”나 “출렁거림이여!”, “출렁거림이여!” 쯤 되겠다. 그러면 이 구절은 “출렁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출렁거림이여!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번역하는 편도 고려해 볼 만하다. 결국 이 구절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급류와 암초 앞에서 두려워하고 극도로 조심하는 모양새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정이며, 틀릴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도덕경 해석서들 중에서 “與”와 “猶”를 의성어 내지 의태어로 해석한 주해서는 없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이 해석은 무척 어줍잖은 아마추어의 소산에 불과하겠다. 그러나 사뭇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與”와 “猶”가 대표적인 표음부호라는 사실에 바탕하고 있으며, 옛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 가졌던 외경심을 복원시킬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경의 판본을 비교해 보면 설득력이 더 높아진다:


백서본 與呵 其若冬涉水 猷呵 其若畏四鄰
곽점본 夜乎 奴冬涉川 猷乎 其奴畏四鄰
왕필본 豫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다산본 與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隣

(’다산본’이라는 판본명은 임의적인 것으로 다산이 당호를 지을 때 참조한 도덕경 유통본을 말한다. 위 텍스트는 “이곳”을 참조하여 구성했다. 국내에서 위 세 판본을 비교하고 있는 것으로는 이석명의 «백서 노자»(청계 2003)가 유일한 듯하다.)


백서본과 곽점본은 이십 세기에 발굴된 판본이므로, 다산 생존시에는 오직 왕필본만 유통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산이 참조한 도덕경 판본은 예로부터 유통되었던 왕필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로되 ‘豫’ 자와 ‘與’ 자가 상이한 판본이었나 보다. 사실 이 두 글자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자주 통용되었던 점을 고려하여, 주석자들은 고대로부터 ‘豫’와 ‘與’가 서로 통용되었다는 비평을 한다. 맞긴 맞는 비평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豫’와 ‘與’가 의미상으로가 아니라 음운상으로 통용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與’, 夜’, ‘豫’라는 의미가 상이한 글자들이 음운상으로 통용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본문의 동일한 자리에 서로 통용하는 글자로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발음 ‘여’, ‘야’, ‘예’ 등은 음운상으로 통용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猷’와 ‘猶’ 역시 표음부호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문에서는 이처럼 비슷한 음운을 모아 소리를 흉내낸 글자를 두고 연면자(聯綿字)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휘휘”, “출렁출렁”처럼 첩어를 통하여 의성어 내지 의태어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첩어를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거센 물줄기 소리’를 담은 글자가 후대에 들어서 그 원뜻에서 벗어나 ‘거센 물줄기 앞에서 겁을 내고 주저하는 모양새’로 의미가 전이되었을 것이다. 원래는 자연으로부터 시작된 글자가 인간화, 추상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르러 ‘豫’, ‘與’, ‘猷’, ‘猶’를 하나같이 ‘머뭇거리다’, ‘주춤거리다’, ‘망설이다’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에 근거하여 마침내 자전에 글자의 의미가 등재된다. 이것이 최후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원뜻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오늘날 도덕경 15장을 해석하는 작업은 바로 이 최후의 단계에서 벌어지는 작업이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도덕경은 ‘豫’, ‘與’, ‘猷’, ‘猶’와 같은 글자들이 어느 정도나 추상화된 단계에서 쓰여진 경전일까? 아니면 추상화되기 이전의 의성어 내지 의태어 단계에서 쓰여진 것인가? 이와 관련한 논의도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일 텐데, 내 짐작으로는, 도덕경은 각종 소리글자들이 추상화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닐까 한다.
 

결론적으로 갖게 되는 의문. 다산은 과연 도덕경 15장의 “與”와 “猶”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여유당” 당호로 채택한 글자인 만큼 “與”와 “猶”에 대하여 분명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산의 명확한 풀이는 보이지 않으며, “與”와 “冬涉川”, “猶”와 “畏四隣”를 각기 동일한 의미로 간주하고 넘어간 듯하다. 특히 그가 이 구절을 두고 부언한 구절을 읽어보면 “與”와 “猶”를 의성어로 보지 않았던 것같다. 그렇다면 다산은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의 구절을 “머뭇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주춤거림이여!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읽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다산이 의도했던 여유당 당호의 뜻은 “머뭇거리고 주춤거림”, 혹은 “머뭇거리고 망설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박무영 번역의 «뜬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한 마디. 그는 <여유당기>의 마지막 문장을 “이것을 내 집에 현판으로 붙이려다 생각해 보고는 또한 그만두었다. 초천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문설주에 써 붙이고, 이렇게 이름 붙인 까닭을 아울러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인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문설주”는 부적절한 번역어이다. “문설주”가 아니라 “상인방”이나 “문미”[楣]로 번역해야 한다. 아마도 그가 양수리의 다산생가를 방문하여 “여유당” 당호가 어디에 걸려 있는가를 눈여겨 보았거나 일반적으로 당호가 어디에 걸리는가를 조사하기만 했더라도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성의 결핍도 책만 읽는 후대 서생들의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삼협의 풍경 중의 하나. 염여퇴는 이 삼협의 초입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염여퇴와 관련한 최신 정보 하나. 중국정부는 이 염여퇴가 뱃길에 위험한 요소라 하여 1950년대에 폭파해 버렸다고 한다. (웹 상의 정보여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사실이라면) 음, 이제 염여퇴는 완벽하게 문헌에만 존재하는 유적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런 정도라면 그럭저럭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얼마 전 지상 최대의 양쯔강 싼샤(삼협) 댐 건설로 인하여 삼협 내외의 유명한 유적들(무려 천여 곳을 상회하는 유적들)이 대거 수몰되기에 이른 것은 몹시 안타깝다. «중국문화답사기»를 쓴 위치우위가 그 유명한 삼협의 협곡들을 지나가면서, 바깥 풍광을 구경하지 않고 선실에서 조용함을 즐기던 이들을 상찬한 것도, 또 “역사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산천도 이곳에서 뒤로 물러나며, 시인 역시 이곳에서 빛을 잃는다”(107)고 말한 것도, 바로 이 싼샤 댐 건설로 인하여 허다한 유적들이 수몰되는 데 따른 좌절감의 우회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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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이 이런저런 상념들을 풀어놓은 이 글을 읽기 전에 관련 연보를 잠깐 확인해 두자:

1875년 비제, <카르멘> 초연 석달 뒤 사망
1878년 바그너와 니체의 최종적 단절
1881년 니체, <카르멘>을 처음 봄. 닷새 뒤 두번째 봄
1883년 바그너 사망
1888년 니체, «바그너의 경우» 저술
1888년 니체가 편지 형식으로 쓴 «바그너의 경우»는 “나는 어제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비제의 걸작은 오페라 <카르멘>을 가리킨다. 오늘날에야 오디오에 시디를 집어넣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니 오페라를 스무 번째 들었다는 게 별다른 이야기거리가 아니겠지만, 당시에 스무 번째 오페라를 들었다는 것은 곧 스무 번째 오페라극장을 드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니체는 1881년에 <카르멘>을 처음 들었으니, 그 이후 일년에 두어 번은 꼬박꼬박 <카르멘>을 듣기 위하여 오페라극장을 방문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의 의문문은 바로 이러한 있을 성싶지 않은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담고 있다. 또 제아무리 바그너리안이라해도 바그너의 어느 한 음악극을 스무 번이나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니, «바그너의 경우»의 첫 문장은 바그너리안을 도발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청년 니체는 바그너리안이었고 베토벤 예찬자였다. 그러나 청년이 아닌 니체는 비제를 열렬히 예찬했고 모차르트의 “황금의 심각함”, “명랑함”을 좋아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대한 언급은 단편적이기 때문에 “니체의 모차르트 예찬”이라는 표현은 쓰기가 힘든 반면, “니체의 비제 예찬”이라는 표현은 충분히 정당하다. 사실 니체가 비제의 음악을 두고 한 예찬 내용은 대부분 모차르트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가 미학의 제일 원칙으로 내세운, “선한 것은 가벼우며, 모든 신적인 것은 여린 발로 달린다”는 명제는, 비제보다는 오히려 모차르트 음악에 더 잘 어울릴 성싶다. 그래서 그가 비제를 극찬한 내용으로 모차르트를 예찬했더라면 후대에 그의 음악적 감각과 표현력이 더 훌륭하게 평가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듬직하다. 비제와 모차르트는 음악사적인 무게감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니체의 비제 예찬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니체는 음악적 감각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바그너 음악과 강렬히 대비시키기 위해 비제를 일부러 과도하게 높힌 것일까? 다시 말해 니체의 비제 예찬에는 (바그너리안의 입장에서 보기에) 뭔가 악의적인 의도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이래저래 궁금증이 커지기 마련인데, 먼저 니체가 비제를 예찬했던 대목을 일부나마 읽어보자:

사람들은 이 작품[카르멘]으로써 바그너식 이상의 온갖 수증기, 축축한 북방과 작별을 합니다. 이미 줄거리만으로도 그로부터 구원합니다. 줄거리는 메리메에 의하여 격정의 논리, 가장 짧은 선, 탄탄한 필연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열대에 속하는 것, 공기의 건조함, 공기의 청명함(limpidezza)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기후가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다른 감각, 다른 감수성, 다른 명랑함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음악은 명랑한 것이지만, 프랑스식이나 독일식의 명랑함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음악의 명랑함은 아프리카식입니다; 이 명랑함에는 숙명이 있으며, 그것의 행복은 짧고 돌발적이며 양해를 모릅니다. 이제까지 유럽의 기존 음악에는 없었던 언어가 비제에게 있다는 점에서 저는 그를 질투합니다 — 한층 더 남방적이고 한결 더 짙은 갈색이고 한층 더 그을린 감수성이 있다는 점에서 . . .

— 니체, «바그너의 경우» 2

니체는 비제를 예찬하면서 날씨와 기후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즉 축축한 날씨의 북방(바그너)과 공기가 청명한 남방(비제)을 대비시키고 있다. 니체가 말하는 “공기의 건조함, 공기의 청명함”은 니체의 경험을 가장 가깝게 비춰주는 요소인 동시에, 고전적인 맥락을 갖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가령 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에서도 “공기의 건조함”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도 신성한 공기(에테르)는 건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유럽의 공기가 눅눅하다, 즉 축축한 날이 많다는 증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조한 공기를 별도로 예찬하지 않는 것도 축축한 날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장마철에 한국을 방문한 맨유의 스콜스가 “한국에 오게 돼 기쁘다. 이번이 두번째다. 비 오는 날씨가 맨체스터와 비슷하다”고 했다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우리나라 날씨는 원래 이렇지 않다고 설명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자연적 환경은 누구나 늘상 거론할 수 있는 요소이기에 역설적으로 무시되는 요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을 완성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요소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비제는 끝없는 바다의 파도처럼 나를 도취시켰고 압도하였다. 다음날 기차가 나를 국경 넘어 넓은 세상으로 실어갈 때 카르멘의 멜로디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뮌헨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짜 고대문화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비제의 음악과 합쳐서 내 속에 내가 그 깊이와 의미의 무게를, 그저 예감할 수는 있으나 파악할 수는 없는 어떤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봄과 같은, 결혼의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외부적으로는 1900년 12월 1일에서 9일 사이의 흐린 주간이었다.

— 아니엘라 아훼 정리, 이부영 번역, «회상, 꿈, 그리고 사상» 131면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C.G. 융의 자서전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융 역시 <카르멘>을 처음 듣고 압도당했다. 어쩌다 한 사상가가 비제를 예찬했던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겠는데, 또 다른 사상가가 거의 비슷하게 예찬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뭔가 내가 모르는 필연적인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혹시 19세기 내지 20세기 초의 독일어권 사상가들은 남방의 요소, 정열의 요소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니체는 <카르멘>을 처음 듣고 페터 가스트에게 쓴 편지에서 “격정과 아름다움의 영혼”을 언급했으며, 융은 “봄과 같은, 결혼의 축제 같은 분위기”를 언급했다. 한 마디로 그들이 비제의 음악에서 발견한 것은 비독일적 요소들인 셈이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오는 동안 비제의 음악과 같은 “음악의 남방”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경험의 희소성이 비제를 더 크게 만든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경험의 희소성은 니체와 융에게서 하나의 날씨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에게 카르멘은 맑고 투명하고 건조한 날씨보다 더욱 만나기 힘든 음악이었으리라. 게다가 당시의 오페라란 오늘날처럼 영상매체나 음반을 통하여 늘상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많아야 한두 번 접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경험의 희소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음악이 음반으로 존재하지 않고 공연이나 연주회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음악은 훨씬 귀하게 여겨질 것이다. 더구나 그 음악이 살아오는 동안 전혀 접하지 못했던 부류의 음악이라면 더욱 놀라울 것임은 분명하다. 재작년 연말에 황병기 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의 대표곡들과 그의 가야금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였지만, 그 음악회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황병기가 서정주의 <추천사>를 가사로 하여 작곡한 가곡이었다. 다른 곡들은 모두 음반을 통하여 익히 들어왔던 터라 새삼스럽거나 놀라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추천사>를 듣는 순간 나는 서정주의 시를 읽을 때의 그 능청능청대는 느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무반주의 느린 진양조로 시작되는 “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수가 없다”는 구절에서는 정신이 아뜩했다. 약간은 과장된 듯한 창자 강권순의 표정조차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집에 돌아와 <추천사>가 녹음된 음반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 곡은 아직 음반에 녹음되지 않은 음반미발표곡이었고, 그래서 더 이상 들어볼 기회도 없었다. 그 음악은 온전히 일회적이었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되풀이하여 들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얼마나 자주 그 가곡을 떠올렸던가. 그러나 이렇게 기억만으로 음악을 듣는 경험이 어쩌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경험이라 생각하며 더욱 좋아했다. 더불어 이 경험을 가지고 니체의 비제 예찬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나는 어제 비제의 걸작을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는 니체의 문장은 얼마나 도발적이고 얼마나 집요한가! 그러고 보면, “카르멘의 멜로디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융의 서술도 현대인의 서술보다 훨씬 진실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추천사>가 녹음된 음반이 출반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황병기 가야금작품집 제5집 «달하 노피곰» 음반에 그 가곡이 실려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나에게서 하나의 진기한 경험이 막을 내린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어제 이 음반이 집에 도착했고, 지금 나는 서정주 작사, 황병기 작곡, 강권순 창의 <추천사>를 듣고 있다.

이 가곡이 후대의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될까? 이미 평가가 끝난 것이나 많은 평가가 이루어진 작품에 대하여 평하는 것은 안전하다. 지금 이 시대, 현 시기에 출현하는 새로운 예술, 동시대 예술, 소위 “컨템포러리” 예술에 대하여 평하는 것에 비하자면 이전 세대의 예술을 평하는 것이 좀더 안전하고 쉽다는 말이다. 그러나 니체와 융이 들었던 <카르멘>은, 나의 경험으로 번역하자면, 황병기가 작곡한 <추천사>처럼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괴테의 감식안이 크게 그리친 사례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그가 동시대의 베토벤을 애써 무시하고 오히려 지금은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않는 다른 동시대 음악가를 고평가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누구보다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찍 간파했던 그 괴테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동시대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니체는 정말 겁없이 동시대 예술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즉 니체 당시에 바그너의 음악과 비제의 음악은 웬만한 감식안이 아니고서는 선뜻 동의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작정 거부하기도 어려운 동시대 예술이었지만, 니체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젊은 시절에는 바그너의 선전대 역할을 했고 후기에는 그와 반대로 비제를 예찬했다. 두 음악가가 동시대 예술가이면서도 그 음악언어는 정반대였다는 사실은 니체의 흥분상태를 잘 입증해 준다.

이 대목에서 바그너의 음악극 이론과 비제의 음악을 비교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으나, 이는 또 한 편의 글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아무튼 나는 니체의 비제 예찬이라는 숙제를 경험의 희소성의 문제, 그리고 동시대 예술의 문제로 풀고 싶다. 현시대의 정보 소통은 전지구적이고 동시적이어서 현대인은 옛 시대의 사람들만큼 경험의 희소성을 겪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의 동시대 예술은 옛 시대의 동시대 예술보다 새로움이 적고 생소하지 않다. 예술과 관련한 거의 모든 시도가 이미 행해졌고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래서 현대의 평론은 태생적으로 옛 시대의 평론처럼 모험적일 수 없으며,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적다. 이것이 현대의 비극이며 이것이 옛 시대의 풍요를 말해 주는 것이다. 풍요는 창조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존의 예술적 관념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동시대 예술의 출현 못지않게 그 예술을 간파해 내는 과정도 창조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니체 당시에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모차르트나 베토벤을 평하는 것보다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 즉 바그너와 비제를 평하는 것이 좀더 창조적이고 흥분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니체의 비제 예찬은 악의적인 과장이 아니라 필연적인 진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비제라는 인물은 진정 “새로운 아름다움과 매혹을 보았던, 한 편의 음악의 남방을 발견했던 최후의 천재”(«선악의 저편» 254)였다. 니체가 보기에 음악은 비제의 음악처럼 “지중해의 음악이 되어야 한다”(«바그너의 경우» 3).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 “음악의 남방”, “지중해의 음악” 등의 표현은 독일인이 경험하기 힘든 날씨와 예술, 동시대의 새로운 예술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니체는 위악적으로 비제를 예찬한 것이 아니다.
 

서정주. 나 역시 이 시인의 시 앞에서 언제나 커다란 갈등을 한다. 갈등하면서도 그의 시를 좋아한다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다. <추천사>를 무척 좋아했던 나의 이십대 시절을 돌아보자니, 확실히 내게는 낭만주의 성향이 있었던가 보다. 그런데 그 시절에 주목하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새삼 서정주를 돌아보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 2연의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밀듯이, 香丹아”이다. 이 싯구는 서정주가 여인들이 베갯모에 수놓은 자수를 이미 1950년대에 눈여겨보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풀꽃더미, 나비, 꾀꼬리 등은 베갯모 자수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베갯모의 풀꽃더미, 작은 나비들, 새들은 춘향이 수를 놓았던 것들이지만 춘향은 그것들을 훌쩍 떠나고자 한다. 춘향은 그것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울렁인다. 춘향은 더 이상 풀꽃더미, 나비, 새들 속에서 “西으로 가는 달 같이” 천천히 허우적일 수는 없다. 춘향은 “울렁이는 가슴”을 깨끗이 쓸고 먼 바다로, 먼 하늘로 날아오르고자 한다. 향단은 그네를 밀어 춘향의 울렁이는 가슴을 저 하늘로 저 바다로 아주 밀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1연, 2연, 마지막 연을 마무리하는 “향단아” 하는 부름은, 춘향이 먼 하늘로 먼 바다로 풍덩 빠져드는 소리, 의성어처럼 들린다. 황병기의 곡은 이러한 “울렁이는 가슴”과 “밀어올림”의 주제에 뛰어나게 집중하고 있다. 이러한 집중은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장단과 강약 구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강권순의 창은 이를 대비적으로 잘 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황병기의 <추천사>를 처음 들었을 때나 무수히 들어본 지금이나 서정주의 <추천사>를 읽을 때와 거의 동일한 감정이 내게서 일어난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체험이다. 강권순의 창은 재작년 공연장에서 들었을 때에 더 극적이고 흥이 더 들어갔던 듯한데, 녹음된 음반에서는 그때보다는 절제한 듯하다. 아마도 가곡의 단아함과 민요의 격정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때문에 강권순의 창이 아쉽지는 않은데, 가야금 반주가 너무 크게 녹음된 점은 아쉽다.

황병기가 작곡한 <추천사>를 들으면서 본문비평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추천사>는 원래 «서정주시선»(1955년)에 처음 실렸던 시인데, 현재 그 시집은 판매되지 않는다. 하지만 근간된 민음사판 서정주 전집(1994년)은 초판본의 원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다행히도 원문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 서정주의 시들은 각종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던데다가 한글표기법이 바뀔 때마다 원문의 옛 표기법이 편집자 임의대로 수정된 경우가 많았고, 또 그 수정이 시인 생존시에 벌어진 일이라서 과연 시인이 그 수정작업에 관여했는지 여부에 따라 원문을 확정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황병기의 <추천사>와 민음사 전집판의 <추천사>의 불일치도 이러한 원문에 대한 무관심과 난삽한 수정작업 때문에 발생했을 것이다. 가령,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전집판),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음반), “베갯모에 놓이듯한 풀꽃더미”(음반내지)가 각각 다르고, “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눌로”(전집판),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나라로”(음반),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음반내지)가 각각 다르다. 이러한 상이함은 민음사 전집판이 초판본을 따르고, 황병기가 과거의 수정본을 따르고, 음반내지가 비교적 최근의 수정본을 따른 데서 비롯했을 것이다. 음반내지야 작품과 하등 무관한 것이니 음반사의 불성실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서정주의 시와 황병기의 곡이 서로 본문이 다르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고창 선운사 들머리의 바윗돌에 새겨놓은 <禪雲寺 洞口>라는 시 역시 이러한 원문의 불일치 문제를 남기고 있으니, 본문비평이 생각보다 경시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추천사>가 황병기의 가야금작품집 음반에 실려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제로 <추천사>를 스무 번째 들었습니다. 당신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발언이 얼마나 도발적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로 <추천사>를 스무 번 이상 들었으며, 이는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이 손쉽게 가능한 현실은 옛 시대의 문장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러한 손쉬운 현실과 허다한 정보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다, 그러니, “바람이 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香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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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7-28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왜그리 비제를 좋아했나..반조님 글을 읽으니 이해가 되네요.^^ 독일같은 북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스페인같은 남부의 분위기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긴 하죠. 황병기씨 작품은 저도 <비단길> 이나 <미궁>같은 작품을 통해서 접해 봤는데 기존의 다른 국악과는 다르게 그만의 독창적이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음악이 처음부터 깊은 감동을 주더군요. 그동안 안듣고 있었는데 저도 얼른 이번에 새로나온 음반하나 구입해서 들어봐야 겠습니다.^^

반조 2007-07-29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비제를 처음 들었을 때 일종의 문화충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게아니라 카르멘을 보고 나서 페터 가스트에게 쓴 편지에서, 니체는 스페인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지요.

yoonta 2007-07-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가 비제를 좋아했던 이유중에는 그의 철학의 영향도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전통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 생의 의지를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충만함같은 분위기를 스페인과 같은 남부유럽의 라틴적 분위기속에서 발견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하게 되네요. 그런데 니체는 스페인은 여행한 적이 없나보군요.
 

냐나틸로카 엮음, 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고요한 소리, 2006)을 읽어본다. 이 책의 원저는 독일인 냐나틸로카 스님이 아함부 경전에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 관련한 대목을 주제별로 묶어서 영어로 번역한 책 «The Word of the Buddha»이다. 이 책을 역자 김재성이 팔리어 텍스트를 함께 참고하여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제까지 접해본 아함부 경전의 우리말 번역서들 중에서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 번역본이 지속적으로 개정되면서 3판에 이른 것만 보아도 그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말 번역본이 3판에 이른 경우는 나도 처음 접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들이 있어 몇 군데 소개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이것은 나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허망한 생각이다. 허망한 생각은 병이며, 질병이고, 가시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허망한 생각을 극복하면 그는 침묵의 성자라고 한다. 이 침묵의 성자에게는 더 이상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으며, 떨리는 것도 없고, 욕망하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서 태어나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나이를 먹어 늙겠는가? 늙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죽음이 있겠는가? 죽음이 없는데 어떻게 떨리는 것이 있겠는가? 떨리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욕망하는 것이 있겠는가?

— «중부» 140 “界分別經” MN III 246
 

비구들이여, 태어남[生]이란 무엇인가. 생명 있는 존재들이 이런 저런 유정(有情)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 태어나진 상태, 지각이 태어나는 것, 존재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생겨남,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의 발생 등, 비구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 «장부» 22 “大念處經” DN II 305-307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화살을 뽑아라.

— «숫타니파타» Sn 592
 

비구들이여, 물질[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行], 의식[識]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말한다.

— «상응부» XXII 29 “歡喜” SN III 31
 

비구들이여, 청정한 범행의 목적은 재물, 명예, 명성을 얻는 것이 아니며, 계(戒), 정(定), 지견(知見)을 얻는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자유(akuppā cetovimutti)가 청정한 범행의 목적이며, 핵심이며, 궁극의 도달점이다.

— «중부» 29 “心材喩大經” MN I 197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등불(또는 섬)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아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법을 등불(또는 섬)로 삼고, 법을 피난처로 삼아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아서는 안된다.

— «장부» 16 “大般涅槃經” DN II 100
 

비구들이여, 내가 깨달아 너희들에게 가르친 이 법을 너희들은 잘 간직하고, 잘 보존하고, 잘 닦으며, 자주 실행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의 복리와 안녕을 위해서, 세상의 위안을 주기 위해서, 천상의 천신들과 인간들의 행복과 복리와 안녕을 위해서 이 청정한 범행(梵行)이 잘 유지되고 오래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 «장부» 16 “大般涅槃經” DN II 120

냐나틸로카 스님의 «The Word of the Buddha»의 영어 원문은 웹으로 공개되어 있다. 이 책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초기경전에서 간추려 번역한 텍스트라면, «Fundamentals of Buddhism: Four Lectures»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냐나틸로카 스님의 해설서이다. 아울러, 불교 용어와 교리를 정리해 놓은 사전 «Buddhist Dictionary»도 웹으로 공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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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7-10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