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거짓말 - 대마도, 그 진실은 무엇인가
서동인 지음, 이오봉 사진 / 주류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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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권할것인가?

 

대마도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

독도에 관심이 많은 사람

한일 역사관계에 관심이 많은사람

대마도에 가보고 싶은 사람

조선통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일본 시마네현에서 독도 조례에 대응하기 위해 부산과 창원에 대마도 조례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난 한국과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것에 의아스러웠으며

대마도 역사에 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에

조선통신사.

임진왜란.

일제식민시대.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이주의 역사.

일본의 가야, 백제, 고구려의 영향 등

한일 관계에 관심이 많아져

대마도에 꼭 가보고 싶었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농사짓기가 힘든 척박한 땅을 갖고 있는 대마도는

한국에서 계속 식량을 가져와야 먹고 살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갖고있다.

그래서 한국의 영향을 안받을 수 없는 섬이다.

 

옛 지도를 보면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많이 표기해 놨다.

 

고려때 대마도는 고려와 친밀한 관계였다.

고려왕도 대마도를 고려의 땅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는 변화가 생겼다.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가 틀어졌던것이다.

 

 

 

고려가 대마도를 지배한 확실한 근거가 있었기에

조선은 초기쿠터 대마도를'우리 땅'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 말 ~ 조선 초 건국 시점에 조선은 완전히 이 땅에 등을 돌렸으며,

조선 건국 세력은 그에 얽힌 자세한 사정을 숨기고 기록으로 전하지 않앗다.

아마도 혁명세력에 반대하여 대마도가 이반하였고,

스스로 이 땅의 정권과 결별한 사실을 숨겨야 했던 속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44쪽

 

 

 

대마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서 외교의 중개적 역할을 하면서

큰 이익을 차지하였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외교문서를 조작하기도 하고

임진왜란때는 조선침공의 선봉에 서기도 하였다.

왜구들의 본거지로도 이용되었다.

 

조선은 왜구 소통을 위해 대마도를 몇 번 정벌한적이 있지만

자기의 영토로 만드려고 하진 않았다.

아마 방어도 어렵고 땅도 척박하여 사람이 살기도 힘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마도를 일본에 있어 입술과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해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놔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오래 전, 그것도 조선 건국 시점에서 이성계가 이미 일본 땅으로 인정하였고, 그때부터 적어도 5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조선의 땅이 아니었는데 대마도를 돌려달라는 게 말이 되는 요구인가. 조선조 5백여 년 동안 국왕과 관료들은 대마도에 많은 것을 퍼주면서 제 나라 백성들에게는 '대마도는 조선 땅'이라고 목청을 세웠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정작 일본에 대고 정식으로 대마도가 조선 땅이니 왜인들은 섬을 비우고 물러가라고 통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설명하였듯이 일본에 보내는외교문서에는 빠짐없이 대마도주를 일러 '일본국 대마주 태수'라 하였으니 '대마도가 계림에 속한 땅이었다'거나 '경상도에 예속된 섬'이라고 한 조선 국왕들의 주장은 '퍼주는 정책'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을 염려하여 제 나라 백성을 속이기 위해 써먹은 대민용 멘트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유산탓에 이승만이 '대마도를 내놓으라'며 슬픈 성토를 하기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이 조선정부와 국왕이 제 나라 신민을 오도하고 우민화한 거짓말의 심각한 폐혜이다.

 

399~400쪽

 

 

 

책의 제목을 '조선의 거짓말'이라고 지었는데

그 이유는 위에서 보는 봐와 같다.

조선 정는은 대마도는 계림의 땅이라고 계속 말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자기 영토에 대한 영향력 행사는 하지 않았고

오히려 외교문서에는 일본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민중은 계속 대마도는 조선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마도를 일본에게 넘겨준 밑그림이 된 것이 맥아더라인이었다.

맥아더라인은 1945년 9월27일에 선포되었다.

그 당시 공산국인 중국이 유구열도의 반황을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중국과 소련의 팽창을 크게 걱정한 미국은 대마도를 유키나와(유구)와 함께

하나의 방어권 개념으로 묶어서 일본령으로 확정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16쪽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종결 후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두려원 한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였고

이때 오키니와와 대마도를

일본의 영토로 확정해 주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대마도가 국제적으로 일본 땅으로 공인된 것은 1951년 7월이다.

미국의 압력에 따라 양유찬 주미대사 대마도 포기선언을 함으로써 대마도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

그러면 1945년 직후의 해방 정국에서 이 나라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대마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대부분의 한국국인들은 대마도는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대마도는 조선 땅'이라는 조선 신민들의 관념을 계승한 것이었다.

대마도가 거문도나 제주도보다도 한국 땅에서 더 가깝고,

대마도 사람들은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조선인들이 가꾼 곡식과 물자를 받아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37쪽

 

 

 

 

처음으로 한국 정부가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맥아더라인이 설정되고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 한국은 미국무부에 대마도 반황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릿지웨이를 비롯하여 워싱턴의 미국무부 관리들은 이런 요구를 무시하였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방어선의 문지기로 삼았으므로 기존의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선에서

한국의 요구를 묵살하였으며, 일본은 부단히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걸음마 단계의 한국 정부를 괴롭혔다.

 

448쪽

 

 

 

현재 일본인이 사는 대마도를

돌려 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조선시대 오백년동안 대마도를 자신의 토로

인정하지 않고 내쳤기에 지금와서 영유권을 주장하기 힘들다.

 

 

매년 많은 한국 관광객이 대마도를 찾고 있다.

대마도는 한국에서 많은 이익을 취하는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대마도가 그간 한일 관계의 중개적 역할을 해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꼭 거쳐갔고 대마도주가 일본 에도까지 통신사 일행을 안내하였다.

이런 한일간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역사를 갖고 있기에

앞으로 한일 관계과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역할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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