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햇살이 덜 내리쬘 때 출발한다고 제법 이른 시간에 통영으로 출발했다. 쉬지 않고 가다가 통영에 거의 다다라 학섬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학섬 휴게소에서 본 학섬 주변 바다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하니 10시다. 터미널 안 공영 주차장이 꽉 차서 터미널 밖에서 얼쩡 거리다 10시 30분에 한산도로 출발하는 여객선은 놓치고 겨우 주차공간이 생겨 차를 주차하고 11시에 출발하는 배를 탔다. 한산도 가는 배가 1시간마다 있다더니 휴가철이라 30분마다 출발한다. 그런데 11시에 출발한다는 배가 오지를 않는다. 심심해서 휴개소 안팎을 들락거리고 있던 아이둘에게 말을 걸었다
한산도 내에 있는 한산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방학이라 통영에 있는 단과학원과 미술,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있단다. 같은 동네 분인듯한 아주머니가 "왜 너그들만 왔노?"하고 물으니 다른 아이들은 12시 배로 온단다. "너그들도 그 때 오지 왜 빨리 왔노?"하니 자기들은 공부 더 많이 할려고 일찍 나왔단다. 야무지다. 아직 학원차가 오지 않아 지루해서 들락거리고 있는 것을 안 그 아주머니가 학원에 전화를 해 줬다
내 옆에 10분정도 기다리니 차를 가득 실은 배 한 대가 들어온다. 배를 타고 온 승객들이 서둘러 내리고 섬으로 들어갈 승객들도 선원들의 바쁜 손짓을 따라 얼른얼른 배에 올랐다.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올망졸망한 섬들을 보면서 간다. 어릴 적 고향 옆 동네 멸치막에서 보던 멸치잡이 배(우리는 오고다리배라고 불렀다)들이 멸치를 잡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잡은 멸치를 삶아 실어 나르는 배, 멸치 떼를 찾으로 다니는 배도 보인다. 엄마는 우리 동네 재수 오빠네 아버지가 멸치 떼를 찾아 다니는 배 선장이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돈을 제법 잘 벌었는데도 무슨 이유인지 그 집 형편이 도무지 펴질 생각이 않더니 그 아저씨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식들이 하나 둘 풀려 가난을 벗어났다는 얘기를 하신다. 우리 집 들어오는 입구 초라한 초가집 방 2칸에 아홉 식구가 오골거리던 그 집이 생각이 난다.

제승당 올라가는 길에서 본 해안도로
만처럼 생긴 한산도 안 쪽은 수심이 6~10미터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물이 잔잔하고, 나무들이 바닷물 가까운 바위 위서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바다가 아니라 호수 위해 떠 있는 섬 같은 느낌이 든다. 10년 전쯤이던가 연극에 관심이 있을 때 함께 워크샾을 했던 분들과 통영으로 봄야유회를 왔다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해안길을 따라 제승당으로 가는데 파아란 바닷물 위로 반짝반짝 빛나던 물결과 해안도로를 따라 제승당으로 가는 사람들 머리 위로 늘어진 진달래 꽃가지가 숨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봄날이 아니라 여름 날에 와도 한산도는 좋다. 선착장에서 제승당으로 이르는 숲 길이 시원하다

제승당 입구, 이 문을 통과해서 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제승당이 나온다
제승당과 수루를 둘러본다. 제승당은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작전회의를 하거나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1,400여편의 난중 일기 중 1,000편이 넘는 일기도 이 곳에서 썼단다. 그 옆에 수루가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왔던 이순신 장군의 시 한수를 현판에 써서 걸어놓았다. 수루에 앉아 ‘한 밤중 이 곳 홀로 앉아 나라의 안위를 생각했을’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아 본다. 댓잎에 살랑살랑 부딪치는 바람 소리랑 매미 소리만 들린다.


수루쪽에서 본 제승당 수루
충무사를 들러 이순신 장군의 영정 앞에 묵념을 올리고 나와 활터를 돌아봤다. 외국인 한 명이 활을 쏘고 있다. 이 활터는 독특하다. 바다 건너편에 표적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이 곳에 활쏘는 연습장을 만든 이유는 밀물과 썰물에 따른 감각의 차이를 몸으로 느껴 실전에 실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단다. 뛰어난 전술가였다는 이순신 장군의 면모가 느껴진다

(군사들이 실전에 대비한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활터)
제승당을 나와 조선시대 이 곳에 주둔했던 군사들에게 풍부한 샘물을 제공했다는 우물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여객선을 타고 충무시내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