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계를 꿈꾸는 긍정의 시학, 안도현론을 읽고-


  비평과 관계된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이 일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구나’라는 것이다. 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쏟아져 나오는 문학작품들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문학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문학 작품, 특히 시에 대한 이해능력이 부족한 탓인지 평론가 이경수씨(이후 필자)가 쓴 안도현론을 읽어보니 그저 고개가 끄덕여진다.


  ‘안도현은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안도현이 염원하는 세계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평화롭게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인간     이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회복함으로써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되찾고 결핍을 보충하기를     시인은 바란다’

  ‘시인이 꿈꾸는 유토피아에는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것들이 모여 산다’

  는 긍정적인 평가에서 부터

  ‘안도현의 시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천진한 심성과 따뜻한 감성을 맑고 아름다운 언어로 되살려 내는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에서 더 이상 불온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는 염려섞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불온한 상상의 축제’라는 제목의 책에 이러한 평론이 실렸다는 것이 의외다. ‘축제’는 각각의 글이 지니고 있는 개성과 다양성을 표현한 것이다‘라는 필자의 말처럼 다양한 개성을 담은 시인들의 시에 대한 비평이 실려있으니 ’축제‘의 성격에 맞다는 것을 인정하겠는데 안도현의 ‘시’가 ‘불온한’ 상상을 담고 있다는 것은 선듯 인정하기 힘들다. 불온함이란 기성의 틀을 깨는 정신이 아닌가? 물론 안도현의 시가 낡은 것 조차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 ’불온한 상상‘을 담고 있다고 하면 할말은 없지만.


  ‘연어’라는 괜찮은 동화를 쓴 작가로 알고 있던 내가 처음으로 읽은 안도현의 시가 ‘너에게 묻는다’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나는 선시 같은 이 짧은 시를 읽는 순간 ‘사소하고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이 시인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찬란한 생명력을 가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나‘ 안에 수많은 ‘나’ 중에 이타심을 가진 ‘나’는 구석진 자리에 겨우 있는 듯 없는 듯 자리잡고 있던 ‘나’는 이 시를 읽고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 이후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비롯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에 이르기까지 안도현의 시집을 찾아 읽었다. 그러나 시인이 ‘불온한 상상’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후에 나오는 안도현의 시는 기성의 서정시인들의 틀을 깨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쳤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맥락 안에서 중심에서 밀려난 것들,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담은 안도현 특유의 빛깔을 뿜어내고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필자가 안도현의 시에 내린 긍정적인 평가를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시가 가진 장점은 많다. 그래서 필자는 ‘안도현이라는 재능 있는 시인의 시가 따뜻한 위안의 반복적 재생산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기를 바라다’는 정도의 염려로 이 글을 맺고 있다. 『그리운 여우』,『바닷가 우체국』,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에 이르는 시집에 실린 시들을 보면 이러한 염려는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생태주의 시로 분류되는 안도현의 시를 두고 ‘너무 서정적이어서 또 다른 환상을 심어줄 뿐 현실적 문제의식을 오히려 희석시킨다’는 점, 단순한 의미로 쓰여져 독자들에게 너무 쉽게 읽힌다는 점등을 들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비평가들도 많다.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안도현의 시가 지닌 대중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듯 하다. 나 또한 안도현의 시를 트리나 포오러스가 지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과 비슷한 관점에서 본다.


  이 책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번쯤 읽어보면 좋은 책으로 권장되는 도서이다. 초등학생들에게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게 하고(단순한 의미로 해석하며 읽었을 때), 청소년들에게 꿈을 찾아 가는 과정을, 어른들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게 하는(천천히 책 속에 우러 나는 깊은 맛을 음미하며 읽었을 때)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안도현의 시도 마찬가지다. 단순하게 의미를 해석하며 단숨에 읽으면 그 나름대로의 감동이 있고 ,천천히 깊은 맛을 음미하며 읽으면 읽는대로 또 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안의 도구로 시를 읽는 독자도 문학 자체에 관심이 많아서 안도현 시를 읽는 독자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염려했던 것처럼 비숫한 분위기를 가진 시가 계속 쓰여지고 있는 점은 문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시는 문학이 가져야할 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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