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마치고 지난 번 답사 때 시간이 늦어 못 간 김해 대성동 고분 박물관에 갔다. 이곳에는 박물관 옆 구릉지 ‘왜고지’에서 만들어진 금관가야 왕들의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묘제의 변천과정을 자세하고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 고분이 발굴된 구릉지에 있는 노출 전시관에는 왕묘인 29호 목곽묘와 이것을 파괴하면서 설치된 39호 목곽묘를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전시하고 있어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부장양상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고분 박물관 전경)
금관가야는 1-2세기까지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관을 만들어 시신을 묻었던 목관묘를 주로 만들었고 3-4세기에는 목곽묘를 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목곽묘는 금관가야의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하는데 통나무로 덧널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고 주곽에는 시신과 함께 철기를, 달린곽에는 토기류를 매장했다. 그래서 목곽묘에서 유물이 많이 출토된다고 한다. 그리고 목곽을 만들고 난 뒤 시신을 안치하기 전에 바닥에는 덩이쇠를 깔아 토지신에게 땅을 샀다는 신고를 했다고 한다. 이 당시 덩이쇠는 화폐대용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4세기 경에는 돌덩이로 곽을 만들어 그 안에 죽은이의 시신을 안치했단다.
(목곽묘를 만들고 있는 모습)
이렇게 매장된 무덤 속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가야는 중국과 대방 낙랑, 일본등지와 활발한 교역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다른 박물관 지역에 전시된 삼한시대 유물들과 별 차이가 없어 기억에 남은게 없다. 그런데 대성동 23호 고분 군에서 나온 청동거울은 독특한 문양이 기억에 남는다. 엣날 궁궐이나 사찰에 단청을 할 때 썼다는 오방색과 사신(四神)이 이 청동 거울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청동에 새긴 것이라 오방색은 알 수 없지만 동에 청룡, 서에 백호,북에 현무, 남에 주작, 사신(四神)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상상 속의 동물이라 우리가 익히 다른 그림이나 물건들에서 봐온 모습과는 약간 다르다. 지배계층에서 주로 이러한 청동거울을 가지고 다녔다는데 그 이유는 사신이 액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금관가야는 전기 가야의 중심 세력이었다는데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경주 어딜가나 마주치는 것이 신라의 유물듯이 김해 곳곳에는 가야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물과 유적이 즐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