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출신 여성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가 만든 유고연방 분리 독립 과정에서 벌어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 휴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그린 영화를 보다 

'나는 평화를 꿈꿔요'라는 책에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을 겪은 아이들이 쓴 시와 그림이 실려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전쟁을 악마의 모습으로 그렸다. 하늘이 새까맣게 내려앉는 듯한 그림을 그려 놓은 아이도 있었다. 그 속에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전쟁으로 인해 인생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에스마는 사라라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 아이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다. 사라가 수학여행을 가게 됨에 따라 수학여행비를 구하기 위해 클럽에 취직도 하고 친구에게 옷을 맞춰 주기고 하면서 돈을 번다. 그런데 생각만큼 빨리 돈이 모이지 않아 끙끙대고 있을 때 딸아이가 아빠가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증명서가 수학여행비를 면제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사실 사라는 에스마가 의대를 다니다가 전쟁이 나서 수용소에 있을 때 세르비다 인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하고 낳은 아이다.그런데 에스마는 사라에게 아빠가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내전이 일어났을 때 반대편 세력들은 여자들을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강간을 하는 몹쓸 짓을 한다더니 에스마 역시 그렇게 희생을 당한 사람이었다. 그 후 에스마는 남자들이 여자에게 노골적인 접근을 하는 걸 보면 가슴이 꿍꿍거려 보질 못한다. 심장약을 먹어야 진정이 될 만큼. 그런데 그걸 알리 없는 딸아이는 전사자 증명서를 떼 달라고 떼를 쓴다. 난감해진 에스마는 대충 얼버무리지만 총을 들고 에스마에게 자신의 아빠가 누군지 바른대로 말하라는 협박을 듣고 분노가 폭발, 출생의 비밀을 말한다.

  에스마는 강간 당한 사람들에게 정신 치료를 행하고 있는 센터에서 울면서 말한다. 난 그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고.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 아이는 태어났다고, 그래서 처음에 꼴도 보기 싫었다고. 그렇지만 아이를 낳고 이틀 후 모유가 나오기 시작하자 한 번만 먹이려 했다가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자신의 삶에 다시는 아름다운 광경을 못볼 줄 알았는데 그 아이가 아름다움을 보게 해주었다고.

  사라는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스스로 삭발을 한다.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으니라. 그리고 며칠 후 삭발한 머리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반항하며 안 갈 줄 알았는데 의연하게 수학여행 버스에 올랐다. 복잡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엄마께 손까지 흔들어 주며. 들떤 아이들이 부르는 사라예보 찬가의 마지막 부분의 나지막히 읊조리며.

 보스니아 내전 당시 보스니아 여성 2만 명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인들의 씨를 말리고 자신들의 씨를 잉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에스마였다. 황석영 작 '한씨 연대기'의 한영덕처럼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적 상황의 희생물이 되는 이들을 보면서 새삼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자기 의지대로 살고자 해도 개인은 그 개인이 살고 있는 나라의 역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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