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터진 창호지를 떼더라도! 분칠하고 호미질을 하더라도! 삽질을 하더라도!
한 달에 단 한 번. 주말에도 군말 없이 집을 나설 때가 있다. 오히려 콧바람마저 나온다. 휘파람은 불 줄 모르니 콧바람이라도 내야 한다. 광화문을 지난다. 가슴이 두근두근. 이미 정신상태는 글러먹었다.눈 앞이 흐려진다. 흐려진 눈을 다시 뜨면 거짓말 같이 과거로 과거로 달음질 친다.
밥을 할 때도 입지 않는 앞치마를 두른다. 룰루랄라. 길을 나선다. 정겨운 나무의 향내가 난다. 불경스럽게도 어수문 문고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라랄라~~ 그래. 난 궁에 왔다. 자원봉사를 빙자하여 돈 한 푼 없이 비공개지역을 허이허이 휘젓고 다니다. 즐거운 일이다.
이게 다 아름지기 때문이다
삽질 조금 하고 호미질 조금 하면 특별구역을 관람할 수 있다. 밥도 준다. 자원봉사? 아니다. 난 흑심을 품은 호기심쟁이일 뿐. 이번달이 세번째. 첫째 달에는 창덕궁 반도지길에 열심히 삽질을 헤댔다. 입에 단내가 났다. 보통이 아니지 싶었다.두번째 달에는 비공개지역인 신선원전 창호를 뗐다. 무심히 나무를 생채기 내고는 뜨끔했다. 정신줄을 잡아야 한다!이번은 주합루의 잡초와의 사투. 이까짓 호미질이야.
간사를 졸라 낙선재 후원으로 간다. 무심한 외곽도로에서 순식간에 고졸한 향내가 난다.단청칠을 하지 않은 낙선재는 빛을 머금고 갈무리 해 그 빛 자신이 단청이 되었다. 상량전에 올랐다. 궁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더니 이 곳에 올라 시름했들 여인들이 애처롭다. 동그란 만월문이 여간 아름다운게 아니다.
미치겠다. 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진을 찍어도 남는 게 없을 듯 하다.눈으로 봐도 어쩐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맷돌을 굴려본다...드르륵- 그 느낌만이. 안온하고 고졸하던 풍경의 느낌만이 선하다. 나무의 향내는 어려서 각인된 할머니집의 냄새고 기둥과,처마, 난간의 색은 물감으로 표현이 될까 싶다. 혹시. 이런 게 짝사랑인 게야?
오늘. 비가 내렸다
바싹 마른 옥류천을 보고 입맛을 다셨던 기억이 난다. 물기를 먹어 포롯포롯한 옥류천의 느낌을 어떨까. 부용지의 자라인지 거북인지는 잘 놀고 있을까.-나 때문에 놀라 뚜껑열리지는 않았겠지?-문득 아무도 없는 밤을 타 그가 느릿하게 궁을 누비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꿩은 잘 있는지. 다람쥐는 잘 있는지. 옆에서 호미질을 해도 자기 밥벌이에 바쁜 도도한 까치도 잘 있는지... 서울 도심에 이런 곳이 있는 게 고마워 죽겠다. 어렸을 때는 판타지, 사춘기에는 호기심의 대상, 지금은 내 생애의 꿈을 품게 한 창덕궁의 모습.
경복궁이 근엄한 아버지라면 창덕궁은 자애로운 어머니인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발을 들이면서 새삼 빨리 늙어가는 궁의 모습을 본다. 역사의 질곡에 잘려나가고 비틀어진 모습도 본다.그런 궁이 오늘은 수 많은 동물과 식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여기에. 이제 주인은 없고 궁 스스로가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