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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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가 난 직후, 부시는 테러국가를 향해 십자군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선과 악의 전쟁이라고 불렀고, 아프가니스탄의 굶주린 양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악의 화신의 오명을 쓰고 죽어갔고 부시는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죠.

십자군 전쟁이라..성지를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무슬림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고, 이슬람 문명을 파괴한 약탈자의 얼굴을 한 부끄러운 기독교인들의 모습아니던가요? 무고한 이교도 어린이의 피로 발목을 적시고 돌아와 밤이면 신의 이름으로 다음날의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던 십자군 원정에 나선 그리스도인들.

인간의 잔인성에 종교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같은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받았을 때, 사람들이 어떤 광기에 휩싸이며 어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역사를 통해 충분히 배웠으면서도 인간의 역사는 그 과오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나 봅니다.

5천년을 한 땅에서 피를 나누며 살아온 한 민족이, 들어온 지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와 막시즘이라는 서양 손님들이 벌이는 장기판의 졸이 되어 스스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처절한 대리전을 치뤄야 했던 숨겨진 역사를 들추어내 직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산자와 죽은자가 ,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한판 굿을 벌이는 황석영식 리얼리즘은 그 어떤 리얼리즘보다 리얼하더군요. 부디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그의 진혼굿을 통해 이승을 떠도는 수많은 영들이 안식을 얻었기를..

미북간의 냉전을 언급하며 “주의 군사들이 승리할때까지”라고 기도하는 장로님의 말을 들을 때면 아뜩해지긴 하지만, 저도 제 식으로 교회에 나가 기도하려고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모든 민족이 온전한 주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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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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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그렇고 그런 잡담을 즐기기 위해서 영화주간지를 사는게 마땅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잡지가 배달되면 맨 뒷장부터 서둘러 펼쳐드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바로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를 들여다 보기 위함이었죠.

언젠간 박노해에 관한 컬럼을 있다가 나도 몰래 지하철에서 민망하게도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글은 내 비루한 일상에서 잠시 제껴두고 돌보지 못했던 문제들, 타성에 젖어 그것이 문제인줄도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온 문제들을 마주보게끔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칭 지식인이니, 지식인사회니 지식인의 역할 운운하는데서 심기가 불편해지긴 했지만 그의 컬럼은 현학적이고 고루한 먹물의 일장연설이 아니라, 아침 출근길에 문득 느꼈을 법한 사소한 의문들이 갖는 정치적인 의미를 정확히 꿰뚫어 ‘무식하게’ 쏟아놓은 직설화법입니다. 동시에 그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제시하고 피흘려 투쟁할 것을 선동하지 않는 스스로가 심드렁한 인물이었기에 나 같이 매사가 뒷다마에 그치고 마는 투덜이 스머프 같은 인간형에겐 딱 맞는 칼럼이었던 것입니다.(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게 바로 뒷다마의 가장 큰 장점이죠. 물론 이게 지식인의 가장 큰 한계지만서도, 김규항의 그것은 적어도 진심인 것 같습니다.)

격주로 실린 컬럼이 갖는 적절한 시의성이 더욱 그의 글에 열광하게 했지만, 이제 오롯히 한권으로 묶여진 그의 글을 시차를 두고 보는 재미도 쏠쏠하군요. 그가 꿈꾸는 유토피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도 그가 어린 딸에게 일러주는 이 말로 그 모양새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아, 힘없는 동생들에게는 친절하고 나쁜 오빠들하고는 용감하게 싸울줄 알아야 좋은 언니가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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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까치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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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르릅, 츠르르릅..하하하
'왜 하루키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10여가지는 한자리에서 줄줄 댈수 있을 정도로 하루키가 맘에 드는 이유는 많습니다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의 글을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동질감입니다.

하루키 소설 만큼 낯선 세계도 없을 듯하지만 제겐 어쩐지 편안하게 여겨질 정도로 낯익다 이말입니다.

뭐, 거창하게 그의 소설관이나 세계관이나 작품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와의 공감을 통해 익숙함이 느껴지는게 아니라,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무릎을 탁치게 만드는 그런 공감을 말하는 건대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쓸데없는 의문심이 많다거나 도어스나 빌 에반스는 좋아하지만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싫어한다거나, 더플코트를 좋아하고, 골프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그런 아주 개인적인 취향말입니다.

‘츠르릅 츠르르릅’ 하고 파스터를 목구멍에 밀어넣는 남자를 얼어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루키씨의 얼굴을 상상하다가 그만 지하철안에서 피식 웃음이 터지고 말았지 뭡니까.

저 역시 언젠가 후르륵 후르르륵..분식집의 온갖 소음을 능가하는 소리를 내며 물냉면을 열심히 먹던 남자를 마주 대하고 얼어붙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하루키는 파스타를 먹던 남녀의 운명을 궁금해 했는데, 제 경우는 그날로 끝이었습니다. 남은 평생동안 물냉면을 먹을 때마다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건 정말이지 끔찍했으니까요. 하하하. (흠..괴팍하다고 욕먹겠군. 물냉면을 소리내며 드시는 분들에겐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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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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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사가 누적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화해나가는 이성적 활동에 의한 선형적 발전이 아니라 과학혁명에 의해 과학자들이 공유한 가치관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이동하는 소위,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주장을 한 코마스 쿤의 저작은 비단, 과학사에서뿐 아니라 정치, 문화,사회전반에까지 그 개념이 확장되어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정상과학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패러다임에서 풀수없는 모순과 문제점은 반복된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하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교과서를 통해 과학을 공부하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실험과 연구를 거듭하여 아직 설명되지 않은 자연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 15년간의 연구활동을 집대성한 것이라 보기엔 “과학발전은 패러다임 시프트다”이외의 다른 골자를 찾아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을 믿는 저로선 그조차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말입니다.)

아마 이책을 초판인 60년대 초에 읽었다면 신선한 충격을 받았겠지만, 과학자사회에서의 영향력을 알길이 없는 일반인인데다, 더구나 회사 회의시간에서 조차 팀장으로부터 “우리조직도 세계화시대에 맞추려면 이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하는 2002년의 나로선, 그저 그랬습니다.패러다임 시프트는 이미 정상과학이니깐요.^^

어쩌면 제가 이책에서 별 영감을 받지 못한 것은 내가 제대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힌 것은 쿤선생의 고도한 과학혁명 이론이 아니라, 몇번을 읽어도 무슨말인지 알수없는 이상한 번역투의 문장때문이었거든요. 쿤선생의 제자가 직접 감수했다니 오역은 아닐테고 제 무식을 탓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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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국가 - 미국의 세계 지배와 힘의 논리
노암 촘스키 지음, 장영준 옮김 / 두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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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큼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의 무식함을 절절히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건 도대체가 지식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무식이었으니 말입니다. 단순한 음모이론이 아니라 수많은 따옴표로 인용된 1차 사료에 의한 정보로 증명되는 사실과 그로부터 촘스키교수가 제시한 명백한 인과 관계들 앞에서 그동안 적어도 맹목적이지는 않다고 여겨온 제 세계관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푸훗..이건 완전히 떠주는 대로 받아먹은 꼴이니 말입니다.

9.11사태를 오사마 빈라덴이라는 비정상으로 취급되는 예외적인 개인에 의한 반인류적 테러로 규정하고, 듣기에도 민망한 <선>과 <악>의 구도로 몰고 가, 테러가 일어났는지조차도 모르는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들을 향한 폭격을 정당화하는 힘. 그 틈을 타서 러시아와 중국과 새로운 국제관계를 형성하고 떨어지는 행정부의 인기와 경제성장률을 단숨에 만회하고, 정책에 대한 폭넓은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는 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목으로 약소국가를 상대로 한 전쟁을 정당화하고, IMF 구제금융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경제적인 구속력을 강화하는 힘...이게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무서운 힘의 논리라는 진실.

촘스키교수는 독자들에게 당장 세계가 변하지 않더라도 시지프스처럼 진실을 향한 돌을 계속 굴릴 것을 호소하지만, 저 같은 범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허무적인 비관정도죠. 진실자체보다 진실에 직면한 개인이 느끼는 무기력이 더 무섭고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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