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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평전 - 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지음 / 한길사 / 2013년 3월
평점 :
죽산 조봉암은 창녕조씨 찬성공파이다. 그는 인천 강화 출생(1899~1959)으로 사람을 설득시키거나 군중 장악력이 뛰어난 혁명가였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지명되어 '농지개혁법'을 입안하였으며, 반대 세력에 의해 정치적 이유 등으로 1959년 7월 31일 법살된 우리 나라의 첫번째 지식인이었다. 그후 죽산의 장녀 조호정여사 등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제정으로 대법원에 재심청구되어 2011년 1월 20일 죽산의 간첩죄는 무죄가 되었다. 사후 53년만이었다.
죽산은 1946년 6월 11일, 미 군정 법령 제72호 제8항 위반 혐의로 인천 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에 연행되었다. 그는 CIC가 임시로 마련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열흘 동안 갇혀 지내다 선택의 여지없이 전향을 선택했다. 그는 진정한 통일 민주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혁명노선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현실적 방안이라 여겼다. 즉 공산주의보다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죽산은 6월 22일에 '전향성명서'를 쓰고 CIC를 나와 귀가 했다. 그의 전향의 단초는 CIC에 의해 죽산의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편지(안)이 1946월 5월 7일자 조선•동아•한성일보에 실였기 때문이었다.
좌익 측이 결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 맞서기 위한 민주의원(남조선대한민국민 대표민주의원)이 있었다. 이는 이승만, 김구,김규식 등이 주축이었으며 군정사령관 자문기구였으나 세사람이 각기 자기 주장이 강해 구심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미군정은 대안을 1946년 7월에 결정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찾으려 했다. 즉 민중에게 큰 인기없는 이승만, 지주 자산가 중심의 한민당, 친일파 등 극우 세력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중간세력이 필요했다. 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조선공산당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그 카드가 죽산 조봉암의 전향이었다.
죽산은 조직능력이 박헌영을 뛰어넘는 인물이지만 반조운동에 의해 조선공산당 중심의 권력투쟁에서 박헌영에게 밀여나 있었고, 공산주의의 혁명적 투쟁을 지양하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죽산은 CIC의 서신공작에 의해 반의도적으로 전향된 샘이었다.
미군정의 CIC는 죽산을 회유한다. '선생의 젊은 날에 선택한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의 수단이었다. 해방된 지금은 유효하지 않다'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고함 !'(김영구 저, '12.10, 다솜)에서 언급하고 있다. "많은 진지한 우리 독립투사들은 일본 군국주의에 항거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편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전투에 가담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그들이 공산주의자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20세기 초,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 속에 들어가 싸우다가 죽어간 우리 독립투사들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죽산의 사형 집행 당시 법무장관은 홍진기씨었다. 어느 시대나 죽음이 있으면 죽인자가 있다. 그자가 질병이나 노화던 생사람이던간에 갈등의 근저는 개인과 개인에서 출발하여 조직화된다. 2013.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