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 김대중 평전
김택근 지음 / 사계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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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아내를 포천 천주교  묘지에 묻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며 아내 없이는 평지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 후 그의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동생의 죽음 앞에 가슴을 첬다. 아내와 여동생보다 더 일찍 그의 첫 딸이 세상을 떠났었다. 아내는 죽어서도 줄곧 그에게 힘이 되었다. 

 

 사실 그는 딱 한 번 박정희를 만난 적이 있었다. 1968년 새해 청와대로 세배를 가서 5분쯤 얘기 나눈 것이 그의 일생에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줗은 인상을 받았다.

 

  1980년은 안개정국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지하의 취조실에서 비명소리가 들였다. 그는 이미 내란 음모 사건의 수괴가 되어 있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표정했다.자신이 사형된 다음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정치적 보복을 행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그의 '종범'이라는 사람들과 평생 처음 창자로 애국가를 불렀다. 광주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설렜다. 그는 옥중의 밤에는 흔들렸으나 새벽에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사람이 신념대로 산다는 것과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밀접한 함수관계임을 자각했다.

 

  군사 정권은 그를 이중 독방에 가두고 감옥의 복도를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 버렸다. 분통하였지만 분노하지 않았다. 감옥은 그의 대학이 되었다.그곳에서 독서에 몰입했다.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모든 분야의 책을 읽었다. 수감 중에 600권의 책을 차입하여 정독했다. 그때에 영감과 용기를 주었던 대표적인 책이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12권)였다. '제3의 물결'이 농경과 산업사회 다음에는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한다는비전을 갖게 했다. 그는 상대방의 지식과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의 소유자였다.

 

  정권이 강요한 3년간의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서둘러 위험한 귀국을 했으나 그의 집에 다시 감금되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동교동 교도소'라 불렀다. 1987년 6.29선언으로 사면과 복권이 되기까지 무려 55차례나 가택 연금을 당했다. 부당한 권력은 '민중의 힘' 앞에 무기력 했다. 1997년, 그의 나이 73세에 대통령이 되었다.

 

  2004년 8월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기각된 이후로 박정희가 살해당한 지 25년 만에 야당의 대표가 된 독재자의 딸이 찾아와 그의 손을 잡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1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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