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3
장애령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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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방문했던 경기도 박물관의 야외 영상물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일본군에 고문,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독립운동가의 아내, 아들이 전쟁 현장에서 사망하는 영상물이 지금도 기억 속에 또렷하게 잔영으로 남는다.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 빼앗겼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이 충격을 여러 영화, 생존자, 희생된 많은 인물들의 기록물들을 통해서 이해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도 애국 청년들과 매국노의 첨예한 대립을 통해서 빼앗긴 나라의 국민이 겪는 모멸감과 박탈감이 어떻게 죽음까지 각오하게 되는 저항운동이 되는지 보여준다.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여대생 지아즈가 그러하다.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하고 매국노를 살해하겠다는 암살에 가담한 지아즈를 통해서 소설은 시작된다.

영화만을 기억한다면 이 소설을 전부 이해한 것이 아니다. 영화는 원작소설를 영상미로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전소설 『연인』도 다르지가 않았다. 원작소설을 읽어야 작가와 작품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도 꼭 소설로 읽어야 작가의 작품성을 알게 된다. 읽을수록 작가가 집필한 『색, 계』소설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책이며 그중의 하나가 『색, 계』이다.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젊은 여대생 지아즈는 사랑에 빠지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몰라서 이 선생이라는 사오십 대의 작은 남자인 비밀정보원을 사랑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매국노를 향한 분노와 애국심에 그녀는 나라를 위하는 일에 쓰임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영화 <영웅>의 김고은이 연기한 궁녀였던 설희라는 인물이 떠올랐다. 연기를 하고 있는 지아즈의 아슬아슬한 상황들과 위험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아찔한 걱정까지도 하는 그녀가 애처로웠다.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것임을 이 소설 지아즈를 통해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나랏일에 무관심한 홍콩 사람들에 대한 불만도 토로된다. 나랏일에 적극적인 그녀의 성향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미인계로 매국노를 현혹하는 작전에는 이 선생이라는 인물이 부인을 속이면서 수많은 밀회를 즐기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선생의 부인이 마작을 하면서 다른 부인들과 나누는 모습에는 사치와 부를 과시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부인들이 누리고 있는 그 기회들은 누군가의 생명들과 맞바꾼 것임을 지아즈를 통해서 기억하게 하는 작품이다.

불안과 죽음이 눈앞에 있는 지아즈가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은 소설 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면 부인들은 안락하고 지루한 시간들을 보내는 오락과 사치와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길고 무거운 커튼이 지닌 전쟁 중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유럽풍 물건들, 다이아몬드를 과시하는 부인들과의 대화중에도 위장하면서 연기하고 있는 젊은 여대생 지아즈와는 대립을 이룬다. 지아즈는 작은 식당에서 죽을 먹어도 좋았다고 전하는 인물인 반면 이 부인은 물건을 포기하지 못하는 살찐 이 선생의 부인이다. 마작을 하는 부인들은 지아즈의 비치반지를 보고 얕잡아본다는 것까지도 지아즈는 감지하게 된다.

사랑을 너무나도 뒤늦게 알아버린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버렸지만 모든 것이 너무 늦었음을 알게 된다. 공허해진 지아즈의 마음과 이 선생이 모두 총살해 버린 상황에서 그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을 그녀가 있다는 것을 소설은 엄중하게 이야기한다. 미묘한 감정인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없는 두 인물을 통해서 다루는 작가이다. 표정이 없는 지아즈를 무수히 떠올리면서 나라를 위한 일에 젊은 여자가 어떤 쓰임으로 이용되고 매국노를 암살하겠다는 엄중한 임무에 투입된 그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막을 내렸는지 이 선생을 통해서 단편소설로 전하는 작가이다.

그들이 비밀리에 만났던 아파트는 영국인과 미국인이 주인이었으며 그들은 지금 모두 수용소에 있다고 전한다. 매국노가 빼앗은 것은 지아즈 무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알베르 카뮈도 『계엄령』 희곡을 통해서 자유인은 도형장과 납골당에 있고 노예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수용소가 지닌 의미는 상대적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권력에 거슬리는 자를 수용소로 보내는 것이 권력임을 이 소설의 귀퉁이에서도 발견하는 조약돌이 된다. 『삼체』 소설에서도 공개처형되는 교수가 전하는 의미까지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수용소'의 의미이다.

매국노와 그들의 부인들이 살아가는 삶과 애국단이 되어 치열하게 수행하는 임무의 긴박함과 불안을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 작품이다. 대조되는 집단이 누리는 사치와 부를 향하는 멈추지 못하는 욕망이 부인들과 이 선생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전달된 소설이다.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까지 각오한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지아즈의 성공하지 못한 짧은 생애와 개인적인 경험으로 반박하는 사담까지도 소설에서 짚어내는 소설이다.



정말로 그녀를 얕잡아보는 눈치였다. 14 _ 마작하는 부인들

작은 음식점에서 죽을 먹었는데 그것도 좋았다 - P24

이 사람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너무 늦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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