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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눗방울 퐁
이유리 지음 / 민음사 / 2024년 11월
평점 :
8편의 짧은 소설들이지만 남겨진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소설들 중에 <크로노스>라는 소설이 있다. 문명의 발달이 어떤 결과들을 불러놓을지 함께 상상해 보면서 읽었던 작품이다. 크로노스의 알고리즘이 작동한 결과물이 자신의 눈앞에 기억 속의 엄마로 나타나면서 치매가 걸리기 전의 영특하고 따뜻했던 엄마의 모습으로 다가서지만 이것은 절대로 현재의 엄마가 아님을 알기에 양미의 언니인 피부과 의사는 크로노스를 거부하는 상황이다.
양미는 언니와는 다르게 크로노스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적응한다. 현재 어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있지만 치매가 없었을 때의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자주 크로노스를 이용하게 된다. 양미의 언니에게 청혼을 송 선생도 크로노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만족하는 사람이다.
치매가 어떤 증상인지는 막연하게 알지만 얼마나 주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힘들게 하며 포악해지고 폭력적으로 돌변하는지 소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어머니는 양미의 두 아이들을 키워주면서 생활하였지만 치매 증세가 심해진 날 두 아이를 공격하면서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게 되는 상황이 되면서 두 자매는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선택을 하게 된다.
엄마를 이루던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가면서 우리의 일상도 함께 어그러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20
고유하게 지닌 성격과 억제하였던 모든 것들이 통제되지 못하면서 치매 환자가 드러내는 폭력성이 사실적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통제하였던 이성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주변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일상까지도 와르르 무너져버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나이보다도 어렸던 엄마는 두 자매를 악착같이 키워냈다는 것을 두 자매가 모르지 않는다. 매일 씩씩하게 키워낸 엄마, 용감하게 삶을 감당하였을 엄마이다. 그런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기까지 두 자매는 쉽지 않았다는 것도 전해진다.
엄마는 언제나 두 자매가 정했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응원한 분이다. 무엇을 정했는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두 자매가 엄마의 치매 증세로 나날이 힘겨워지는 일상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크로노스를 통해 누군가는 현재의 상황을 힘차게 이겨내는 딸도 있고 크로노스를 부정하면서 힘들어하기도 한다. 이 두 자매가 크로노스를 통해 어떻게 화해하고 청혼한 송 선생의 삶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한다. 엄마의 젊은 날의 삶과 자신들의 삶은 분명히 모든 것이 다르게 전개된다. 양미가 이혼을 하는 날 엄마가 사 왔던 꽃다발의 색깔까지도 크로노스에 저장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고난이 찾아온 딸에게 축하한다는 꽃다발을 건넨 엄마이다. 양미의 두 아이도 치매 증세가 있는 외할머니의 공격에 상처를 입어도 이해하는 모습으로 그리워한다는 것을 아이가 만든 할머니를 위한 선물에서도 보여준다. 어린아이들도 두 명의 외할머니를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피부과 의사인 언니도 크로노스를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리운 사람이지만 다시는 자주 볼 수 없는 기억 속의 어머니를 크로노스라는 문명을 이용해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있는 가상의 이야기가 꽤 진지하게 펼쳐진 소설이다. 노의사가 자신이 치매가 걸리면 어떤 선택을 할지 미리 동료 의사에게 부탁한 책 내용이 떠오른다. 치매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인격체로 받아들여야 할지 이 소설을 통해서도 다시금 진지하게 고찰하게 한 작품이다.
지금 내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엄마가 혼자서 얼마나 악착같이 나와 양미를 키워냈는지 모르는 우리가 아니었다. 엄마라고 우리를 어디다 떼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없었을까. 한 번도 힘든 내색 없이 매일 씩씩하고 용감하게 삶에 임했던 엄마를 이제 와 남의 손에 내맡길 수는 없었다. - P21
그렇게 정했다면 그게 맞는 거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정했든 상관없었다. 그 순간 그건 정말로 맞는 게 되고 나는 모든 게 이대로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테니까. 항상 그랬던 것처럼.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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