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자를 읽지 못하는 여성들이 문학에 등장하는 시대가 있다. 위안부 소설 민음사 『간단후쿠』에서도 글을 읽지 못하는 여성이 등장하며 위화 장편소설 『원청』에서도 '샤오메이는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407쪽)고 전해진다. 왜 여성들을 배움의 기회에서 배제시켰던 것인지가 중요해지면서 배워서 아는 세상이 많아지고 지각이 넓어지면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서 딸이 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아버지들이 존재하였음을 떠올리게 된다.
글을 읽고 생각을 하는 힘이 생겨나면 복종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여성이 자신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던 것이다. 파과 영화의 원작소설에서도 가난하고 자식이 많은 집안에서 밥숟가락 들어줄 여자아이를 다른 집에 보내는 일이 일어나면서 등장인물의 삶은 타인에 의해 휘어지고 굴곡진 삶으로 전개되는 것을 짙은 채도로 전개하는 소설 속의 여성 주인공을 떠올리게 된다. 여자로 태어난 이유만으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기저기 던져지고 버려지고 배제되고 삭제되는 운명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는지 질문을 멈추지 않게 하는 문학을 마주할 때마다 큰 숨을 내어쉬면서 한숨을 쉬게 되는 문학들을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화 소설 『원청』에서는 시어머니의 학대로 민며느리가 스스로 자살하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교육의 기회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제되면서 글을 읽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안타까움은 착취당하는 존재로 여성의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글을 읽지 못하는 국민은 없는 시대이지만 글을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숙고의 시대를 살지 못하도록 문명의 방해에 노출된 시대임을 떠올리게 된다.
읽고 생각하는 독서의 힘은 자본주의와 대조적인 힘을 지니기에 숏폼으로 추려지고 요약되는 것으로 한 권을 읽었다고 확신하는 것은 읽는 힘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책을 읽고 무수히 밑줄 치면서 차곡히 간직한 문장들은 어마한 힘을 무장한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뿌리가 내리지 못한 인생은 광고의 힘에 휩쓸려가고 망가지기 마련이다. 그 시대의 남성이 여성에게 원한 여성상은 순종하고 아내, 딸이라는 여성이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유행에 민감하게 움직이면서 소비에 거침없는 시대를 원하는 것이 목표임을 목도하게 된다.
원청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잔혹한 토비에게 희생된 기생의 죽음을 응시하게 된다. 가난한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 토비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죽임을 당하느냐 토비가 되어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면서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지 그 무엇도 현혹되지 못할 운명에 놓여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고전소설에서도 권력의 답습에 순응하고 복종할 것인지 프랑스 혁명으로 표출된 피권력층의 분노는 그 무엇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상되지 못한다. 억울하게 권력층인 귀족의 성 노리개가 되어 남편도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여성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마약성분을 강제로 먹이면서 권력이 저지른 악행에 남겨진 가족이 억울함을 억누르면서 보복하는 술집 사장의 아내의 이야기도 광적인 모습을 엿보게 된다.
프랑스 혁명에서 단두대로 사용된 나무에 대한 작가의 응시와 나무의 쓰임이 수많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사연을 들려주게 된다. 더불어 십자가의 의미도 단두대와 같은 죽음을 상징한다. 밤이 되면 수많은 십자들이 마을과 도시를 알려주는 십자가이지만 '사랑하라'는 의미와는 멀어지는 수많은 악행과 전쟁, 재판과 혐오, 차별로 치열하게 다투고 싸우는 전쟁터를 지금도 많은 소음과 형태로 표출되고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수평보다는 수직을 선호하고 계급을 나누면서 수치화하는 현상을 둘러보게 된다. 『향수』라는 영화의 내용이 처음에는 놀라웠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영화 작품의 의미는 더욱 강열하게 자리잡는다. '사랑하라'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민며느리를 구박하여 자살하게 만든 시어머니에게서, 평생 착취당하면서 남편과 시댁에 구박당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딸로 키워서 결혼시킨 수많은 아버지들에게서, 귀족의 삶을 유유히 이어갈 거라고 믿고 악행을 수없이 저지른 『두 도시 이야기』의 귀족에게서, 위안부를 만들어서 착취한 수많은 이윤을 챙긴 사람들에게서 무엇이 부족하였는지 찾게 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그들의 삶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백을 주장해도 듣지 않았던 『두 도시 이야기』의 혁명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모순된 태도에 이슬처럼 사라졌을 젊은 재봉사 처녀의 죽음까지도 쉽게 사라지지 않게 된다. 누가 권력을 잡아도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 작품들을 통해서 확인한 시간이다.
샤오메이는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 P407
민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구박받고 욕먹고 얻어맞는 건 시진에서 아주 흔한 일... 견디다 못한 민며느리가 목을 메거나 우물에 뛰어든 일도 8년 동안 몇 번이나 보고 들었다. - P4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