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에서 흐름을 찾았던 일독의 시간도 의미가 있었던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이다. 하지만 굵게 밑줄 그은 문장들을 읽고 또 읽을수록 작가의 심중을 깊게 마주하였던 소설이기도 하다. 난해한 인물을 앞세웠던 이유와 가면 같은 삶의 움직임 뒤에서 감지해야 할 깊은 의미는 다독으로 서서히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게 된다. 일독이 아닌 익혀가면서 다시 읽는 다독이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부르주아의 가면 같은 정의의 의미를 보게 된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것이라는 소수집단이 존재한다. 부르주아가 목청을 높여서 다수에게 외친 정의의 의미부터가 다르다는 사실을, 그들의 정의와 군중의 정의는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하게 된다. 공적 존재와 사적 존재는 양분한다는 사실을 <시녀 이야기>의 권력을 손아귀에 쥔 이중 생활자의 모순에서도 드러난다. 공적 존재가 무대위에서 이미지화된 가공된 물질적 존재라는 사실부터 짚어낼수록 사적 존재는 이물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적 존재의 흐트러진 사실적이고 물질적인 존재가 어김없이 선명해진다. 이와 같은 양분적인 부르주아를 작가는 알고 있었음을 소설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신조라고 단정 지을 만큼 부르주아의 속임수를 꿰뚫고 있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야 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더욱 그의 작품은 매료된다. 인물을 향해 폭풍 같은 감정을 휘어젓게 된 이유에 부르주아의 속임수를 간파하게 된다. <매니악>소설의 인물도 다르지가 않다. 아내가 기억하는 천재 물리학자의 공적인 존재와 사적인 존재는 이 소설의 인물처럼 양분되는 모양새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부르주아만이 속임수를 쓴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강조되는 이유에 질문을 하게 된다. 역사 속에서도 이 명제는 증명된다. 소설이 시작되는 이야기에서 이 전체를 이루는 흐름의 기류를 암시하는 문장이 전해진다.
병영생활과 학업지속금지는 검은 표지라도 비유된다. 전혀 잔혹하지 않고 온건한 하사를 바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태고의 시간들>과 <시녀 이야기>소설 중의 군인들과 권력이 보여준 잔혹성을 떠올리게 된다. 잔혹성이 정당함을 부여받는 군인들이 있다. 악의 근원이 정당해지는 집단이 사회 속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전역한 군인들의 영혼이 얼마나 황폐해지는지 사실적으로 고발하는 소설들이 즐비하다.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소설, <카시지>, <눈먼 암살자>, <모두 다 예쁜 말들>도 그중의 하나이다.
총을 잘 쏘는 하사가 있다. 총을 잘 쏘는 이유는 제국주의자가 과녁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한다. 유럽 역사와 작가의 생애에 대한 고찰적 사유를 확인하게 된다. 격동하는 시대의 제국주의는 유럽과 전세계 역사를 뒤흔들게 된다. 작가도 제국주의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던 시대의 희생자이다. 부유하는 존재처럼 살아야 했던 이유가 작품에서도 감지된다. 헌나 아렌트와 아인슈타인, 매니악 소설의 과학자들도 다르지가 않다. 제국주의가 얼마나 많은 인류들에게 공포와 슬픔을 남겼는지 하사가 총을 잘 쏘는 이유에서 함축적으로 시사성을 전하고 있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는 밀접해진다. 그의 생애를 이해한 후 <농담> 소설을 다시 읽을수록 이야기보다 짙은 농후한 슬픔이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