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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그는 하인이 되지 않도록 선을 지키려고 애썼다. 하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집안에 의무를 지고 있지만 주제넘게 굴지는 않는 딸린 식구로 남고 싶었다. 274
한 권의 장편소설은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202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장편소설 3권을 모두 읽었다. 한 권의 이야기들마다 작가의 목소리는 묵직하다. 이 작품도 그러하다.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은 전쟁과 군인, 살육, 난폭성, 전쟁의 잔인함과 미처가는 군인들의 눈빛과 죄의 흔적들이 담겨있다. 편협한 사고와 가치관이 선택하는 오점들의 기나긴 흔적들이 그려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소녀의 오빠와 남편이 선택한 젊은 날의 전쟁은 얼마나 빛이 났을까? 그들이 믿었던 독일군을 위한 희생은 진정한 삶이었을까? 전쟁에 광포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식민주의에 이용된 아프리카인들의 희생을 볼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남겨진 가족들과 전쟁으로 이유 없이 희생된 이름 없이 사라진 많은 사람들도 그려내는 작품이다.
넌 네 생일을 직접 고를 수 있어. 163
이 애는 열여섯 살이에요. 여자아이가 결혼하기에는 완벽히 정상적인 나이죠... 이건 무식하고 편협한 짓이오. 164
독일군으로 스스로 참전한 아프리카인 오빠를 기다리는 어린 소녀가 있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들로 점철되는 소녀의 기다림의 나날들이 떠오른다. 친부모에 대한 기억도 없는 소녀이다. 친오빠가 있는지도 몰랐던 소녀이다. 이 소녀가 노예처럼 살았던 곳의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가정도 기억나게 한다. 그곳에 다시 돌아간 소녀가 당해야 했던 수모와 고통의 순간, 폭행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가지는 문명의 힘은 컸다. 소녀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던 용감함과 구출되고 보호받으며 살았던 또 다른 가족과 같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전개된다. 전쟁은 금방 끝날 거라는 희망만을 가지고 참전한 친오빠의 생사 소식은 기나긴 세월로 그려질 뿐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듯한 나라에서... 또 한 번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 가운데 쓸모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22
그들은 결혼식 전에 만나지 못했고, 심지어 결혼식 때도 만나지 못했다. 23
<낙원>작품을 먼저 읽고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 등장인물의 이후 이야기가 이 작품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에 깊숙하게 흐르는 가부장적인 사고와 관습, 여성들이 스스로를 더욱 옥죄는 관습들이 이 작품에서도 마주하게 된다. 결혼제도가 여성을 불안하게 하고 친절함을 사라지게 하며 시기와 질투로 여성이 여성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소원하는 모습들도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소녀였던 아이가 젊은 아가씨가 되면서 받게 되는 시기와 질투, 오해들로 불안정한 결혼으로 밀어 넣고자 몰아넣는 여성의 모습도 기억나게 하는 작품이다. 여성의 재산권은 온전하지 못하고 여성의 사랑과 결혼도 불안해 보이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 혼돈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찾고, 자신의 감정을 감지하며 용기 내면서 살아내는 두 젊은 연인들의 사랑과 결혼도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가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 뿌리 뽑힌 사람, 헐렁헐렁 떨어지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 어느 날 문득 나타나지 않고 영영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283
다른 사람에게 매인 몸이 되는 것, 다른 인간에게 신체와 영혼을 소유당하는 것... 그보다 큰 치욕이 있는가? 상인은 ...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수치심을 느꼈다면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 315
고의적으로 그녀를 때렸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막을 힘이 없어서 때렸다. 51
온전한 신체로 출생한 두 젊은 연인이 있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먼 어른들이 어린 소녀를 폭행하며 한 손을 온전하게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놓는다. 또 다른 소년은 잔혹함과 난폭성에 물이든 독일 군인에 의해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며 긴 시간의 회복 기간과 통증에 시달리는 날들로 채우게 한다. 두 젊은 연인이 가지고 있는 흉터와 얼룩진 이야기들은 서로의 사랑과 온기로 서로를 채우기 시작한다. 이들이 가진 것은 없다. 이들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가부장적인 사회, 여성의 핍박, 식민주의에 광적인 집착, 피로 물드는 땅,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가진 위력, 유럽 나라의 욕망, 전쟁의 피폐함, 인간성의 상실, 생존 군인들의 남은 날들의 고통과 눈물 등이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자식의 이상한 증세를 보면서 자신이 전쟁 중 저지른 죄를 떠올리면서 고통받는 모습도 보인다. 한 가정에 죽어가는 사람과 태어나는 아이가 공존하면서 전개되는 이후의 이야기도 꽤 흥미롭게 전개된다.
싸울 사람을 찾느라 눈이 벌겠다. 82
전투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군인이 아프리카인(독일군)과 인도인(영국군) 이었다. 141
우리는... 민간인들을 괴롭히고 썰어버리는 걸 좋아하는 무자비하고 화가 난 짐승들이지. 우리 장교들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횡포한 전문가들... 우리가 없으면 독일령 동아프리카도 없어. 우리를 두려워하라고. 168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 이 나라 전체에 해골과 뼈가 흩뿌려지고 땅이 피로 젖을 만큼 사람을 죽였어. 70
목사의 천성은 엄격. 프라우는 애쓰지 않아도 착하고 배려 깊고 관대한 사람. 결코 잊지 못할 거야. 337
긴 세월을 기다렸던 오빠의 생존 소식과 이후의 이야기들도 놓치지 않고 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쟁의 훈장을 고대하면서 신청하는 참전 군인의 마음과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의 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에 땀과 눈물이 범벅되는 인물은 대조를 이룬다. 신을 향하는 신전과 예배, 정기적인 행사들은 울림 없는 허상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읽은 작품이다. 인간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모든 마음과 행함들이 신을 위한 것인지, 인간의 욕망을 향하는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피로 얼룩진 아프리카 땅의 이야기들이 문학으로도 만날 수 있었다. 작가의 나라, 작가의 작품들은 몰랐던 역사와 이야기들이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만났다. 그리고 전쟁이 가진 난폭성과 잔혹성을 또다시 마주한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