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마리즈 콩데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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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 마리즈 콩데 장편소설 / 은행나무 출판사 / 2019년 독서

2018 대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대표작

여성 문학 대상. 일드프랑스 젊은 독자 대상

은행나무 출판사 책이라 믿고 문을 두드려본다. 책 제목처럼 책표지도 충분히 암시성을 충분히 띤다. 노예에 관한 책들을 꾸준히 읽어왔다. 저마다 작품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색을 발산한다. 이 소설은 또 다른 빛으로 인도되어준 소설임에는 분명하였고 사실성을 바탕으로 작품이 구성되었기에 더욱 밀착하면서 이야기와 함께 '티투바'그녀를 만나보게 된다. 노에라는 단어 자체가 참 이질적이다. 세상을 배우면서 가장 낯선 단어 중의 하나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아야 하는데 왜 노예라는 단어와 함께 얼룩진 사람이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티투바,흑인여성, 검은 마녀라고 불리는 여성이다. 그녀가 존재하기까지 어머니가 자신을 어떻게 잉태하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십 대의 엄마이다. 노예로 팔려가는 배에서 선원에게 강간을 당하는 어린 엄마는 그렇게 백인 주인에 의해 흑인 양아버지를 가지게 된다. 양아버지가 보여준 엄마를 향한 사랑과 자신이 태어났을 때 아이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엄마에게 아이를 안아주라고 끝없는 사랑을 가르쳐주는 양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왜 엄마가 자신을 끝없이 밀어내고 있었는지 그녀는 회상하며 엄마가 백인 주인을 죽일뻔한 사건으로 엄마와 양아버지가 죽게 되는 사연까지도 이야기한다. 어린 그녀는 그렇게 세상 속에 버려진다. 버려진 어린 흑인 소녀는 흑인 양어머니가 거두어서 키우게 되는데 그 양어머니는 마녀라고 불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마녀. 영적 능력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치유하고 선한 일에 타인을 위해 베풀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부른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그녀는 그러한 양어머니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식물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그녀도 마녀라고 불리게 된다. 백인의 소유가 아닌 자유인인 티투바. 그녀는 홀로 집을 짓고 가축을 사육하면서 산다. 우연히 만난 한 남자를 사랑하며 그녀는 백인의 노예를 자처하면서 그 남자와 부부가 되고 백인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굴곡진 이야기들로 시작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처음으로 청교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경직되고 억압되는 종교의 위선을 보게 된다. 성경 말씀을 말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판단과 거친 행동 특히 모함하며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생명을 하찮게 대하는 위선적인 종교인의 모습들이 소설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목사가 보여주는 가부장적인 모습부터 떠오른다. 아내와 자신의 아이에게 매질을 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이다. 아이는 놀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이로 성장한다. 종교가 가진 위험한 선을 상당히 넘어선 모습들이 많이 등장한다. 죄를 고백하라는 매일 반복되는 기도의 시간. 그들의 신은 과연 그들의 기도를 듣고 있는 것일까.

화자는 마을 사람들의 모함으로 마녀사냥을 당하게 된다.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는 티투바. 그녀는 이 경험으로 자신의 남편이었던 사람의 본모습까지도 알게 된다. 마녀사낭의 맨 앞줄에 서서 그녀에게 보이는 모이는 모습까지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실제 사건이 배경인 만큼 그 당시 감옥에서 드는 비용을 청구 받은 그녀는 지불할 돈이 없어서 다시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녀의 백인 주인은 그 비용을 지불의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교수형을 당하라고 그녀를 모함해서 감옥에 보낸 백인 주인이다. 그의 직업은 목사이기도 하다. 소설은 상당히 모순적인 인간들의 모습들을 낱낱이 들어낸다. 종교가 가진 진정한 의미는 사랑이며 희생이며 자비이다. 하지만 목사에게서는 어디에서도 선한 흐름을 읽어낼 수가 없다. 지식적으로 읊조리는 성경 말씀과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기도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거듭 말하는 그러한 위선적인 모습의 종교인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아내가 죽음 앞에 있을 때도 목사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티투바에게 그 사실을 전하게 된다. 그녀도 그러한 목사의 모습과 목소리에 놀라워한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의 동요가 없는 바싹 마른 건조된 사람을 목도하게 된다. 티투바는 목사 아내를 살려낸다. 자신의 가진 치유의 지식들을 동원해서 극진히 살려낸다. 하지만 그녀를 마녀사냥하는, 그녀를 죽음 앞에 가져다 놓은 목사 부인과 목사의 딸의 모습까지도 우리는 묵묵히 지켜봐야 한다.

흑인. 노예.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생산성의 가치로써 그들은 값어치로 매겨진다. 신체를 검사하고 생산성이 있는지부터 검사한다. 그리고 그들은 가격으로 매겨지는 물건일 뿐이다. 그렇게 동물처럼 다루는 백인의 사고는 늘 질문이 된다. 시대는 한정적이지 않다. 지금의 시대에서도 노예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가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한 것을 느껴보게 한다. 티투바. 그녀. 그녀는 견디기 힘든 모진 역경들을 경험하게 된다. 백인들이 보이는 모욕적인 말들, 명령들, 폭력, 추위와 가난까지도 경험한다. 아기가 잉태되어도 태어나지 못하게 스스로 아이를 배속에서 죽이는 슬픔을 보여주기도 한다. 왜 그녀가 아이를 원하지 않았는지도 충분히 이해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아프게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복수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나타나는 양어머니의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금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로 참아내는 모습들을 보인다. 그녀는 선한 이미지의 마녀이다. 치유해주고 상처를 매만지는 마녀이다. 그녀는 사랑을 끝없이 갈구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선천적으로 반항하고 굴복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그녀이다. 그녀는 그렇게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다. 그리고 인간이 보이는 배신이라는 사건으로 교수형을 당한다. 하지만 그녀는 죽음마저도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서 받아들인다.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그 세상을 알고 있기에 ... 에필로그에서 그녀가 아이와 나누는 대화 내용도 깊게 기억 속에 자리 잡는다.

왜 우리는 노예고 저들은 주인인 거죠?

왜 신이 하나뿐이죠? 노예들의 신도 하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주인들에게는 신이 하나 있잖아요?

세상의 보이지 않는 형체를, 세상에 퍼져 있는 소통망을, 상징인 신호들을 간파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277쪽)

그녀는 죽음 이후에도 사랑을 보여준다. 노예제도를 유지하며, 유지하고픈 백인의 모습과 자유를 주지 않고 소유하고 있었던 유대인인 주인의 모습을 통해서도 작가는 작품으로써 목소리를 전한다. 유대인 주인은 자신의 자녀들을 모두 신께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깨닫게 된다.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신의 음성을 듣게 되는 유대인의 모습으로도 작가는 독자들과 호흡하고자 하고 있다. 마녀는 누가 만든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만든 마녀. 자신들만이 우월하다는 우월성이 가지는 위험한 모순들을 이 작품에서도 만난다. 아직도 노예라고 지칭되는 그들이 있다. 흑백논리를 넘어서는 또 다른 노예들까지도 떠올려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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