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8
김민하 지음 / 텍스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운동권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거부감을 느끼게 되거나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불만만 많은 패배자들로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레닌과 오타쿠

어떻게 생각해도 레닌과 오타쿠는 어울리는 점이 쉽게 떠올려지지 않게 되지만 달리 생각하게 된다면 무척 비슷한 점들이 떠올려질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하나로 겹쳐져 있는데, 본문에서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는 하지만 레닌은 실제 현실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었다면, 오타쿠들은 가상세계 속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을 쫓고 있다는 / 이상적인 세계를 찾기 위해서 가상세계로 빠져든다는 점에서, 둘 모두 자신들의 세계를 완성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같은 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모두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기 보다는 현실 너머를 꿈꾼다는 점에서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인 김민하는 그저 괴짜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을 동일한 모습을 가진 특별히 다를 것 없는 비슷한 점들이 더 많은 사람들이라며 가볍게 접근하고 있고, 그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치적인 관심이 적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정치적인 각성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다는 의미로서 레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레닌에 전혀 알고 있지 않았고, 게임과 만화 그리고 수많은 취미에만 빠져 지냈던 그저 오타쿠였던 저자가 어떻게 레닌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정치적인 각성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흥미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

저자인 김민하는 게임에 빠져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부터 꺼내놓으며 어떻게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얘기해주는데, 꼼꼼하고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어린 시절에 대한 상세한 기억을 갖고 있고 그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그의 외골수적인 성격과 그 당시로서는 그렇게 느끼진 않았지만 점점 깨닫게 되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 느껴졌던 불만과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과 방식을 어떻게 가상세계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지를 얘기하주고 있다.

그렇게 일상을 통해서 경험하고 알게 되어가는 수많은 모순들과 ‘노무현 열풍’으로 인해서 정치에 그리고 사회 문제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통해서 흔히들 말하는 진보운동 영역으로 접근해가는 과정을 들려준다.

대학 생활의 여러 일화들과 개인적인 경험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서 좀 더 직접적인 운동권 활동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와 그리고 본인의 삶의 여러 난관들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를 솔직하게 그리고 애처롭지만 낙관적인 시각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그저 사회에 불만만 많은 꽅통들로만 생각되는 운동권 사람들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과 그들도 어떤 강렬한 계기나 의식을 갖고 진보적인 입장과 실천을 하게 된 것이 아닌 조금 더 적극성을 갖고 정치적인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점들을 통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정치라는 것이 그리고 하나의 실천이라는 것이 아주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주고 있다.

물론, 저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삶일 것이고 선택일 것이지만, 그정도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일상생활 속에서도 정치적 인식과 실천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읽는다면 무척 흥미롭게 그리고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닥치고 정치를 말하는 세상에서

쫄지 말라고 서로를 응원하는 세상에서

어울리지 않게만 느껴졌던 레닌과 오타쿠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비슷한 점이 더 많을지도 모르듯이 일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운동권 활동가들의 삶도 어쩌면 일상에 짓눌려 지내는 우리들의 삶과 마찬가지의 삶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들의 평범한 삶도 언제든지 그들처럼 특별해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크게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던 것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의 전복 - 자크 라깡 또는 제2의 정신분석학 혁명
페터 비트머 지음, 홍준기.이승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페터 비트머의 ‘욕망의 전복’은 그동안 접해보았던 라캉에 관한 여러 연구자들 중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독일 출신의 연구자이고(국내에 번역된 연구자들은 대부분 미국 혹은 프랑스 출신이다), 독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다른 연구자들에 비해 독특한 시각을 보이지는 않고 있지만 어쩐지 조금은 색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1998년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소개된 라캉과 관련된 입문서들 중 초기에 소개된 저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라캉의 논의를 상세하게 검토-응용하고 있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라캉의 논의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무척 어렵게 읽혀지지는 않고 있지만 역시나 라캉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그다지 쉽게 읽혀지지는 않게 되는 것 같다.

번역을 두명이 나눠서 했기 때문에 용어에서나 번역된 내용에서나 조금은 불만족스러운(혹은 일치되지 않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라캉의 여러 논의들을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입문서이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페터 비트머는 라캉의 여러 논의들을 하나씩 검토해가며 설명해주고 있고, 라캉이 어떠한 인물인지 그리고 그가 대체적으로 어떤 입장에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주며 내용을 시작하고 있다.

라캉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데 가장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거울단계’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상상계와 상징계, 그리고 상징계의 핵심인 주체에 대해서와 라캉의 논의에서 수시로 등장하는(그리고 그의 논의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기표와 기의, 환유와 은유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고, 다른 라캉과 관련된 입문서와 연구서들에서 ‘읽는 사람이 안다고 가정하고 논의되는 경우가 많은’ 네가지 담론에 대해서와 보로매우스의 매듭에 대해서 읽는 사람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른 라캉에 관한 연구서와 입문서들에 비해서 무척 명확하고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입문서로서 충실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역시나 난해하고 어렵기만 한 라캉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에 그저 쉽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나마 다른 라캉과 관련된 연구서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는 네가지 담론과 보로매우스의 매듭에 대해서 조금 더 관심을 갖도록 쉽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라캉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른 입문서들보다 가장 먼저 읽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쉽진 않지만 그나마 도전해볼 의욕은 갖게 하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쉽게도... 내 도전은 가볍게 실패한 것 같다.

누구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줬으면 정말 좋겠다.

‘욕망의 전복’에 대해서 아쉬움을 한가지 말하자면, 이론적인 논의에 많은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임상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라캉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이론과 임상에 대한 논의로 논의 자체가 나눠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분리 혹은 분할이 긍정적이기 보다는 좋지 않은 점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하게 되어서 조금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참고 : 라캉이 제대로 된 발음인지, 라깡이 맞는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용어든 발음이든 무엇 하나도 통일될 것 같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 두리신서 12
F.엥겔스 / 두리미디어 / 1988년 9월
평점 :
절판


엥겔스는 노동자들은 고통 받는 계급 이상의 존재임을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 레닌 -

맑스(마르크스)와 항상 함께 논의가 되는 엥겔스는 그렇게 당연한 듯이 함께 논의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엥겔스 본인만의 독자적인 논의가 특별히 이뤄지지 않(았)거나 혹은 논의가 된다고 해도 긍정적인 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부정적인 평가를 위해서(그가 어떻게 맑스를 오해하도록 만들었는지 혹은 맑스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논의를 했었는지, 맑스의 메모들을 얼마나 미흡하게 정리했는지 등)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점점 더 그에 대한 논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맑스와의 우정과 동료애,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 등)만이 다뤄질 뿐일 것 같고, 학문적인 혹은 이론적인 논의는 맑스와 분리되어 별다른 논의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의 맑스에 대한 그리고 레닌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다시금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도 엥겔스에 대한 논의는 거의 혹은 전혀 이뤄지지 않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당시로서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엥겔스의 논의들은 혹은 그의 분석들은 관심이 덜해지고 있기만 한데, 그런 그의 저작들 중 유일하게 여전히 관심을 갖게 되는 저작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인 것 같고, 그의 초기작인 ‘... 상태’는 19세기 노동자들에 대한 일종의 상세한 실태 보고서이기면서 자본주의 초기에 얼마나 가혹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는지에 대한 가장 현실감 넘치는 풍경화일 것 같다.

노동자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글로써 담아내는 무수한 시도들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이고,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의도적으로 가혹한 삶을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만들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깨닫게 만들고 있다.

엥겔스의 ‘... 상태’ 이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혹은 노동 환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펴보고 있는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잇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그들의 시각으로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19세기의 노동자의 삶의 모습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어떻게 그들의 그런 삶으로 내몰려졌는지에 대한 일종의 원인 분석을 하고 있고,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증기기관 / 방적기계의 발명이라는, 기술 발달로 인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 혁명이 가장 큰 원인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연관관계로서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이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이뤄진 오직 이익과 이윤을 만을 위한 과잉된 노동 그리고 잔인하기만 한 노동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그들의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노동자 계급이 (되어) 잔인한 세상 속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가혹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게 되었다고 엥겔스는 분석하고 있다.

엥겔스의 표현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인간으로서 대접받기 보다는 그저 ‘땀 흘리는 기계’였을 뿐이었다.

엥겔스는 19세기의 노동자 계급의 삶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서 우선은 산업 분야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고, 분업과 기계화가 그들이 인간이 아닌 기계가 되도록 만들게 되었다는 점과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어 생겨난 도시화의 여러 문제(주거, 불결한 환경 등등)들을 언급하며 얼마나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대도시에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면서 생겨난 슬럼가에 대한 상세한 실태를 파악하면서 얼마나 그들의 비참함 환경 속에서 놓여 있는지를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고, 그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한 과도한 음주 문화와 무절제한 성생활과 그리고 밀집화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엥겔스는 단순히 노동자들의 주거와 생활상 그리고 비참한 삶의 모습들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그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그런 생활을 해나가도록 만들고 있는 ‘경쟁’을 유도하도록 하는 사회구조와 그 ‘경쟁’이 어떻게 비참함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이후 각 업종별 노동환경과 실태에 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고, 그런 비참함과 가혹함으로 인해서 점점 더 쌓여져만 가는 불만과 분노가 어떤 방식으로 노동운동으로 표출되는지와 이익에만 몰두하는 부르주아들의 모습들을 비교하며 부르주아들이 전혀 이런 상황을 개선하거나 완화할 의지나 생각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곧 일어나리라 생각되는 혁명에 대해서 우연이 아닌 논리적인 귀결로서 이해시키려고 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런 엥겔스의 혁명에 대한 낙관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결론과는 다르게 혁명이 일어나기 보다는 조금씩 개선되고 변형되는 모습으로만 자본주의 사회는 변화를 보이고 있었고, 여전히 그런 변화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혁명에 대한 낙관을 빼놓고 본다면 19세기의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이처럼 상세하게 담아내고 있는 엥겔스의 논의는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무척 놀라운 시도였고, 여전히 찾아보도록 만들고 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대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고, 지금은 분명 그 당시보다는 많이 나아진 환경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때와 변함없는 환경 속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엥겔스가 바라본 노동자 계급의 삶의 모습은 하나의 과거의 모습이면서도 여전히 현재의 모습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겉모습만 조금 달라졌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변한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엥겔스의 저작은

그리고 수많은 고전들은 바로 그런 오해들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만하면 좋은 부모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성일 외 옮김 / 창지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는 정신분석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정신분석을 대표하는 프로이트와 라깡에 관한 저작들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관심을 채우고 있었는데,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관심이 조금 더 넓어져서 아동의 심리에 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되어서 간단하게라도 아동들에 대해서 그리고 부모들과의 관계에 관한 책을 찾던 중 고르게 된 브루노 베텔하임의 ‘이만하면 좋은 부모’는 나름 괜찮은 책으로 알려졌다는 평가를 보고 읽어보게 되기는 했지만 생각보다는 쉽게 읽혀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번역에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들게 되는 부분이 간간히 있었고,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읽혀지지는 않음에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읽게 되었는데, 전반적으로 아동들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동들의 ‘심리’에 집중하기 보다는 부모가 아동들을 ‘양육하는 과정 / 양육을 위해 필요한 바람직한 본보기’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특정 시기의 아동기가 아닌 무척 폭넓은 기간으로서 아동기(아동기기 보다는 아동-청소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체계적으로 시기적인 구분을 하고 있지 않아 난해하다는 기분이 앞서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심리학자 혹은 전문가의 입장에서 아동들에 대한 내용을 다루지 않고 아동과 관련된 여러 경험들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이기 보다는 사례집과 같은 느낌이 강하기는 했지만, 많은 내용에서 흥미를 잃지 않도록 여러 방법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중반부에 ‘놀이’와 관련되어 논의하는 내용에서는 큰 관심을 갖게 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산만하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여러 주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어서 쉽게 읽혀지진 않았었다.

각각의 경우에 따라서 생각이 들게 될 때마다 찾아보면서 읽어가는 것이 더 잘 읽혀지고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종의 사례집이나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이 드는 내용 구성이라는 생각이고, 정신분석과 무의식에 관한 상세한 탐구가 아닌 심리학으로서 그리고 자아형성-자아심리학과 관련된 내용으로서 내용이 구성되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와는 거리감을 갖고 있는 내용이기도 해서 크게 흥미를 끌지 못했던 것 같다.


다른 기회에 다시금 읽어볼 기회가 생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에도 만족감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관심을 갖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을 읽어 무척 힘들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경제침체와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논의들로 인해서 다시금 맑스(마르크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었는데, 그 활발함에 레닌에 대한 재검토가 더해지면서 좀 더 자본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변화를 요구하는-독촉하는 논의들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다시는 꺼내지지 않을 것 같았던 레닌에 대한 논의들이 다시금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 같기도 한데, 이런 레닌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 중 슬라보예 지젝의 위치는 무척 특별하고 인상적일 것이다.

지젝으로부터 시작해서 레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분명 지젝으로 인해서 레닌을 다시 접하게 되고, 새롭게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지젝 본인도 최근에 발표하고 있는 저서들을 통해서 자주 그리고 무척 다양한 방식으로 레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이 다가온다’는 이런 지젝의 관심과 최근의 논의가 어떤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지젝이 레닌을 끄집어내게 된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지젝은 레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보다는 레닌과 같은 시각으로 혹은 레닌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레닌을 논의하기 보다는 그를 구실로 자신의 논의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느껴지도록 의도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레닌을 하나의 구실로서 언급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아마도 모든 이들이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을 때조차 혁명을 꿈꾸던 레닌처럼 모든 이들이 혁명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는 현재의 시대에서 여전히 혁명을 꿈꿔야 한다는 지젝의 입장을 레닌을 통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젝은 그동안의 레닌에 대한 논의와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레닌을 재검토 하고 있고, 여느 때처럼 헤겔과 맑스, 그리고 라캉과 온갖 대중문화를 연관시키며 레닌을 옹호하고 재검토하며 그의 진정한 의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항상 그렇듯 지젝은 정신없이 온갖 사례들을 뒤섞으며 자신의 논의-수다를 진행시키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의 주장이나 논의보다 오히려 여러 예들이 더 인상적이고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지젝의 레닌에 대한 논의는 일종의 해석일 것이고, 하나의 옹호이며, 약간은 지나침이 느껴지는 정당화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젝은 여러 방식을 통해서,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헤겔과 라캉과 기타 여러 학자들의 논의들을 레닌에 적용해서 다시금 레닌을 재정립시키고, 예수를 형식화한 바울처럼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라캉처럼 그리고 맑스를 형식화했다고 평가하는 레닌처럼 지젝은 레닌을 새롭게 형식화시키고 재검토하고 있고 자신처럼 레닌을 다시 보도록 하기를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지젝은 그동안의 레닌-스탈린 시대의 여러 문제점들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그런 방식으로 그 시대를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인 모습들을 거두도록 시도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지젝의 논의를 통해서 그동안의 레닌에 대한 그리고 스탈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이 조금은 재평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지젝의 의도는 조금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다. 그 이유는 재검토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은 그들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그리고 철저한 긍정과 부정적 평가가 우선했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시각과 시도 그리고 의도와 분석을 지금 현재에 맞추려고 하려는 지젝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할 필요도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생각에 얼마나 동의할지 모르겠다.

지젝의 결론은 간단히 말해서 레닌과 같이 지금의 이것과 저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자-선택하는 것이고,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지젝의 논의에서는 일종의 선언처럼 그리고 하나의 제시나 제안처럼 들려지고 있을 뿐 뭔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무엇은 없다.

하나의 전망이기 보다는 어떠한 외침처럼 느껴진다.

지젝은 레닌과 같이 혁명이 다가오게 만들기 보다는 끌어와야 하고 당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적 혁명 계급을 발견해야 하고, 그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지젝의 논의는 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존재를 탐구하려고 하지는 않을까?

결국 지젝은 새로운 레닌을 그리고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주장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와 상관없이 과언 무슨 방법으로 자신의 논의를 이어지도록 만들지 궁금하게 되는 것 같다.

최근 지젝이 무척 관심을 갖고 있는 레닌에 대한 논의는 조금은 파격적인 점이 있고 그의 전복에 대한 열망으로 써낸 무척 흥미로운 논의들로 가득하다. 물론, 그 흥미로움에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은데, 과연 어디까지 그의 논의가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