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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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영화로 인해서 (영화 때문에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 보드리야르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시뮬라시옹(정확하게는 아마도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일 것이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얘기를 하게 될 때에는 빠지지 않게 되는 저서일 것이고 브드리야르에 대해서 말하게 될 때에도 빼놓을 수 없는 저서일 것이다.

 

대학생 시절 이미 읽어봤기는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황홀경에 빠진 듯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될 때도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우울함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될 정도로 약간은 저자의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내놓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느끼던 방식 보다는 조금은 다르게 읽혀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각에 취해서,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해-분석-진단)을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는 생각에 취한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히 느껴진다.

 

시뮬라시옹에 대해서는 워낙 유명한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더 잘 설명할 자신도 없고 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자신도 없다. 단지 첫 번째 내용인 시뮬라크르들의 자전에서 논의하듯 이제는 실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뮬라크르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인식해야 할 것인지를 (어쩐지 선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던 것들을 알아냈다는 듯이 열광하며 떠들어대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다양한 방식-사례들로 자신의 생각을 반복하며 전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관심을 기울일 논의들도 있고 변화된 세상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도 많다고 생각되지만 지나치게 과장하고 단정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되는데, 그런 과도함과 과격함은 아마도 지금까지의 세상에 대한 인식과 이해와 단절하기 위해서 좀 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인 구조나 자본, 계급 등으로 분석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제시한 방식으로 여러 가지를 나열하듯 자신의 이해를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시도이고 접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접근을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애매한 입장에 머물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애매함은 더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고집스럽게 인정하기 싫기 때문인 것일까? 그게 아니면 너무 충격적이라 그걸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인 것일까?

 

어쨌든 소비의 시대에서 그리고 그 소비가 더욱 극단화되고 극렬해지는 시대에서 여전히 보드리야르의 진단은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유효한 점들이 많을 것이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보이고 드러나게 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혀지게 되는 것 같다.

 

숫자와 이미지 그리고 기호들로 둘러싸인 세상을 생각해보게 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책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것만으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인지(아직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인지) 조금은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싶어지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드리야르는 일종의 허무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고, 그 허무주의에 취해서 열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알게 된 허무주의를 설파하고 그 허무주의 속에서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한편으로는 허무주의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면서 이런 질문에 그런 생각 자체가 그릇된 생각이라고 반박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이미 그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세상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시뮬라시옹은 예언하듯 발견하듯 진단하듯 우리들에게 지금 세상을 낱낱이 까발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 또한 실재 없는 세상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떤 단면과 평면만을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공상과학소설일 뿐이라고 대놓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매몰차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읽다보면 한숨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기 보다는 좀 더 쉽게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생각 속에서 나오게 되는 것 같다.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혼나겠지만.

 

보드리야르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자주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조금은 헷갈려지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흥미롭게 읽혀지게 된다.

 

너무 현란하고 선정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언뜻 드는데, 마치 갑작스럽게 떠올려진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쉴 새 없이 떠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지친 듯 고개를 숙이고 음울한 독백을 하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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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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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것은 어리석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있는 어리석음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것에는 만족하지 않는 까다로운 사람들조차도 자기 안의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의 저서들 중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것은 아무래도 장미의 이름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 움베르토 에코의 저서들 중 가장 먼저 접하게 된 책이었고, 그의 박식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기도 해서 움베르토 에코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에 오랜만에 다시금 꺼내 읽게 되었다.

 

그의 죽음 때문에 그동안 읽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을 (번번이 미루기만 했던 것을)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주간지 및 기타 등등의 이유로 발표되었거나 작성했던 글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짧게 간추려진 내용들로 꾸며져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으며 되도록 가볍게 쓰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저자의 글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편한 기분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잡글들의 모음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그 내용들 중에서 재치와 재미 그리고 조롱과 야유만이 아닌 가볍지만 결코 가볍게만 생각할 수 없는 시선들 또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아마도 2000년 어느 때에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에는 때때로 재미난 내용들도 있었지만 도통 무슨 내용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애매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면, 이번에 다시 읽으니 좀 더 흥미롭게 읽혀지는 부분들이 많아서 한결 좋은 기분에서 읽게 되었다.

 

그나마 아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늘었기 때문에 읽으며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저자가 머리말에서 언급하듯 패러디를 통하여 어떤 과장을 그리고 순수한 재미를 찾으면서도 우리들이 익숙하게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던 것들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한편으로는 조롱과 야유를,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스스로 웃음거리를 만들기도 하면서 무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있다.

 

냉소가 감돌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싸늘한 웃음이 기분 나쁜 수준까지는 아니고 (비웃음으로 느껴지진 않고) 푸근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껄끄럽게 읽혀지진 않고 있으며, 뒷부분에 가서는 철학적인 내용들을 비꼬고 뒤틀고 있는 부분들의 경우는 조금은 인문학적인 내용들에 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만 그의 뒤틀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웃기지도 않을 것 같은데, 아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농담이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지적 허영일지도 모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시도로 가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앞선 재미와 뒤틀기를 목적에 둔 글들도 인상적이었지만 오히려 추억과 회상에 잠겨 있어 보이는 고향 알렉산드리아에 관한 내용이 좀 더 인상적이었는데, 예전에는 추억에 관한 내용들에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읽었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더 관심을 갖고 읽게 된다는 점에서 개인적 관심이 혹은 나이가 들었음이 어떤 변화를 만들게 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워낙 박식함으로 널리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이지만 그의 소설들도 많이 읽지 못했으며, 기호학과 관련한 논의들은 아예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그의 업적들에 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저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곁눈질하면서 무언가를 말하게 되기는 하지만 천천히 그의 여러 관심들을 알아가며 내 관심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 : 가볍게 썼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가벼움이 아무리 가벼워도 나와 같은 사람이 생각하는 깊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저 부럽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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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2 : 쾌락의 활용 나남신서 411
미셸 푸코 지음, 문경자.신은영 옮김 / 나남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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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8915915

앎의 의지 / 지식의 의지 : http://blog.naver.com/ghost0221/220617132934





항상 미셸 푸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마다 들게 되는 생각은 어째서 성의 역사 2권부터, 즉 2권 ‘쾌락의 활용’과 3권 ‘자기에의 배려’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은 것일까? 였다.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과 같은 내용과 관련해서는 항상 자주 거론되는 경우가 많고 여전히 그 논의를 다시금 검토하고 지금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독 이전 저서들에 비해서 그가 죽기 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성의 역사와 관련된 논의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이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논의가 복잡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게 아니면 다른 접근을 보이고 있지만 그게 그다지 관심을 주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일까?


역자의 말대로 어떤 형태로 성행위가 도덕적 영역을 이루게 되었는지에 관한 논의로 가득한 ‘쾌락의 활용’이 그다지 관심이 들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항상) 푸코의 논의는 무척 의미심장한 부분들도 많고 지금 시대를 생각하며 고대 그리스 시대를 돌이켜 봤을 때 흥미로운 구석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스꽝스럽게 말한다면 ‘쾌락의 활용’을 통해서 자기에 대한 관리에서 시작해서 절제력에 대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 권력과 지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에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제력과 규범과 도덕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지배를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지켜내게 되었던 것인가? 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되는 ‘쾌락의 활용’은 푸코가 항상 그랬듯이 흥미로운 논의들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처럼-생각처럼 쉽게 읽혀지지는 않고 있고, 간혹 글을 읽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거나 헤매게 되는 경우가 있어서 어려움을 느끼게 되기도 해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관점들을 찾게 되는 것 같다.


푸코는 자신의 논의와 연구의 방향이 ‘앎의 의지 / 지식의 의지’에서 다뤘던 방식에서 많이 벗어났음을, 다른 각도에서 다른 접근을 하려고 했음에 대해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서론을 통해서 어째서 그런 입장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설명 이후 그가 말하는 존재의 기술에 대해서 새롭게 접근을 하고 있다.


결국에는 도덕적 엄격함이라는 것이, 지금과 같은 종교적 도덕적 엄격함이 어떤 식으로 스스로의 선택과 입장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규범-양식화로,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강제적으로 다뤄지게 되는 과정(강제성을 갖게 되는지를)을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정하고 생각하던 입장에서 어떻게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 일종의 강제적인 성격을 보이게 되었는지를,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그 뒤바뀜의 과정을 고대 그리스 시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쾌락을 인식했는지에 대해서, 그 다양한 성격들과 특성들을 자세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남성과 남성-소년의 사랑(여성과 여성의 사랑은 크게 다뤄내지 않고 있다)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려고 했고 생각했는지에 관해서 자주 검토하고 있다.


푸코는 일종의 스스로에 대한 자기 지배에 대해서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다시 말해서 절제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양생술, 가정관리술, 연애술에 대한 상세한 논의들을 통해서 자기 스스로 절제하고 관리하게 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확인하고 있다.


주체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고 그것이 변화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국가가 어떤 식으로 개입되게 되는지

상대적 유연함이 어떤 식으로 경직되고 공고하게 되는지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를 하게 되는지

남성과 남성-소년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화를 겪게 되는지

지배와 피지배에 있어서 자제력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게 어떻게 권위를 갖게 되는지


자기 스스로에 대한 강제력과 절제가(상대적 유연성과 자율성이) 하나의 규정된 틀로, 정해진 규범으로 외부의 강제와 절제로 이행하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를 자세하게 탐구하는 ‘쾌락의 활용’은 반드시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며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읽어내기에는 아직은 부족하기만 한 능력 때문인지 그저 읽어봤을 뿐이라고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좀 더 잘 설명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 그저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의 생각들을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조금은 새롭게 생각하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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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3 : 자기 배려 나남신서 138
미셸 푸코 지음, 이영목 외 옮김 / 나남출판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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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쾌락의 활용’에 이어지는 논의를 보여주고 있는 3권 ‘자기에의 배려’는 읽어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인지 긴 시간을 읽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그리 많은 내용이 기억나진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냥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 그럼에도 남겨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낯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가장 알맞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역설적으로도 느껴지게 되는 ‘자기...’는 자기 자신에게 성적인 배려를, 쾌락의 활용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식으로 외부-교육의 시선 속에서 다뤄지게 되는 것인지를, 어떤 식으로 통제받고 일정한 틀과 규율-교화 속에서 다뤄지고 있는지를,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성에 관한) 기독교적 교화 이전 얼마나 기독교적 교화와 닮은 방식들이 있었는지를(혹은 어떤 식으로 기독교적 교화가 그것들을 교묘하게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하지만 그 방식과 관점 그리고 여러 시도들이 어떤 식으로 다르기도 했는지를 (혹은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다뤄내고 있다... 고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논의가 전개되는 것이 맞는지 그게 아닌지는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질 못하겠다.


제대로 읽었는지 자신이 없다.


성과 쾌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어떤 식으로 개인적인 욕망과 성적 긴장의 해소가 아닌 통제와 권력 그리고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이해되고 있는지를, 그런 식으로 발전적 혹은 확대된 관심이 어떻게 자기, 타자, 그리고 부부관계와 동성애에 하나의 기준과 (일종의) 법칙이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그 과정의 기원, 원형을 찾으면서 (반대로) 지금 시대의 성에 대한 관심과 관점들의 틀을 생각해보게 된다.


동성애를 기피하고 이성애와 부부관계를 좀 더 옹호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그것이 도덕적 정치적 우위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면서 엄격함과 절제, 그리고 지배-복종이 하나로 겹쳐지도록 만들고 있으며, 그 정교한 틀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복잡한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에는 아는 것이 많이 부족하고 이해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그저 그런 논의들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 같다.


언젠가는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이런 논의들을 소화해내기에는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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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 - 신영복의 세계기행, 개정판
신영복 글.그림 / 돌베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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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숲’은 애초에는 1, 2권으로 나눠져서 출판되었지만 출판사가 바뀌면서 하나의 책으로 엮어져 출판되었는데, 책의 내용은 신영복 교수가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며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혹은 문화적인 중요성이 있거나, 그게 아니면 신영복 교수 개인에게 있어서 관심이 가는 도시나 장소 등을 통해서 신영복 교수가 떠올려지는 여러 생각들을 무척 인상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있다.


1부의 경우 마지막 장인 미국에 관한 내용이 다른 글들에 비해서 조금은 특색을 보여주고 있는데(개인적으로 신영복 교수가 실험적으로 혹은 독특한 방식으로 쓴 글이라 인상적이었다. 평소의 글쓰기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그 글 외에는 신영복 교수 특유의 안정감 있고 (제목처럼) 숲에서 휴식과 생각에 잠긴 기분이 들게 되는, 평온함을 느끼게 만드는 글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서부터 신영복 교수의 (편지이자 엽서인 그리고 누군가를 향해서 말을 전하고 고백을 하듯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는데, 그 첫 시작부터 신영복 교수의 박학함과 다식함을 부족함 없이 느낄 수 있었으며, 어떻게 저런 생각들을 그리고 그런 다양한 지식들을 하나로 꿰어낼 수 있는 것인지 감탄하게만 만들게 된다.


하나의 시선이 생각으로 그리고 그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넘어서는 과정은 그 생각의 크기와 깊이에 항상 그렇듯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세계 곳곳을 두루 살펴보며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있기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고민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조심스러움 보다는 여유 있는 사색과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있게 풀어내려고 하는 진중함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항상 그렇듯 익히 알고 있거나 보고 있던 것들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알게 모르게 젖어 있는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으며, 인간에 대한 진한 애정과 수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로운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렇듯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곱씹게 만드는 힘을 잃지 않게 되는 것 같다.


2부도 마찬가지로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느끼는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전하듯 들려주고 있는데,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 자본주의의 부조리함과 문제점에 대한 경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들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한계들에 대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짧은 생각들 등 일관성을 찾을 때도 그렇지 못할 때도 있지만 여유 있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는 모습에서 어떤 품위를 느끼게 되기도 했다.


모든 것들을 존중하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찾게 된다.


가볍게 생각을 전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생각이 언제나처럼 풍부하고 다채롭기 때문에 읽어가며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깊은 생각과

놓치기 쉬운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예민함

폭넓은 사고에 대해서 그저 감탄하고 존경심을 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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