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 살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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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얼마 뒤에 자신의 삶이 끝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가족이나 소중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기려고 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이든 허세와 자만심으로 가득한 장광설이든 재산이든 무언가를 남기고 혹은 전해주고 싶다는 것은 동일한 감정일 것이다.


짧은 한마디로 혹은 과거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마감하는데, 사람들은 이를 ‘유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언’을 남기며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췌장암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들에게서 떠나야 하는 랜디 포시의 경우는 자신의 학자로서의 마지막 강의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랜디 포시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긴 선물을 함께 들으며 삶을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의 경우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비슷한 입장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친구와 가족들과 함께 삶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졌고, 그는 그 소중한 시간을 충분히 의미있게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삶을 긍정하기를 바라며 강의에 임하고 있다.


랜디 포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들에게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는 진실되게 말해주고 있다. 물론, 유머를 좋아하는 미국인답게 적당한 유머를 곁들여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직업 때문인지 몰라도 그 유언은 강의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장벽은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걸러내려고 존재합니다. 장벽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멈추게 하려고 거기 있는 것이지요.


그가 절실히 삶을 긍정하기를 하듯이, 삶을 긍정하려는 사람들만이 장벽을 넘어서 그가 말하는 삶의 의미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강의라고 말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그 삶 속에서의 교훈들을 알려주고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 교훈들은 때로는 눈물 흘리게 만들고, 때로는 웃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한 교훈들에서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는 약간은 거만하고 지나치게 솔직함으로 인해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는 하지만 좋은 아버지이고 좋은 아들이고 좋은 동생이고 좋은 남편이고 교수이자 동료의 모습으로 랜드 포시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는 완벽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부터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지금의 아내와의 만남 그리고 죽음까지 때로는 담담하고 때로는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자신의 삶을 말하고 있다. 물론, 때로는 슬프고 눈물짓게 만들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골몰하기 보다는 생각의 방향을 바꿔서 얼마나 삶이 다채롭고 풍성한지를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눈앞에 다가온 죽음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자면 그것은 지나치게 빨리 찾아온 것이지 누구에게나 다가올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궁리하기 보다는 지금 이순간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정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해주고 있다.


봐,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할 거야.

진심으로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그러면 당신 없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야.


그의 말은 마치 친구처럼 혹은 친한 아버지나 삼촌이 말해주듯이 어렵지 않고 쉽게 다가오면서도 큰 울림을 전해주고 있다.


당신의 친구에게 그가 죽을 때 당신의 일부도 같이 죽어

어디든 그와 함께 간다고 말해주세요.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당신도 같이 가게 된다고요.

그는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혼자가 아닐 것임을 압니다.


그는 학자로서는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없겠지만, 인생의 선배로서 그리고 삶에 관해 통찰력을 제공하는 사람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존재일 것이다. 물론... 그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버지로 남기를 바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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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한 변명 한길그레이트북스 10
마르크 블로크 지음, 고봉만 옮김 / 한길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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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무엇에 쓰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은 위대한 역사학자가 말해주는 역사에 대한 최대한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역사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글일 것이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서 ‘봉건사회’는 중세 봉건사회에 대한 서적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의 글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그가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내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역사에 대한 회의가 가득한 시절에(1차 세계대전의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세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과연 누가 반성과 역사를 통한 성찰이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마르크 블로크는 그러한 회의와 냉소를 거부하고 역사를 옹호하며 지금과 같은 시대야 말로 역사를 알아야 하며 지금까지 오해되고 있는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역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글을 써내려가는 중에 삶을 마감하게 되어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모두 접할 수 없게 되었고, 그가 전쟁터에서 짬짬이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글을 썼으며, 특별한 자료 없이 자신의 생각으로만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말로 충분한 시간과 자료가 허락했다면 보다 좋은 결과물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애석함을 느끼게 된다.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마르크 블로크의 글을 읽으며 자신들이 역사에 대해 보다 많은 호기심과 함께 단순한 호기심으로 역사를 공부하고 관심을 갖게 될 수 없도록 만들게 하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역사에 대한 많은 이들의 냉소와 회의 속에서 역사를 옹호하고 당시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에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사려 깊은 논의에 한번쯤은 관심을 갖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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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 희랍어 원전 번역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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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래스의 비극 작품들을 읽고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다. 이전에 구입하고 계속 미루었던 ‘아이스퀼로스 비극’도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몇 권 더 읽자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몇 개 읽지 않은 비극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완성도는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작품들도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을 충실히 옮긴 번역서 덕분에 아이스퀼로스의 의도를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는 하지만 고대 그리스 비극에 대해서도 그렇게 박식하지도 않고 인명, 지명, 그리고 신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해박하지 않기 때문에 읽는데 조금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무식하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아가멤논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의 아들의 복수, 그리고 재판을 통한 구원을 그린 삼부작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따로 말할 것은 없을 것 같지만, 읽다보면 소포클래스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해설에서도 지적되고 있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이야기의 흐름을 전반부에는 느슨하게 진행시키고 후반부에 빠른 전개를 보이는 방식이어서 초반에는 조금은 지루하게 읽혀지는 단점이 없지 않고 후반부는 지나치게 빠른 이야기 완결을 보이기 때문에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과 중요한 사건이 너무 빨리 지나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당시에는 어떤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연구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모르겠지만...

 

비극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일종의 복수극이라고 보는 것이 더 쉽게 다가올 것 같은 ‘아가멤논’과 ‘코에포로이’는 자신들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것에 비극적인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어머니를 살해한 것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당당함을 보이고 있는 ‘자비로운 여신들’의 경우도 ‘숙명’과 그로인한 비극이라는 아이스퀼로스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고통스러운 미래와 형벌을 알면서도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을 담은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 보다 흥미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운명과 괴로운 고통을 작품의 인물들은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려 한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삶을 살아가며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하는 우리의 삶에 고대 그리스 인들의 비극은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잠시 선사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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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왕 범우고전선 2
소포클레스 지음 / 범우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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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고전을 읽으라고 할까? 그리고 고전은 어떤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읽은 다음에 그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통하는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면서 이미 너무 많이 알려졌고, 분석되었고, 평가되어진 이 작품에 더 이상 새로운 의견을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되었지만...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소포클레스의 희곡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는 ‘오이디푸스 왕’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흔히 말하는 ‘비극’의 원형을 담아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와 견줄 수 있는 비극이 꼽기 힘들 정도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따로 줄거리를 설명할 필요나 있을까?

너무 많이 듣게 되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읽게 되는 순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 고전인 것 같다.

 

삼부작이면서도 각각의 작품의 완결성도 뛰어나서 어떤 순서로 읽던지 작품의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두 작품들도 부족함을 느끼기 힘들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왕’이 가장 현대적인 작품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작품과 같은 느낌도 들게 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어머니이자 부인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덮어버리라고 말하지만 꼭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불안감을 갖고 의문을 풀어나가고 결국 진실을 알게 되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들이 사건을 파고들면서 더욱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어 홀로 고독히 남게 되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는 결론과 유사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후의 작품들이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만.

 

또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끊임없이 ‘알지 못하고 그랬다’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항변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가게 되어가면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감한다는 것이 독특한 구석이 있다. 즉, 그는 알려고 노력하고 알게 되어가면서 고통스러워진다. 아는 것이 힘이고 지식이 권력이라고 하지만... 그의 운명은 슬프게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호기심으로 몰락하게 된다.

 

작품은 개인의 비극이면서도 보편적인 삶과 신뢰, 믿음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국가관 등 다양한 내용들도 함축되어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의미는... 읽어야지만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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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비유럽인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주은우 옮김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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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짧은 분량으로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발표한 글인데,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읽게 되면 꽤나 충격적인(혹은 기독교도나 유대교도가 본다면 모든 것이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의 내용을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결부시켜 정치적인 맥락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했던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시금 반복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세와 일신교’ 그리고 프로이트의 내면에 대해서도 짧지만 의미 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본인도 유대인이었던 프로이트가 어째서 유대교와 독특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내용으로 구성된 ‘모세와 일신교’를 집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유대인 사회에서의 시오니즘에 대한 입장 차이까지 짧은 내용이지만 종합적으로 분석을 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일관성이 없는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파헤치는 프로이트의 분석을 지금 팔레스타인의 문제로 사이드는 논의를 끌어와 앞으로의 점점 더 갈등이 심화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가 앞으로도 더욱 갈등을 야기할 것 같다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으며 글을 마치고 있다.

 

읽다보면 약간은 우회하는 방식으로 지금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문제와 국내 내부에서 벌어지는 역사에 시각 차이에 대해서 시사점도 던져주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그것은 읽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읽는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질 것 같기 때문에 각자 읽어가며 자신의 시각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워낙 유명하면서도 내용의 파격성 때문에 자주 언급은 되고 있지 않는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를 읽은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사이드의 글을 통해서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짧지만 흥미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맥락 이외에도 ‘모세와 일신교’ 그리고 사이드의 논의에는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근저에 깔려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동일한 결론을 찾아내고 있다. 즉, 정체성이랑 고정되고 일관된 어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나 이 책을 읽기 전에 ‘모세와 일신교’를 우선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너무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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