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
미즈타니 오사무 지음, 김현희 옮김 / 에이지21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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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 TV를 통해서 미즈타니 오사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는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언제는 교권에 대해서 적절한 대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교육계가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교육자의 권위와 이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했었다.

 

물론, 이런 갑작스러운 소개와 관심은 그저 소개와 관심의 수준에서 그쳤을 뿐이고 그렇게 쉽게 잊혀졌다. 개인적으로도 TV를 통해서 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렇게 접한 그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험과 생각을 담고 있는 ‘얘들아, 너희가 나쁜 게 아니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접하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이제야 뒤늦게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어렵게 쓴 내용도 아니고,

분량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2~3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내용이었는데, 읽는 시간에 비해서 많은 깨달음을 안겨주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귀감’이 되는 내용과 사람을 대하게 될 때, 특히 자신보다 어린 사람 혹은 경험이 부족한 사람을 대하게 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묵직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내용은 어떻게 그가 (그의 표현대로) ‘밤의 세계’를 거닐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는지에 대해서 들려주면서,

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어떻게 지금처럼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알려주며 아이들을 만나게 되며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 인상적이었던 아이들과의 이야기들과

자신의 실수들 그리고 개인적인 고백들을 들려주고 있고,

몇몇 좋은 마무리를 보여준 경험들을 짤막하게 들려주며 그들이 처음부터 나쁜 것이 아니었고, 환경과 주변 조건으로 인해서 그런 모습으로 되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일본 사회의 시스템에서는 그런 이들에 대한 재활 및 복지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다.

최근 들어 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강조하면서도 어떤 것이 이상적인 교육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회의를 갖게 되는 교육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만 하는 것 같다. 이런 회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살아있는 교육’인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미즈타니 오사무의 모습은 적절한 해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참고는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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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 새날고전묶음 7
레닌 지음 / 새날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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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동안 잊혀졌던

혹은 언급되지 않았던

아니면 잊도록 노력했던

또는 노력하게 만들었던

 

맑스(마르크스)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이뤄지기 시작하고,

그에 대한 논의가 보다 더 활발해지면서 조금씩 꺼내들기를 망설였던 레닌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이뤄지기 시작되는 것 같다.

 

하지만 맑스에 대한 논의에서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적인 측면이나 정치적 혹은 철학적 논의에만 집중되고 있을 뿐이고 맑스의 논의가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인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과 그 부정으로 인한 극복은 다뤄지지 않거나 배제되고 있는 측면을 생각해 본다면 맑스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면서도 부분적인 논의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맑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에 대한 논의도 그와 비슷하게 그의 혁명을 위한 실천적인 측면보다는 그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와 그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지금 현재 체제 속에서 어떻게 다시금 불러올 수 있을지 혹은 계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극히 피상적인 생각이고 편견일 것이다. 최근의 레닌에 대한 논의를 많이 접하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아마도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틀린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레닌의 실천적인 모습에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면 지금처럼 활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여전히 하게 된다.

어쨌든 그런 이유에서 레닌의 삶과 철학 중 혁명 이후 그가 보여주었던 모습들 보다는 혁명 이전의 치열한 고민들과 이론적 입장과 자신의 입장과는 다른 이들과 투쟁을 벌였던 레닌을 다시금 복권시키는 것에(만)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도 향수병일지도 모른다.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이들 덕분에 레닌에 대한 논의가 보다 탄력을 받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지젝의 논의에 관심이 가기는 하지만 어쩐지 그의 논의를 접하게 되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하지 못하게 되거나 (어려워서) 하나도 이해를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걸 떠나서 책 자체가 너무 비싸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레닌에 대한 책들 보다는 레닌의 책을 읽게 되어버렸고,

레닌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국가와 혁명’을 짧은 분량인데도 매우 힘들게 읽게 되었다.

읽는데 힘겹기는 했지만 읽으면서 레닌이 얼마나 이론적인 투쟁을 벌였는지와 자신의 입장의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게 하면서 그와 함께 읽는 이들을 자신의 입장에 가담하도록 신경을 썼는지 알 것 같았고, 그렇게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조금은 느낀 것 같다.

 

‘국가와 혁명’에서의 레닌의 논의는 폭넓은 논의를 전개하기 보다는 말 그대로 ‘국가’와 ‘혁명’에 대한 그의(그리고 맑스와 엥겔스의) 입장들을 정교하게 다듬고 있고, 자신의 생각들이 무정부주의자들과 그리고 기회주의자 혹은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이들과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맑스와 엥겔스의 논의를 어떻게 왜곡 혹은 오해하고 있는지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지독할 정도로 이론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고,

결국 어떤 혁명이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레닌의 이미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째서 ‘사멸’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면서 국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맑스와 엥겔스의 글들을 통해서 정리하고 있고, 그 국가가 어떤 방식과 과정을 통해서 사멸하게 되는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의 다양한 논의들을 정리하고 있고,

그 정리된 논의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인 느낌을 풍기기도 하는데,

당시의 시대를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그 당시의 맑스와 엥겔스의 의견이 갖고 있는 권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의 논의를 통해서 국가기구가 어째서 ‘분쇄’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분쇄되어야 하는 국가기구가 혁명이 일어났을 때(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뤄졌을 때) 어떤 방식으로 그 기구의 성격이 변화되어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가 어째서 그렇게 집요하게 국가와 혁명에 대해서 논의했는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혁명을 위하여 그리고 혁명 이후에 국가가(러시아 사회 체제가) 어떤 변화를 보여야 하며, 어떤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이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선명한 논의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의 논의를 통해서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모순된 체제이고,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체제가 붕괴 되(어야 하)고 새로운 체제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으면서 자신의 논의를 하고 있다.

 

지금은 레닌의 논의에서 앞으로의 미래가 모순의 극복의 미래라는 부분을 제외하고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은 그의 논의를 걸러내면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가 갖고 있는 논리적 치열함은 분명 본받아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의 논의 중에서 국가에 해당되는 부분과 함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 공산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고 있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어째서 틀린 입장인지 말하고 자신의 입장이 갖고 있는 이론적 타당성에 대해서 주장하고 있다.

그가 국가의 이행 문제에 보다 집중한 것은 아마도 혁명이 바로 앞에 펼쳐질(혹은 펼쳐야 할) 예정이기 때문에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논리적인 설득이 필요했을 것이다.

 

국가와 혁명에 대한 입장을 통해서 진정한 맑스주의자와 (맑스를 왜곡하고 오해하는) 수정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고 있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맑스를 오해 / 왜곡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그는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고, 그 분석을 통해서 지금 현재 진보적 혹은 좌파적 입장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논의를 통해서 레닌은 그들의 입장은 결국 사회적인 문제점과 모순을 전혀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고, 그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지금 현재에 적용해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금도 그런 그의 입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레닌의 글을 읽으면서 의외로 그가 엥겔스의 글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아마도 당시에는 엥겔스의 맑스에 대한 해석이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지금은 거의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결국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의) 논의의 핵심은 ‘국가를 어떤 성격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문제’인 것 같다. 그의 글을 통해서 일정 부분 그의 의견에 동조하게 되기도 하지만 조금은 조심스럽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 레닌은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시선 중 정치적인 시선에 굉장할 정도로 집중한 사람이지는 않을까?

 

최근의 레닌에 대한 논의들이 높아져서 레닌의 글을 한번 읽어보았는데,

생각보다는 인상적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논의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그에 대한 악명 때문이지 않을까?

 

 

참고 : ‘혁명이야 말로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상한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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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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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소 수다스러운 원작 제목과는 달리 꽤나 스타일 있는 제목을 달고 있는(요즘 유행은 죽든 살든 ‘패션’인 것 같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형편없는 제목 덕분에 구입을 서두르게 되거나(어쨌든 대세는 패션이니까), 구입을 망설이게 되는(책을 읽는데 무슨 염병할 스타일이겠나?) 책일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닉 혼비를 좋아하거나,

책읽기에 대한 책(특히 유명 작가의)에 관심이 많거나.

둘 다 아니라면 정말 읽을 것이 없어서 골랐을 것이다.

 

닉 혼비는 국내에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많이 소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그로 인해서 그의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번역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궁금하면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된다.

 

그리고 그의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책들에 대한 글들도 그의 소설처럼 흥미롭고, 재미나다. 게다가 소설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모습들도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나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읽는 재미와 함께 이런 책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인 읽어 가면서 점점 더 빈정상해지는 문제도 발생하게 되는데, 그건 책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도 그 책들을 읽어냈다는 동질감 또는 우월감과 함께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 수다를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좌절감 혹은 한국 출판계에 대한 불만 때문일 것 같다.

별 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닉 혼비는 말 그대로 수다스럽게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읽을 때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이유로 읽었는지,

그리고 몇 개는(솔직히 말해서 아주 많게는) 어떤 이유로 읽기를 포기했는지 들려주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과감하게 밝히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도 한다.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기도 하고,

농담을 하면서 어물쩡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항상 축구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아스널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말 그대로 솔직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와 함께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를 만났다고 신이 나서 자랑할 작가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누군가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이처럼 함께 뭔가를 읽는 기분을 들게 만드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닉 혼비는 단순히 책에 대해서만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읽고 있는 것일까?’와 ‘무엇을 읽어야 할 것인가?’라는 것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아이팟(폰)과 PMP, DVD와 노트북과 같은 온갖 즐길 것들이 놓여 있는데도 어째서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한 책을 선택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책들 중 당신은 과연 무엇을 읽고 혹은 어떤 것을 써내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다.

 

그의 입장은 이 부분에서는 분명 단호하고,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웃고,

떠들고,

낄낄거리다가

때로는 진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미심장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저 흔해빠진 대중소설가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 글들을 통해서 뛰어난 작가는 그가 쓴 에세이를 통해서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을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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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과 현대철학
홍준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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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양한 분야에서 라깡을 인용하고 있고,

그의 논의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전문 연구자들이 등장하고,

그 연구자들이 많은 글들을 발표하고,

그 글들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놓고 있지만,

 

국내 연구자들이 발표한 글들의 대부분은 아무리 열심히 읽어봐도 도통 이해가 되지 않거나(혹은 못하거나), 라깡의 전반적인 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설명한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보다는 라깡의 부분적인 입장(이론)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라깡은 항상 이해되지 못하게 되거나,

부분적으로만 다뤄지게 되는 것 같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난해하게만 느껴지게 되는 것이고, 이런 문제점이 점점 해결되기 보다는 더욱 문제가 확대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마도 라깡의 저서가 제대로 번역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 같고, 그의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 라깡과 관련된 용어와 논의들이 최소한의 합의도 없이 각자 따로 놀고 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가 국내에 알려진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체계적이거나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기 보다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입장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깡과 관련된 연구자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으로(그리고 열심히) 라깡을 소개하고 있고, 그의 이론적인 부분과 함께 임상적인 부분과 관련되어서도 많이 소개를 해주고 있는 홍준기의 활동은 그렇기 때문에 인상적인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라캉과 현대 철학’은 라캉의 이론을 ‘주체’에 중점을 두며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의와 연결하여 폭넓은 해석을 보여주고 있고, 각각의 입장들이 갖고 있는 한계를 라깡의 논의를 통해서 극복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라깡을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있다.

 

홍준기는 라깡이 어째서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장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프로이트의 논의를 라깡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고,

하버마스와 후설의 논의를 중심으로 현대철학이 갖고 있는 한계와 함께 정신분석학이(그리고 라깡의 논의가) 어떻게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알튀세르가 어떻게 라깡의 논의를 철학적 /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고, 라깡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입장을 통해서 어떻게 (근대) 주체가 생성되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과연 주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해묵은 논쟁을 그리고 지겨운 논의를 홍준기는 라깡을 통해서 다시금 꺼내들었고, 해묵고 지겹게 느껴지겠지만 여전히 가장 핵심적인 논의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의견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관심을 끌게 만든다.

 

라깡의 논의를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난해하고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래도 관심을 잃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여전히 그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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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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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있지 않았었다.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조그마한 초록색 책이 유난히 인상적이었고,

저렴한 할인 가격에(무려 2천원이었다! 요즘은 2천원짜리 커피도 구경하기 힘들다) 팔고 있는데다가, 살짝 펼쳐보니 짧은 잠언들로 채워져 있어서 오랜 시간을 읽는데 쓰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구입을 하게 되었고, 약간은 예상했던 내용이고 조금은 냉소적인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럽게 읽게 되었다. 이제는 구하기 어렵다는 그의 다른 책들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정도로 괜찮은 내용이었다.

 

번역자의 말대로

 

독창적이고,

통찰력 있고,

냉소적인,

인간을 바라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들려주기도 하는

 

에밀 시오랑의 글들은 전형적인 잠언들 혹은 아포리즘일 것인데, 대충 읽게 된다면 그의 글들에서 니체의 영향을 조금은 엿볼 수 있지만 그는 보다 냉소적이고 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보다 독설을 내뱉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의견에 집중을 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가 어딘가에 적어놓았던 메모들을 혹은 일기들을 보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을 갖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꽤나 설득력을 느끼게 된다. 이것도 능력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책이 될 것 같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고 두고 되새김하며 그의 글들을 곱씹어보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방식으로 읽게 되던지,

꽤 괜찮은 문장과 통찰력 그리고 삶과 모든 것에 대한 냉소를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결국 그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에밀 시오랑의 시각과 조금은 엇비슷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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