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
찰스 프레드 앨퍼드 지음, 이만우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꽤 흥미를 끌게 만드는 제목과 함께,

그 흥미를 (조금은) 좌절시키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는 찰스 프레드 엘퍼드의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고 생각하는 ‘악’에 대해서 보다 깊이 있는 탐구를 하고 있다.

 

저자는 다양한 고전들과 실제 있었던 (끔찍한)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실제 각종 범죄를 저질렀던 재소자들의 면담을 통해서 ‘악’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엘퍼드는 기본적으로 멜라니 클라인과 그와 관련된 연구자들의 이론적 틀을 갖고 ‘악’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개인적으로는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에 대해서 거의 무지하기도 하고, 저자인 엘퍼드도 클라인의 이론적 성향을 특별히 설명해주지도 않고 있어서 조금은 읽어나가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저자인 엘퍼드는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악’에 대한 편견을 해체시키고 있고, ‘악’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두려움’ 혹은 ‘모호함’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기존에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고 있는 ‘악’이라는 범위도 최대한 확장시켜서 ‘악’에 관한 새로운 입장을 갖도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많은 것들이 악이고,

그 악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남’ 또는 (‘지배’가 아닌) ‘받아들임’ 또는 ‘승화’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악’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는 혹은 우리 자신이 ‘악’과 관련 없는 거리감을 갖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악’이 우리를 지배할 것 같다는 방식의 분석을 하고 있다.

 

그는 전반적으로 그가 면담했던 재소자들의 의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그 관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악’을 대했었고,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논하고 있다.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론적으로 많은 부분 부족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 읽어나가는 것에 조금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분석들에 공감하기도 하지만 이해가 조금은 안 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또한 그가 밀그램의 연구 결과와는 달리 인간의 ‘악’한 행동이 하나의 구조나 관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수동적인 입장만을 갖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 행동을 자발적으로도 할 수 있다는(즉, 능동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갖고 있을 그 ‘악’을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을, 보다 긍정적인 혹은 배출할 수 있는 요소들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색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많기도 하고, 그의 분석이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또한 최근 들어서 다양한 잔혹한 범죄들이 증가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악’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엘퍼드의 논의에서 그가 기본적으로 ‘악은 두려움이다’라는 논조로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결국 그는 ‘두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어째서 두려움을 느끼는지 그리고 두려움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그는 공포와 악이라는 것을 두려움으로 말을 바꾸는 것일 뿐이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 : 번역자는 ‘향락의 전이’를 번역하여 엄청난 악명을 갖고 있는 분인데, 왜 악명을 갖고 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문장 번역이 엉망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원본과 대조할 정도의 수준 있는 독자도 아니고 이해가 안 되면 내가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꽤 알려진 학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이름을 (영어식의) ‘노버트 엘리아스’라고 성의 없이 번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엘퍼드의 책이 번역 및 출판되기 이전에 ‘문명화과정’과 같은 책들이 이미 번역되어 그의 이름을 (어느 것이 정확한지를 떠나서) 적절하게 기재할 수 있었는데도 저런 식으로 번역을 해버렸다는 점에서는 순전히 번역자의 성의문제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탐사와 산책 2
김석철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0월
평점 :
절판


언제부터인가 건축과 공간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아마도 그 관심은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관심 때문에 책방에 가게 되면 건축과 공간 그리고 디자인과 관련된 책들이 모여져 있는 곳을 들리게 되었고, 그곳에 꽂혀져 있는 책들 중 몇 개의 책들을 뒤적거리고 그 책들 중 가장 읽기가 쉬울 것 같은(혹은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구하게 되었다.

 

김석철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하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그리고 글에 대해서도 잘은 모른다.

나름 유명하신 분인 것 같은데,

유명세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어차피 건축에 대한 문외한이기 때문에 큰 불만을 갖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도 않지만.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은 그가 이것 저곳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으게 된 책이고, 그렇기 때문인지 조금은 건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읽어낼 수 있는 수준의 글이기도 한 것 같다.

 

평소부터 그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축가들 그리고 20세기 건축에서 빠질 수 없는 탁월함을 보였던 건축가들의 대표작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에 대한 비평을 찾아낼 수 있지만 전문적이고 세밀한 소개와 비평이기 보다는 일종의 관광가이드와 같은 소개로 자신의 발언을 마무리 짓고 있다. 물론, 더 많은 것을 알려면 알아서 더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건축의 문외한이면서도 한두번 들어본 사람들도 있고,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어쩐지 한번 보았던 것 같은 건물들도 있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통해서 조금은 그 건물에 대해서 그리고 20세기 건축에 대해서 조금은 달리 보이게 되는 것 같고, 지금도 걷고 있는 주변 건물들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자신이 어떻게 건축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솔한 글은 꽤 인상적이고, 간간히 건축가들에 대해서 설명할 때의 그의 감동어린 회고를 읽을 때는 더 많이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도통 느껴지지 않고 있다. 그냥 일반 건물에 비해서 특이하다는 느낌이거나 멋지다는 느낌만이 들고 있을 뿐이다.

 

건축이 사회에 어떤 모습을 보여야(보여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각각의 건축가들은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그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철학 또는 시각이 하나의 입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생각이든지 자신만의 입장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항상 믿으면서도 의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꽤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은 건축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책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었는데,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경제적으로’ 자유로웠기 때문이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경제적인 자유로움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았겠지만 꽤 중요한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부담감이 있는 사람들은 관심을 거두라고 말하는 뜻은 아니다. 그 경제적 부담감이라는 것이 없어질 때 얼마나 창조력이 발휘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참고 : ‘김석철의 20세기 건축산책’ 이후에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향하여’를 읽고 있는데, 김석철은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과 ‘주택(주거)’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혹은 건물의 건축 자체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게 된다면 르 코르뷔지에의 보다 중요한 점들을 놓치게 된다는 점에서 큰 실수라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한국사회와 같이 주거와 주택과 관련된 부분이 매우 중요한 사회를 그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에 그가 놓친 것들은 매우 아쉬움으로 남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국의 마지막 기회 - 세 대통령이 초래한 제국의 위기를 넘어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김석원 옮김 / 삼인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쉽게 말해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는 두 개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고(이것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두 개의 체제 중 하나의 체제는 미국(그리고 그 주변국들)에 의해서 동유럽의 몰락과 소련의 붕괴로 패배를 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미국의 승리이고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말하게 되었고 그 말을 믿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과정과 결론 속에 수많은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런 고리타분하고 복잡한 얘기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미국은 그 이후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견에 대해서 큰 반박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승리로 그리고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을 맺으리라 생각되었던 세계는 보다 더 급격한 변화를 그리고 불안정을 보여주게 되었고, 그 급변과 불안정 속에서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위상은 점점 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브레진스키의 물음은 여기서 시작되고 있고, 그의 물음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 이후에 집권했던 세명의 지도자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통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어떤 것이 부족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하게 된다.

 

브레진스키는 타고난 전략가이고, 그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이 가장 이득을 줄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의견에는 냉정함과 함께 치밀한 계산이 담겨져 있다.

 

그의 평가로는 아버지 부시를 시작으로 해서 클린턴, 그리고 아들(이자 얼간이) 부시의 순으로 집권자로서 시대와 세계에 대한 리더로서의 적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있고, 그 근거를 다양한 자료를 토대로 제시하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으로 그의 분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분석이 갖고 있는 명료함과 치밀함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신작에도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고, 뒤늦게 읽기는 했지만 아주 늦은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말을 돌리거나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 대한 단호한 평가와 함께 그동안 무엇이 부족했고, 필요한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 부시에 대해서는 뛰어난 공로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고, 클린턴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물론, 아들 부시에 대해서는 칭찬할 부분을 찾을 수도 없기 때문인지 담담하게 그가 어떻게 모든 것을 망치게 되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망칠 수도 없다는 식의 무표정한 담담함으로 느껴진다.

 

브레진스키는 이전 ‘거대한 체스판’과 같은 저작에서는 당시의 정세를 분석하고 그 정세분석과 향후의 방향에 대해서 모색함으로써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를 들려주었다면, 이번 ‘미국의...’는 기존의 그의 분석방식에서 ‘지도자(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중요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인 것 같다.

 

그가 점점 더 마키아벨리처럼 되어가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이미 그는 마키아벨리였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쨌든 그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제도’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이 결국 지도자가 어떤 운용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혹은 어떤 파트너들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큰 변화를 보이게 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큰 특이점을 보이는 것 같다.

 

이제는 시스템이 모든 것을 장악했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떤 변화도 모색할 수 없다는 관점이 우세한 상황에서 그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고, 어쩐지 그의 생각에 조금은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는 현재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들을 서술하면서 그 사안들이 어떻게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동유럽의 붕괴와 소련의 몰락이 어떠한 급격한 변화를 보이게 되었는지 말하며 그 이후의 세계의 모습과 세명의 지도자로 인해서 그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분석하며 앞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서 모색을 해야 하고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야 하는지 들려주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여전히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생각을 바꾸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각으로 어떻게 미국이 지도국(또는 지도자)으로서의 모습과 본보기 그리고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그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있다.

 

약간은 의외의 해결책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상을 할 수 있는 해결방안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지도자(오바마)는 그의 생각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브레진스키의 민주당에서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과는 다르게 움직여지게 마련이고, 그의 분석에도 어느 정도의 한계 또는 그릇된 판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분석과 제시들이 갖고 있었던 철저한 현실적인 판단이라는 점에서 그의 의견은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 같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하나의 공통된 규범과 국가들 간의 그리고 사회 간의 유기성을 강조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 미국이 보다 선도적이고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절제와 온정(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브레진스키의 시각을 갖고도 다양한 분석 또는 해석을 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그런 장황스러운 분석을 하기 이전에 그가 갖고 있는 치밀한 현실감각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 국내의 문제들에 대해서 그는 세밀하게 다루지 않고 있고, 굵직한 문제점을 간단히 거론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고,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경제적인 문제와 불평등에 관해서도 특별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그는 전략가이고, 정치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아예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을 찾아내기 보다는 그의 시각 자체를 받아들이며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말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현실을 파악하고(그는 말 그대로 그냥 그대로 이 시궁창과 같은 현실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파악한 결론에 따라 앞으로 어떤 선택을 혹은 모습을 보여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제 미국의 헤게모니가 많이 위축되었고, 이전에 갖고 있었던 이점들이 약해진 상황에서 그는 이 기회가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는 생각은 아마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른 미국의 선택이 어떤 선택을 보일지 혹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에게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하고 있는지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에 따라 당연히 모든 것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 모든 국가들은 또다른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참고 : 그는 ‘거대한 체스판’에 비해서는 보다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한반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크게 관심을 갖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가 햇볕정책에 대해서 조금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합의에 의거해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햇볕정책이 갖고 있는 독자적인 움직임에 비판적이며, 일관성은 있지만 그런 일관성은 좋지 않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으로 바라본 것 같다. 이에 대해서 반론 또한 가능하겠지만 그건 아마도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바라보는 것과 실제 당자로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일 것 같다. 혹은 손해와 이득으로서 바라보는 사람이거나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핫 키드
엘모어 레너드 지음, 김민혜 옮김 / 사람과책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엘모어 레너드는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많이 소개되어서 꽤 알려진 작가이지만 정작 그의 작품은 국내에 이제야 뒤늦게 소개되기 시작하고 있다. 몇몇 작품들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국내에는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들을 통해서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지 못하지만 범죄소설계에서 그의 위상은 비유를 하자면 아마도 데이빗 보위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은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혹은 읽어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글쓰기 스타일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없겠지만 ‘핫키드’와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영화들을 통해서 살펴보면 그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식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고, 여러 캐릭터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핫키드’에서도 엘모어 레너드의 방식은 여전하고, 그는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성향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통해서 그 시대를 그리고 청춘들을 담아내고 있다.

 

그의 가장 최근작이고 노년에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에 큰 인상을 주기는 힘들지 모르겠지만 노장이 써내려간 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주된 주인공은 연방보안관 대리인 칼과 범죄자 잭인데, 그들은 비슷한 부모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지만 그들의 성장과정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진다. 어린 시절 그들의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짓는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둘은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이 결정지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칼과 잭은 동일한 존재이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둘 모두 ‘유명세’를 항상 의식하면서(그리고 그들 주변도 ‘유명세’에 몰두한다) 행동하려고 하고 있지만 그걸 위해서 그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활해나간다.

 

그들의 주변에 있는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통해서 엘모어 레너드는 그들의 모습과 그 당시의 시대를 담아내고 있다. 어째서 이제야 금주법 시대를 담아냈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당시의 시대가 갖고 있는 매력과 풍경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인상적인 캐릭터들과 매력적인 내용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중간 부분에서는 조금은 늘어지는 느낌이 들기는 했는데, 후반부로 가면서 느슨했던 분위기가 다시 다잡혀지고 있고, 장황하던 이야기도 다시 조여지게 되어서 그의 글이 갖고 있는 매력을 충분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혹은 하드보일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전통에 충실한 하드보일드 소설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당대총서 20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국내에서 세계체제에 대한 논의는 월러스틴을 중심으로 이뤄지(기만 하)고 있고, 그 외의 연구자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월러스틴이 가장 저명한 그리고 깊이 있는 논의를 들려주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특정인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반대로 그에게(만) 관심이 집중되어서 그의 저작들 대부분이 번역될 수 있었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많은 저작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기는 했지만 (그런 점으로 인해서) 세계체제에 대한 논의에는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이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항상 그렇듯이 무언가에만 편중되어서는 좋지 않은 법이다.

 

그의 시각의 핵심이 담겨져 있는 ‘근대세계체제 1~3’은 다양한 자료들과 기나긴 시공간을 배경으로 근대(자본주의)세계체제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들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소상히 다루고 있는데, 폭넓은 자료와 그동안 한국에서는 소개되지 못했던 지역의 경제와 역사에 대해서 많은 부분이 다뤄지고 있기 때문에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읽음으로 인해서 기존의 역사관과 세계관으로는 깨달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주고 있고, 보다 폭넓은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바라보도록, 노력하도록 만드는 저작이었다.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와 내용을 담고 있는 ‘근대세계체제 1~3’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체제에 대한 논의를 접근할 수 있도록 월러스틴 본인이 직접 써낸 개론서와 같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은 접근하기가 편하면서도 그의 논의의 핵심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체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강의록을 토대로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내용이 명쾌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신이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분야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어서 꽤 매력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월러스틴의 논의의 핵심은 거칠게 말해서 ‘페르낭 브로델의 새로운 역사관과 맑스(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근대세계체제에 대한 분석’과 이전 체제와 지금의 체제 그리고 앞으로의 체제로의 ‘이행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세밀하게 각각의 분석을 이어지게 만들기도 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체제의 변화의 흐름도 중시하고 있기 때문에 체제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이 체제가 어떻게 변화될지를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하고 있고 이에 대한 적절한 근거 자료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의에 보다 설득력을 갖도록 하고 있다.

 

이런 자신의 기본적인 시각과 논의의 핵심에 대해서 그는 초반 부분에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고, 지금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어떻게 진행을 했고, 지금 현재는 어느 위치에 있는지 설명을 하고 있다. 이후의 논의들은 세계체제에 대한 분석보다는 (최근 그가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세계체제 내에서의 ‘국가와 이데올로기 문제’ 그리고 요즘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학문 간의 통합’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고, 말미에서 현재의 체제적 불안이 단순한 불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헤게모니의 한계’로 볼 수 있고, 이 헤게모니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체제 또는 헤게모니로의 이행’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을 하며 그 이행에서 두 개의 시각(쉽게 말해서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쪽의 시각에 무게감이 주어지느냐에 따라서 이행의 방식과 이행의 결과가 정해질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논의들은 이미 이전에 들려주었던 논의들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그의 새로운 시각이나 논의를 접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실망스러운 느낌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문에서 밝혔듯이 세계체제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갖을 수 있도록 그리고 전반적인 자신의 시각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꾸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의도에는 충실한 구성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월러스틴 자신이 써낸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계체제에 대한 개론서와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고, 그동안의 자신의 논의와 생각들을 되도록 쉽고 간결하게 정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월러스틴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읽어보아야 할 것 같고, 그가 현재 어떤 입장을 갖고 자본주의와 근대세계체제를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근대세계체제 1~3’을 접해야지만 보다 더 그의 논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겠지만... 시간관계 상 이것으로 대체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읽어야 할 것은 수도 없으니까.

 

 

 

참고 : 과연 그의 ‘근대세계체제 4권’을 접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어쩐지 쓰려다가 그만 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