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
스티븐 컨 지음, 박성관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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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것도 물론 헌책방에서 구한 책이었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구해서 읽기를 반쯤은 포기한 상황이었는데 헌책방에서 우연히 보게 되어서 기분 좋게 구입할 수 있었다.

책을 구입한 것만 기분 좋은 것이 아니라 내용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물론... 많은 부분은 이해하지 못해서 알딸딸하게 만들었지만.


저자는 크게 두가지의 주제를 갖고 1880년에서 1918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과 사회적 변화 등등을 풀어내려고 하고 있다.

그 두가지는 바로 ‘시간’과 ‘공간’인데 시간과 공간에 관해서는 최근의 인문학계에서 관심이 높아지는 주제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나 다양한 철학자들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들을 말하고 있거나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말들을 해석하려는 연구자들이 많아지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최근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관심이 높아져서 큰 도움을 받게 된 책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호수의 여인’을 읽은 다음 거의 한달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서야 책을 다 읽게 되었다. 분량이 크기도 하지만(700페이지가 넘는다) 분량을 떠나서 저자가 얘기하는 다양한 예들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시간에 관한 부분은 어느정도 알아먹을 것 같았는데, 공간에 관한 부분이 많이 어려웠다). 아마도 한가지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보다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다양한 이야기를 보다 편하게 읽게 하기 위해서 시간 / 공간으로 주제를 나누고 이전에 갖고 있었던 시간에 대한 인식과 다양한 변화(표준시간의 등장, 전화, 전차와 자전거의 등장으로 인한 속도감과 시간감각의 상대성, 영화의 등장, 테일러주의, 프루스트, 조이스, 베르그송 및 다양한 사회 / 철학자들의 논의 등등)를 통해서 어떻게 시간에 대한 관념과 감각이 변화하게 되었는지 다양하게 보여준다.


그다지 박학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저자가 풀어주는 많은 예들을 따라가기가 힘들었지만 최대한 읽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게 자세하고 다양한 사례들 통해서 힘겹기는 하지만 재미나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저자의 박학다식함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기는 했지만 이처럼 수많은 예들을 찾아내고 정리한 사람은 몇 안되는 것 같다.


저자는 시간에 대한 변화를 설명한 다음 시간을 다양한 부분으로 나눠서 친절히 변화와 함께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게 되는지 알려준다.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책을 주된 참고자료로 사용하고 베르그송의 철학과 니체와 기타 다양한 철학자들을 통해서 시간의 경험과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도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변화의 주된 원인이 과학과 기술발전으로 인하여 변화가 추동된다고 생각하게 되기도 하지만 저자는 분명히 이런 변화의 주된 원인이 과학가 기술발전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변화만으로는 당시의 다양한 분야에서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인식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일종의 ‘흐름’으로서 변화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그는 일종의 토대-상부구조론으로서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접근하는 것에  부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저자의 관점은 ‘공간’에 대한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전과 이후의 공간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화를 하게 되는지와 기술의 변화와 함께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수학과 과학에서의 변화이다.

특히 수학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은 해주고 있는데... 산수나 좀 하지 수학은 꽝인 사람이기 때문에 거의 무슨 소리인지 대충만 알아먹게 되었다.


공간에 대해서는 건축가들도 중요하지만 세잔이나 입체파와 같은 미술가들의 업적에 대해서 보다 집중을 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후반부에서 입체파의 미술과 제1차세계대전이 그동안의 전술과 전략과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심도있게 분석해주고 있다.


그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주제를 조금이라도 접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앞으로도 이런 분야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고 싶었는데 다른 책들도 구해서 보고 싶다.

물론... 언젠가는~ 이겠지만.


참고 :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사회를 바라본다면 아주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공간에 대해서는 지식과 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이 떠올리게 되지는 않지만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게 된다.

저자가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과정을 분석해주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시간관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내용이 어쩐지 한국의 상황과 어느정도 유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꽤 쓸만한 연구주제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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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여인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4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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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챈들러의 네번째 장편 소설인 '호수의 여인'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유머러스하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빅 슬립', '기나긴 이별'만 보았기 때문에 그다지 '유머'있다고 하는 부분이 뭘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아마도 팬들이 아니면 그렇게 큰 차이점을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이번 작품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점은 아마도 필립 말로가 '도시 이외의 지역'에서 사건을 경험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해설에서는 도시 / 산골(호수)를 이분법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추악함과 순수함의 대립이랄까?), 이러한 이분법은 헐리우드 영화나 기타 다양한 방식으로 많이 얘기가 되었던 것이라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이러한 방식으로 나누는 것은 그다지 챈들러답지 않은 방식인 것 같은데(챈들러의 인물들은 모두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었고, 자신의 더러움과 추악함을 더러움과 추악함으로 덮으려는 인물들이었고 유일하게 추악하지만 자신의 더러움을 덮지 않으려는 인물이 필립 말로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에서는 패튼 보안관이라는 노쇠했지만 분별을 갖고 있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보다 다른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이야기도 기존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덜 무겁기 때문에 당시의 챈들러가 어떤 기분으로 책을 써냈을지 모르겠지만 여유있게 작업에 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더러움과 우아함이 공존하고 있는 필립 말로의 독특함이 조금은 약해진 것 같다.

(생각보다 덜 더럽고 우아하다고나 할까?)

 

이야기 자체는 챈들러의 책을 몇권 읽은 사람들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구성되고 흘러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챈들러는 사건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평가는 적절할 것 같다.

그가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과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진흙탕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필립 말로의 모습을 통해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리도 이들에 비해서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만들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분명 단순한 범죄와 스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점점 거대하게 되어가는 도시의 이면을 까발리는 폭로자나 사회소설가라고 생각된다.

아쉽게도 이야기에는 부분적으로 공백이 있고,

보다 논리적이거나 짜임새 있는 구조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도시'라는 공간의 타락함과 이면을 가장 깊이있게 파악한 몇 안되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한 필립 말로 또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가낭 밑바닥과 가장 높은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은 몇 안되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보관하고 있는 챈들러의 소설이 이것 뿐이라서 그와의 만남은 기약할 수 없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보다 챈들러의 작품을 음미해보고 싶다.

요즘에는 워낙 짬이 없어서(게을러서) 급하게 읽거나 끊어서 읽고 있는 중이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한동안은 아주! 두꺼운 책을 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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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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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세권의 '레이먼드 챈들러'의 책들 중에서 두번째로 '빅 슬립'을 읽게 되었다.

이미 한번 읽은 책이기는 한데... 전혀 기억도 없고,

끝까지 읽어도 기억나지 않는 것이 과연 이책을 진짜 읽기는 했던 것 맞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챈들러의 스타일에 감도 잡지 못하고 내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은 다르기 때문에 실망스럽다느 생각도 있었을 것 같고, 예상과 다르니 읽는 둥 마는 둥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젋었기 때문에(혹은 보다 멍청했기 때문에) 필립 말로 / 챈들러가 보았던 세상에 대해서 어떠한 공감도 못 느꼈기 때문에 흥미없게 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어느정도 그들의 시선처럼 세상을 볼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은 없지만... 흥미롭게 추악한 도시의 인간군상들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는 된 것 같다.

그만큼 나도 추악해졌다는 것일 수 있고(이전은 순수했다는 뜻은 아니다. 추악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무지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자신이 악마인지도 모르는 악마가 있듯이).

 

아마도 재미를 못 느낀 이유는 '이야기 구조'에서 뭔가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제임스 엘로이'의 작품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기 때문에 발빠른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엘로이에 비해서 조금은 느슨한 진행(그렇지만 갑작스럽게 의문이 풀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챈들러의 장기이자 매력이다)이 영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더군다나 마무리에 가서 느닷없는 결론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챈들러에 대한 부당한 평가일 것이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죽었고, 누가 죽였나? 를 갖고 독자들과 함께 머리싸움을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만들려는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때문에 꽉 짜이고 촘촘한 완결성은 엘로이나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는 약하다고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챈들러가 노리는 것은 어떠한 상황을 설정하게 만들어서 그를 통해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도록 하고, 사회에 대한 그의 시각과 생각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LA라는 도시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필립 말로'라는 인물을 통해서 얼마나 추악한 곳인지와 얼마나 그렇게 추악한 곳에서 얼마나 추악한 일들과 추악한 사람들이(추악 / 타락 등등은 챈들러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이다) 존재하는지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 작품을 챈들러는 만들어 내었다.

그는 일종의 사회소설가이고, 미국의 발자크와 같은 존재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타락한 발자크이겠지만.

 

챈들러의 작품과 필립 말로라는 인물은 나눠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작품의 중심 인물이며,

항상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터프하고 거친 이미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섬세하고 고독한 인물이다.

겉으로만 판단하기에는 그는 아주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인물로 느끼게 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끝없이 자신의 생각을 독백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냉소적인 유머와 빈정거림은 읽으면서 감탄하게 되지만 꼭 써먹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도 써먹었다가는 무덤파는 꼴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는 기사가 필요가 없는 세상에 태어난 기사와 같은 존재이다.

그의 대사처럼 처음부터 기사는 게임에서 제외된 존재였고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없어진 세상에서 살아가는 추락한 영웅일 것이다.

자신이 필요할 곳이 없이 살아가는 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살아가기 위해서 무언가와 타협한다.

별 수 없이 타락하게 되고 추악해졌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품위를 지켜나가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가 최소한을 지켜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경멸하고, 최소한을 지켜나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최대한 존중을 하는 이유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어떻게 지켜나가는지에 대한 평가일 수 있을 것 같다.

 

첫 작품인 '빅 슬립'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되는 '기나긴 이별'까지 세상에 대한 필립 말로 / 챈들러의 시각은 변함없으며 보다 진지하고 감상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

처음에는 냉소적이었다면, 후기에는 쉽게 단정내리기 보다는 보다 고민한다고나 할까?

 

'빅 슬립'은 단순한 범죄소설을 넘어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와 같은 위력을 지녔다. 그정도로 챈들러 / 말로가 보았던 세상은 그들이 자신들의 시각에 어느정도 확신을 가졌을지 몰라도 핵심을 파악했다고 생각된다.

 

내가 챈들러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다.

말로가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경멸의 대상일까? 존중의 대상일까?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지만.

 

나도 최소한을 지켜나가고 싶다.

까다롭다기 보다는 느슨하고 조금은 구성이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독한 매력을 가진 챈들러의 힘을 느낄 것이다.

 

깨끗한 것은 없다.

문제는 얼마나 더러워 졌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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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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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레이먼드 챈들러의 걸작으로 불리며,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기나긴 이별'을 읽게 되었다.

너무 때늦게 읽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역시나 그의 작품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챈들러의 작품은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하드보일드와 느와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규정해주고 있는 작품이며, 사립탐정이라는 존재가 어떤 느낌과 외양 / 성격의 캐릭터인지 편견을 갖도록 만드는데도 가장 큰 일조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멋진 책들 덕분에 사립탐정은 단순히 하나의 직업에서 벗어나 도시와 사회의 추악한 이면에 대한 르포기자와 같은 위치로 승격되게 되어버렸다.

혹은 자본주의 사회-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지막 남은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말타의 매'의 대실 해미트와 챈들러가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평가이겠지만.

 

책 뒷부분에 레이먼드 챈들러와 '기나긴 이별'에 대한 장문의 해설이 포함되어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보다 이해를 갖고 감상하게 되어서 '매니아라면 최소한 이정도는 되야하는구나'라는 느낌을 갖고 즐겁게 작품을 읽었지만, 역시나 해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길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필립 말로의 팬이나 챈들러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말로의 개인적인 감상과 다양한 묘사에 감탄을 하게 되겠지만 처음 접하는 독자들로서는 너무 감상적이고 느린 구성 때문에 긴장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레이먼드 챈들러 본인이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무에 그랬을까?

어쩐지 작품에서 나오는 작가는 본인에 대한 얘기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 당연히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또다른 분신과 같은 캐릭터 필립 말로는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성격이고, 의외로 지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본인의 대사를 통해서나 다른 사람의 표현을 통해서나 그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기는 한데,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사립탐정의 모습을 갖고 있다(반대로 그가 그려낸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를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서 써먹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필립 말로는 해설자들이나 여러 평론가들의 지적처럼 추악한 도시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허우적 거리는지를 냉철하지만 학자나 철학자와 같이 분석적으는 보지 않는다.

아마도 냉소적으로 보면서도 그것에 개입하게 되는 필립 말로의 모습에 팬들을 열광하게 되는 것 같고, 항상 어떠한 것으로도 그를 말릴 수 없다는 것도(돈 / 여자 / 권력은 그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사건의 중심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러한 것들에 무너지고, 좌절하고, 타협하는 우리들에게는 영웅과 같이 보여진다.

게다가... 그는 밝게 빛나고 때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처럼 추악하고 더러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다 현실적 존재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 같다.

 

그가 간간히 내뱉는 사회에 대한 지독한 냉소나 통찰력은 어떤 내용에서는 소름으 돋을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정확한 평가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저작들은 범죄소설이라느 장르를 넘어서 일정부분 사회소설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제임스 엘로이가 항상 목표로 하고 있는 바로 그정도의 위치를 그는 처음부터 올라서서 시작했다.

 

추악한 세상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거나 혹은 함께 발을 딛고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되었을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전형적인 하드보일들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부유한 여인.

그리고 그 죽음을 밝혀나가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사회의 지배층부터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모두들 하나씩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필립 말로는 이들과 함께 도시의 미로속에서 고뇌를 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어째서 지금까지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아마도 자본주의와 도시화가 끝장나게 되는 이후에나 옛날 이야기처럼 다뤄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챈들러-말로가 보았던 추악한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당신이나 나나 더러운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렇다고 그것에 면죄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랑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말타의 매'를 재미나게 읽었는데,

이상하게 '빅 슬립'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고 있다.

이번에 '기나긴 이별'과 '호수의 여인'을 함께 구입했는데,

이 기회에 '빅 슬립'도 다시 읽으면서 한동안 레이먼드 챈들로-필립 말로에 빠져서 지내야겠다.

 

우리는 도시와 아직은 이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이별을 했다는 것은 이제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니까.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저작들은 여전히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본인도 지키지도 못하는 (되지도 않는) 고귀한 말들에 비해서 보다 현실적이고 통찰력을 제공한다.

 

나머지 책들은... 어떻게 구한다...

 

참고 : 개인적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은 작가'라기 보다는 '좋은 작가를 알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지만 그가 추천하는 작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편이다.

그의 노력 덕분에 내가 보다 빨리 피츠제럴드와 챈들로와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를 레이먼드 카버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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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2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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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필립 아이레스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책에서는 '죽음'의 변화를 어떻게 분석해냈을지 모르겠다. 진중권은 그의 시각을 충실히 따라가며 그의 '미학'적 관심에 집중해서 책을 써내려갔을 것 같다는 생각만이 앞선다.

실제로 확인을 못했으니 어떤 방식으로 글을 써내려갔는지 모르겠다.

필립 아이레스였으면(혹은 아날학파 쪽이라면) '미술'도 중요하겠지만 다양한 자료(일기, 성경에 있는 그림과 낙서들, 당시에 만들어진 책, 전설, 교회에서의 설교집 등등)를 토대로 했을테니 진중권은 그의 시각을 미술에 적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쪽팔리게 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아날학파나 그쪽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의 시각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물론, 홉스봄이 아날학파에 대해서 약간의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던 부분에 대해서 살짝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춤추는 죽음 2'는 1권 이후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2권은 바로크를 지나서 낭만주의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근대초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이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의 시각은 이전에 비해서 보다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고, 공동체적인 시각은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권에서는 개인적인 평가는 절제하면서 진행했던 진중권의 글쓰기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림들과 죽음에 대한 시각의 변화에서부터는 조금씩 개인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약간은 한국 정치사에 대해서도 발언하고.

그렇기 때문인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죽음에 대한 사회적 시각의 변화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죽음이 어떻게 이용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살짝 변화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시기에 어떻게 죽음이 미화되었는지와 나치가 어떻게 죽음을 낭만주의적으로 미화시켰는지에 대해서 얘기도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의 내용에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순수히 '죽음'에 대한 미학의 변화를 이야기 해주기를 바랬던 사람들에게는 잠시 딴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은 진행했던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근대 초기에서의 죽음의 변화 이후에는 그다지 죽음에 대한 큰 변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마지막 죽음에 대한 변화가 전부이고 이후에는 새로운 것이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주제의 변화가 아니라 어떤 소재를 갖고 죽음을 말하느냐 정도일 뿐) 죽음을 얘기하는 정도이로 바뀌었으니 진중권으로서도 할말이 딱히 없을 것 같다.

2권의 중반 이후에는 두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미화하는지와 그와 반대편에 있었던 작품들을 비교하며 말해주며 글을 마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진중권의 말처럼 이제 더이상 죽음에 대해서 말할 것이 없는 것 같다.

더이상은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고 그냥 그것을 이전에 받아들였던 것들의 방법 중에서 각자의 취향대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변화한 것 같다.

 

진중권 본인도 어떠한 새로운 시각을 갖기 보다는 더이상 죽음에 대해서 어떠한 의미도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승화도 없이 죽음을 단지 죽음으로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금은 아쉬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두번의 세계대전은 이제 더이상 신이 죽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게 되었다는 인식의 변화가 생겼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변화하였다.

 

아리에스도,

엘리아스도,

진중권까지 시대가 변화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에 긍정적인 부분도 존재하지만 오히려 부정적인 부분이 많다는 것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만이 아니라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도 자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듯 스치듯이 죽음을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학자들처럼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듯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당신의 죽음을.

 

'춤추는 죽음'은 조금이나마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일지에 대해서 말해줄 것 같다.

 

최근에는 미학에 관한 진중권의 새로운 책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데,

미학에 관한 그의 책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기를 바란다.

 

그는 충분히 좋은 연구자이면서도 한국사회에 대한 비평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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