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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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4063150

 

 

 

픽션들과 함께 보르헤스의 작품들 중 가장 최고작으로 꼽히는 (다시 말해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알렙픽션들과 항상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은 작품이고, 그렇기 때문에 두 작품의 엇비슷함과 차이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두 작품의 비슷한 점을 찾기 보다는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람에 따라 읽는 방식이 다른 법이니 그런 것에 대해서는 참고나 하면서 읽으면 될 것 같다.

 

어차피 읽는 것은 각자의 방식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걸 잃어가며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픽션들이 좀 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혹은 하나의 소설-이야기 속에) 구겨 넣고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지켜보도록-경험하도록 만드는, 무언가 알다가도 모를 느낌의 기분으로 가득하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면, ‘알렙은 좀 더 구체적이고 어떤 이야기의 틀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완성된 느낌을 갖게 되고 각각의 특징들이 명확하게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겹쳐져 있음으로 헷갈려지게 되지만.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다시 읽어보게 만드는 현기증을 만들어내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픽션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야박한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만약 알렙을 먼저 경험했다면 이런 평가를 하게 될 수 있을까?

 

앞선 이야기가 과연 무슨 이야기였는지, 어떻게 진행되어서 지금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는지 항상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발한 재주가 있는...) 보르헤스이지만 알렙은 좀 더 명확하게 미로에서 헤매는 느낌을 만들기 보다는 이번에는 어떻게 뒤엉켜내고 뒤틀어버릴 것인가? 라는 기대와 궁금증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픽션들에 비해서 좀 더 읽기가 수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오직 보르헤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묘한 세계를 마음껏 펼쳐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엠마 순스와 같이 냉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러면서도 어쩐지 퉁명스럽고 어떤 방식으로도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고 엄격하게 입장에서 전달하려고만 하는... 하지만 계속해서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하는... 좀처럼 어떤 글쓰기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보르헤스만의 독특한 글쓰기로 완벽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경탄하게 되며 계속해서 다시 읽어보게 되는 소설-이야기도 있지만 자주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신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겹쳐내기도 하는 등 여러 관심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설-이야기로 완성시켜놓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엠마 순스아베하깐 엘 보하리, 자신의 미로에서 죽다’, ‘기다림’, ‘문턱의 남자와 같은 작품들이 좋았기는 하지만 보르헤스는 개인적으로 그런 작품들에 대해서 (‘엠마 순스를 제외한다면) 투덜거리듯이 냉소적으로 별달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라는 듯이 알려주고 있어서 어쩐지 알렙이 그로써는 전체적으로는 불만스럽게 느껴진 작품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계속해서 비교를-비교만 하게 되는데, ‘픽션들이 어쩐 형체를 만들어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듯이 알렙의 작품들을 의도했지만 결국 그런 작품으로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알렙알렙나름대로 보르헤스의 작품들 중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작품이고 여러 방식으로 논의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겠지만 픽션들을 생각한다면 무언가 완성된 작품이기 보다는 좀 더 다듬어내고 고민하면서 완성하려고 했던 느낌도 갖게 된다.

 

하지만 과연 픽션들처럼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힘겹기만 한 작품으로 완성했다면 어떤 기분으로 읽게 되었을까? 지금과 같은 느낌과는 분명 달랐을 것 같다.

 

알렙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보르헤스가 만들어낸 (그의 작품)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서 가장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작품처럼 되어버리는 것 같다. ‘픽션들로 향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과 같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알렙이 그렇게 어딘가로 향하기 위한 발판과도 같은(과정에 불과한) 작품일지는 의문이다. 분명 알렙알렙에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귀한 순간들을 무수히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지 좀 더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신비함을 적게 느끼게 될 뿐이다.

 

모호함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게 불만스럽게 느껴져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좀 더 풍요로워지고 풍부해진 느낌도 든다.

 

픽션들이 이론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발표하고 싶은 생각을 이야기-소설로 만들어내고 완성시켰기 때문에 그 충격과 놀라움이 여전하다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보르헤스의 생각에 대해서 논의를 하게 된다면(말하게 될 때 가장 앞서서 말하게 되는 작품이라면), ‘알렙은 그걸 좀 더 유연하고 느슨하게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덜 실험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그것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꼭 그런 식으로 읽어야하고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교하게 되기는 하지만 꼭 비교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는 두 작품이 머물고 있는 눈길은 무척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더욱 절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항상 보르헤스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의문을 여기에서도 다시 한 번 더 느끼게 된다. 과연 보르헤스의 방식이 옳은 것인가? 글쓰기에 옳고 그름은 없겠지만 보르헤스의 방식에 너무 많은 관심을 (여전히) 보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문을 많이 갖게 된다.

 

너무 복잡하고 난해하게 되어버려 쓰기와 읽기의 가장 기본적인 이해를 잊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에 대해서 별의별 학문적 논의만 가득하게 되고, 글을 읽는 재미에 대해서도 온갖 별의별 해석을 내놓게 되면서 도대체 쓰게 될 때나 읽을 때나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고 써야만 할지를 고민하게 될 정도로 이론과 검토를 위한 쓰기와 읽기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보르헤스의 글이 혹은 그의 글을 읽는 것이 읽고 쓰는 가장 정점에 올라선 순간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만을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글을 읽는 본연의 즐거움을 그리고 글을 쓴다는 매력을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의 글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성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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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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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http://blog.naver.com/ghost0221/60113648398

 

 

퉁명스러운

엄격하고

냉정한

창백하면서도

객관적이며

나른함과 몽롱함을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들을 하나의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다면, 그런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보르헤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러 분위기의 글들을 하나의 작품에 채워 넣고 있고, 우리는 단순히 여러 분위기만이 아닌 그가 생각하고 바라보았던 기묘하고 생소한... 지금은 좀 더 명료하게 이해되고 있는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순간을 만들고 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런 글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이처럼 호들갑스럽게 말하게 되는, 보르헤스의 그 어떤 작품들보다도 가장 먼저 손에 꼽게 만드는(개인적으로는 다른 작품들을 먼저 꼽게 되지만) ‘픽션들은 보르헤스가 어떤 생각-시각으로 글을 써냈는지를, 그가 빠져든 꿈-미로에 어떻게 함께 빠져들 수 있는지를(빠져들게 되는지를) 오직! 보르헤스의 글을 통해서 체험하게 되고, 그의 글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 같다.

 

몇 번을 읽어낸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감탄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제야 간신히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해하기 보다는 이해하지 못하며 픽션들을 혹은 수많은 글들을 읽고 있는 것 같다.

 

아직... 글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게 되기보다는 알 듯 말 듯 손에 잡히지 않는 생각들의 떠다님을 보게 되는 것 같다.

 

여전히 어리석기만 하다.

 

보르헤스의 글쓰기의 특징이라면, 그걸 과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일종의 이론-논리 혹은 입장을 하나의 소설-이야기-작품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쓰기에 관한 논문을 쓰거나 새로운 글쓰기에 관한 이론적 접근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걸 하나의 이야기-소설-작품으로 완성해서 내놓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강한 파급력과 충격을 그리고 논란과 혼란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생각을 무표정한 느낌으로 능청스럽게 농담하듯이 완성된 작품으로 던져놓고 있기 때문에 더욱 감탄하게 되면서도 과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깊은 의문에 잠기기도 하는 것 같다.

 

픽션들에서는 이처럼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접하게 되면서도 과연 이 결과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 속에서 겹겹이 쌓여진 보르헤스의 꿈-미로를 헤매게 되는 것 같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했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새롭게 조합시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했을 뿐이고, 어떤 타당함과 근거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그가 창조한 무언가일 뿐이다.

 

그가 만들어낸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았고 그저 신기루를 보여주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탄스럽다고 말하게 된다.

 

신비로움 속에 빠져들게 되면서도 그것들은 한낱 짧은 꿈일 뿐이고 모든 것을 허무로 향하게 만들기도 하고 있다.

 

다양한 관점들로 가득하고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쉽게 정리되지 않고 있지만 조금은 어떤 틀을 만들어내고 있고,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돌연변이이고 정체불명이기는 하지만 어떤 윤곽을 잃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겨우겨우 희미하기만 한 형체를, 희끄무레하지만 무언가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 같다.

 

어째서 보르헤스의 글을 반복해서 읽어내는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그저 그의 글이 어떤 수수께끼를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고, 그것에 여전히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나 도스토예프스키를 더 높게 칭송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보르헤스를 더 많이 읽었다는 말을 하게 될 것 같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은 그런 묘한 매력으로 가득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그동안의 관점들을 완전히 뒤집는 시선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읽고 싶고 이해해보고 싶어지는 것 같다.

 

이건 어쩌면 뒤틀린 감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맞지 않은 책읽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르헤스를 반복하면서 무언가를 알아채고 싶어지고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을 읽었는지 제대로 된 설명도 못하는 허탈한 책읽기를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보르헤스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순식간에 뒤바뀌는 설정들과 생각지도 못했던 결말 속에서 느껴지는 헷갈림과 감탄을 다시금 경험하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하여튼 독특하고,

하여튼 대단하다.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뿐이지... 달리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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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이원재 지음 / 어크로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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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은 다음 곧바로 읽었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음과 동시에 저자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 그리고 한국사회를 위해서 내놓고 있는 여러 제안들에 대해서 어떤 부분에서는 동의하기도 하면서도 때때로 다른 생각을 말해보고 싶어지게 되기도 하는 (반박하고 싶어지기도 하는) 이원재의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은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대중적인 경제 관련 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굳이 경제와 관련된 서적으로 분류하기 보다는 조금 더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제학이 기본적으로 밑바탕 되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경제학을 통해서만 지금 현재의 시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보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흥미로운 논의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가 좀 더 이론적인 반박들로 (그리고 주장들로) 무장하고 있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 ‘이상한...’ 또한 직접적으로는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었던 (그리고 강요되고 부추겨졌던) 탐욕에 대해서, 그리고 탐욕과 함께 떼어놓을 수 없는 (과잉)소비에 대해서 논의를 하면서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의미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내놓고 있는 진단과 처방 그리고 제안들이 모두 다 맞을 수는 없을지라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내용들이 많고, 지나치게 선량하고 정직하게 내놓는 결론들이라 현실에서 과연 얼마나 가능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될 때도 있지만 (알다시피 한국사회는 정상적이고 알맞은 제안들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사회가 전혀 아니다. 매도하고 비난하기가 일쑤다) 어쩌면 그만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에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바꿔나가야 할 시기가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루고 싶은 마음이야 모르지 않지만... 더 늦기 전에 시작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여러 구체적인 사례들과 과거의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대했던 분위기와 지금 현실의 모습을 (가혹한 결과들을) 보여주며-비교하며 정책적으로 대기업에 모든 것을 몰아주는 기존의 방식이 얼마나 그릇된 선택이었는지를 주장하고 있으며, 점점 밀려나고 쫓겨나게 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한국사회가 민주화 이후 (1987년과 1990년대의 어느 시점 이후) 어떤 실책들이 (안이한 판단들이) 이어졌고 그 과정 속에서 내동댕이쳐진 사람들의 사례들을 알려주며 그런 경우들이 얼마나 일반적인 경우인지를, 특수한 경우라고 말할 수 없는지를 우리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월스트리트

좀 더 정확하게는 (돈에 대한 굶주림과 이기심으로 가득하고) 주식과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시장이 만들어낸 탐욕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와 함께 금융권-정부가 어떤 단단한 유착관계 속에서 경제적인 불안정을 만들어내었고,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혼란을 발생시켰는지를 빠른 속도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부의 집중과 편중, 거짓된 번영, 주류 경제학의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허황된 논의들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 다음 다시금 한국사회로 눈을 돌려 한국사회는 어떤 과정 속에서 성장과 분배 그리고 불평등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번영을 말하고

재건을 말하며

한국사회는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그 신화를 어떻게 만들어내었고 달콤한 과실들이 나눠졌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선진국이 되기 위한 (재건과 번영을 위한) 악착같은 노력들과

그 노력들에 대한 결과물이 어떤 식으로 특정 집단에게 집중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관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를

성장에 대한 강박이 결국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탐욕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의 틀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경제적인 혼란과 환경문제는 어떤 식으로 겹쳐져 있는지를

 

저자는 우리에게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안정과 미래로 향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부탁하고 새로운 인식의 틀과 삶의 태도를 찾기를 강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놓는 여러 제안과 구체적인 논의들은 간간히 수긍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검증된 내용들이 많고 약간씩은 이미 많이 논의되고 있었던, 다만 항상 그렇듯 그런 주장과 논의들이 힘이 있는 이들에게 의해서 아예 묵살되고만 있던 내용들이 많아 (혹은 기존의 관념과 통념에서 많이 벗어나 좀처럼 쉽게 설득되지 않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주고 함께 주장해야 할 내용들인 것 같다.

 

책을 통해서만 제안들과 대안들을 찾고 있고, 그걸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던 과거를 살펴본다면)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모습들을 살펴볼 기회는 무척 희박하기만 했다) 안타깝기만 하지만 경제가 지금과 같이 계속된 위기상황에 빠져있고,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방식에 의문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는 논의들은 더욱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언제나 우리는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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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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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 http://blog.naver.com/ghost0221/60200083303

나쁜 사마리아인들 : http://blog.naver.com/ghost0221/60200980440

 

 

 

 

장하준은 2000년대에 벌어진(정확하게 말하면 2008년 전후로 일어난) (일련의 혹은 여러) 금융위기와 이전과 이후에 벌어졌고 벌어진 온갖 어안이 벙벙해지는 모습들을 (촌극들을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자신의 생각에 좀 더 확신을 갖게 된 것 같다.

 

최소한...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게 확신이겠지만.

 

그의 최근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이런 그의 생각을 솔직하게 그리고 좀 더 직설적으로 내놓고 있는 저작이고, 이미 많이 논의되기도 했던 내용들이 있기도 하지만 현재의 위기-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름대로 생각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제안으로 내놓고 있기도 하다.

 

그리 정교하지 못하다고 말하거나 체계적이지 못한... 여러 방식으로 문제점들을 찾아낼 수 있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장하준은 그 나름대로 어떤 해법을 제시하고 있고 그 생각에 어떤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확신이겠지만.

 

여러 경제학자들이 이런 저런 논의들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심스러워하는 모습들에 비해서는 장하준의 단호한 모습은 꽤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고 누구나 머리와 마음에 그리고 가슴에 새겨두고 있어야 할 탐욕에 대한 신성시함을 비난하고 있으며, 최근의 자유주의(지금 논의되고 있는 자유주의가 얼마나 경제에만 편향된 자유주의인지에 대해서는 그리고 왜곡된 자유주의인지에 대해서는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제는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조금 지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틀렸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건 그게 틀렸기 때문이다)(지나칠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던 경제학 이론-논의들과 이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고 종교였으며 신앙이었던 이론들에 대해서 그 논의들과 생각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다양한 근거를 내세우며 그 허황됨을 비판하고 있다.

 

제정신이 아닌 듯

무언가에 홀린 듯

이 시대의 시대정신에 휩쓸려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기 보다는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있고,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들고 점점 더 암울한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정서를 가혹하게 비난하고 비판한다.

 

틀린 말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청하진 않는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아직도 헛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장하준은 이런 잘못과 그릇됨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 다음 극단적인 결론을 찾기 보다는 (그런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을 갖기 보다는)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긍정성을 말하며 좀 더 안전하고 지속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대안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 입장-결론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그로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제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건 그가 그 나름대로 내놓는 결론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잠시 시끄러움을 멈추고 그의 생각에 최대한 다가가 보자.

그리고 함께 고민하며 어떤 대답을 찾아내보자.

 

어쩌면 그런 일반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논의조차 불만스러운-불편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을지도 모르지만) 장하준이 경제학자로서 오랜 세월 연구하고 생각했던 결론들을 자신과는 다른 입장이라고 폄하하고 매도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좀 더 관심을 갖고 함께 지금 시대의 위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장하준의 생각까지도 매몰차게 비난한다면 과연 우리가 찾아야 할 올바른 판단은 무슨 수로 찾아낼 수 있겠나?

 

너무 자신의 생각에만 머물면 더 좋지 못한 결론()을 찾게 될 뿐이다.

 

좋은 내용이 담겨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지금 이 시대를 변하게 만들기 위해서 함께했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떤 세상을 꿈꾸든지 지금 세상보다는 낫도록 애써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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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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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연금술사를 읽었던 적이 10년은 더 지난 예전이기 때문에 읽게 된지 오래되었다... 라는 표현을 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다고 볼 수 있는데, 그때에 느꼈던 깊은 감동과 지금 다시금 읽으면서 느끼는 약간은 무덤덤한-심심한 기분은 단지 긴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달라진 감상일지도 모르지만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시선으로 연금술사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큰 인기와 사랑을 받고 있는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고 우화라고 볼 수 있는데, 간결하고 담백하면서도 이야기가 갖고 있는 매력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한 인기-사랑을 받고 있고, 잊지 못하는 작품으로(나와 같은 사람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

 

연금술사의 내용-줄거리에 관해서는 온갖 방식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무척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시 읽게 되면서 느끼게 된 생각은 한편으로는 동화-우화의 분위기 속에서 자아에 대해서 그리고 깨달음과 믿음과 신뢰, 사랑과 같은 여러 가지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들려주려고 하고 있고 알려주려고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그런 것들이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무척 짜임새 있고 매력적으로 담겨져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 짜임새나 구성이 조금은 헐겁고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결국 이리저리 돌려서 말할 필요 없이 다시 읽으니 심심하다는 (혹은 그때의 그런 기분이 들 정도는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는 말인데, 그런 의미에서는 조금은 아쉬운 다시 읽기가 되는 것 같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즐거움을 다시 생각하게 될 정도는 아닌, 혹은 그때의 감정을 생각한다면 지금 느끼게 되는 기분은 불만스러움으로 가득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때와는 분명 달라진 생각을 갖고 연금술사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것 같다.

 

그것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주인공 산티아고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어떤 모험과 난관을 겪게 되는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읽게 되었다면, 지금은 산티아고를 통해서 (파울로 코엘료가) 말하려는 자아에 대한 (유난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몰두가 무척 인상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 같다.

 

마치 자기개발-계발 책을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아에 대한 고집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이들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무슨 선택이 자기 자신을 위한 가장 최선의 선택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산티아고의 보물-자아 찾기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모험들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 삶과 세상에 대한 (일종의) 지혜들과 통찰력과 함께 연금술사에서 자아에 대한 논의는 연금술사가 다루고 있는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도 무척 유난스럽고 도드라지게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보게 되기도 하고 읽어보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다지 이전에 비해서는 흥미롭게 느껴지지가 않고 어쩐지 무언가 잘못된 점들과 불만스러운 부분들을 더 많이 말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솔직한 마음인데, 그럼에도 처음 읽었을 때의 좋은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런 생각들을 더하기 보다는 어떤 식으로 내 생각들이 바뀌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처음과는 많이 달라진 평가를 하게 되는데,

이런 변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기에 좀 더 몰두하고 싶어진다.

 

어차피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글과 글을 읽는 나 자신과의 계속되는 마주함일 뿐이니까. 그 마주함에서 변하는 것은 내 자신이지 글은 아닐 것이다.

 

 

 

참고 : ‘연금술사를 통해서 파울로 코엘료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근데,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해서 사람들이 별다른 칭찬을 하는 경우는 적었던 것 같다. 그는 그저 연금술사로만 대표되는 작가인지... 그게 아니라 다른 대표작도 꼽을 수 있는지 궁금하게 된다. 파올로 코엘료의 작품들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무언가 대답을 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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