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파리를 그리다 - 인문학자와 함께 걷는 인상파 그림산책
이택광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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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인적으로는 인상파 작품들을 무척 좋아하고,

인상파로 분류되는 이들 중에서 모네의 그림들을 특히나 좋아하기 때문에 인문학 특강을 통해서 운이 좋게 얻게 된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는 우연하게 얻은 책이기는 하지만 무척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한 것 같다.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인상파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도 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들과 그림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저자는 그림에 주목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딴청을 부리는 책일지도 모른다며 그림과 화가에 얽힌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림과 화가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함께 다뤄내면서 단순히 그림을 그림으로서만이 아닌 한 시대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시도이기도 하다는 것을(그림을 통해서 한 시대를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을) 읽는 이들이 이해하도록 의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데, 대중적이면서도 단순히 대중적이지만은 않은 논의들도 있어서 입문자로서 무척 소중한 내용들로 채워진 것 같다.

 

하지만 인상파에만 한정된 논의이기도 하고,

인상파들이 활동을 했던 19세가 중반 / 20세기 초라는 한정된 시기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림에 대한 논의가 상대적으로 적게 느껴지거나 자세함이 적게 느껴질 수 있기도 하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서는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함께 읽으면서 좀 더 풍부한 읽고 보는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에 더해서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파리, 모더니티를 읽게 된다면 19세기의 파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인상파의 탄생과 종언이라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완성시켜나갔던 수많은 작가들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해주며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고, 단순히 그림에 대한 평가만이 아닌 그 그림이 만들어지게 되는 사회적인 변화와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무척 상세하게 다뤄주고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인상파 그림이 완성됨과 함께 그 그림을 넘어서려는 시도 또한 다루면서 하나의 시작과 끝 그리고 이어짐으로 논의는 완성되고 있다.

 

새로운 가치를 찾게 되는 이유와

보다 거리감이 거치게 된 도시와 농촌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망의 주도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파리

기차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리고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된 여가

그렇게 변화되는 사회와 공간과 문화는 삶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우리들의 시선도 그리고 그림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게 만들었고 저자는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인상파를 다뤄내고 있다.

 

좋아하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인상파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어째서 그들의 그림()이 좋았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논의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아마도 저자가 줄기차게 얘기하듯 인상파가 바라보던 시선에 눈길이 끌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의 시선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인상파가 바라보았고 그 바라봄을 통해서 자신들의 시선을 그림으로 남기듯이 지금 세상을 바라보고 현재의 감수성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무언가로 남겨내는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척 고민스럽게 대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있기나 한 것인지... 그게 의문스럽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 중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어질 때마다 펼쳐보게 될 것 같다.

 

 

 

참고 : 자주 언급되는 시선과 시각에 대한 문제를 좀 더 집중해서 생각해본다면 원근법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인상파라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벗어남이 어떤 새로움을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려봐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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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근대문학의 기원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4
가라타니 고진 지음, 박유하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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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그리틱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트랜스그리틱이 무척 의미 있는 논의들과 여러 생각들이 가능하게 만드는 논의들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저서들을 찾아 읽게 되면서 그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어떤 논의와 어떤 의미들을 찾았느냐고 물으면 입만 뻥긋거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 현재에 존재하고 있는 사상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서 무척 중요한 인물 중 하나라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고,

국내에서는 그의 저서들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제목처럼 일본 근대문학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대한 검토이면서도 단순히 그런 검토로서 끝날 수 있는 논의를 넘어선 시선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비평가에서 이론가의 입장으로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그의 저서들과 그의 업적들 그리고 시기적인 특성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부족하기만 하니 그런 것들은 그에 대해서 좀 더 면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니체와 푸코의 계보학적인 방식으로 일본 근대문학에 대해서 검토하고 있기는 하지만 단지 그런 방식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입장이 일정하게 가미되고 있기 때문에 좀 더 풍부한 논의기 가능할 것 같으며 그의 문제의식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매우 압축적인 방식으로 근대화가 진행된 한국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특히나 더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질 수 있기도 한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이 자주 거론하고 있는 작가들 중 기껏해야 나쓰메 소세키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정도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논의를 쉽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일정하게 거리감을 갖고 이해되기도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은 (그리고 번역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 대해서 여러 방식으로 언급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근대문학이 생겨나게 된,

무척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완성되었다고 느껴지고 이미 있었던 것으로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 역사와 기원은 짧기만 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논의를 시작하고 있고, 나쓰메 소세키를 대표적으로 근대문학이 어떻게 스스로에 대한 일정한 정체성에 대해서 인식하게 만들게 되는지를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풍경을 인식하게 만드는지를 검토하고 있다.

 

과거와는 다른 감수성과 시선을 갖게 되는 과정을 정교하게 검토하고 있지는 못하지만(무척 짧은 방식으로 논의를 정리한다) 여러 작가들에 대한 분석과 함께 변화의 과정을 알려주며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갖게 되는 시선의 변화에 대한 논의를 더하면서 이런 외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내면의 발견을 통해서 무엇이 어떻게 변하게 되었는지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일본에서 일어난 언문일치 운동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그동안의 말하기 /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 나타나면서 어떻게 내면이 다뤄지게 되는지를 검토하고, 글과 말의 관계가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관계가 되는 것과 함께 그것이 사회-국가의 제도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런 변화에 대한 예민한 분석과 함께 내면이 인식되고 만들어지는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푸코를 통해서 더욱 더 강조되는 고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일본 특유의 사소설에 대한 특징들과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그와 함께 그것들이 어떻게 그 기원이 은폐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 기원에 대한 검토 중에서 일본에 유입된 기독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이 흥미로웠고, 후반부에 논의되고 있는 질병이 갖고 있는 의미의 변화와 은유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어떻게 질병이 언급되고 논의되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은 제프리 C. 보커 / 수전 리 스타의 사물의 분류가 잠시 떠올려지기도 했다.

 

이런 논의와 함께 일본의 문학에서 어떻게 아동이 등장하고 논의가 되는지를 검토하는 등 일본의 근대문학을 통해서 근대화가 갖고 있는 특징과 함께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의 일정한 연속성이 있기도 하지만 급격한 도약이나 단절이 있기도 하다는 점을 가라타니 고진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특히나 아동의 발견을 통해서 어떻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시선이 나타나는지를 검토하며 근대로 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변화들에 대한 검토는 아날 학파의 방식들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석을 해내기 때문에 비슷한 결론을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찾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에서는 문학이 갖고 있는 구성력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근대 이전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특성들과 그 이후의 특성들을 비교하며 무엇이 변했는지를 찾아보면서 그런 변화와 함께 그것이 우리들의 시선의 변화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시선의 변화가 이야기의 구성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알려주면서 반복해서 가라타니 고진은 그 변화의 중심에는 근대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다.

 

근대의 시간과 공간으로 이행하면서 겪게 되는 그 수많은 변화들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 영향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 이전의 과거들을 바라보면서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되는데, 가라타니 고진은 바로 그것들을 깨우쳐주고 있고, 이야기의 완성과 함께 그 이야기의 완성을 일부러 거부하는 방식들이 갖고 있는 특성들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면서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대화 과정이 갖고 있는 특성과 일본 사회가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냈던 특이성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확인하고 있다.

 

마지막 나쓰메 소세키를 다시금 논의하면서 장르적인 구분과 그 사라짐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서도 그리고 문학에 대한 이해와 장르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서 짧은 내용 속에서 무엇을 논의하는지 쉽게 이해되지가 못했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근대문학을 통해서 근대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고 그 형성의 과정 속에서 이전의 과거와 어떤 단절들을 보여주고 있는지 자세히 검토하고 있는데, 연속성의 특성보다는 단절과 절단의 특성을 좀 더 강조한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특성에 대한 논의에서 일본만이 아닌 근대화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변화와 함께 그 변화에서 함께 나타나는 개별적인 차이들을 함께 검토하며 일정한 같음과 일정한 다름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문학에만 한정해서 논의하면서도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 논의이기도해서 무척 흥미롭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쉽게 이해되기가 어렵기도 해서 앞으로도 좀 더 생각해보며 그 논의를 다시금 파악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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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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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지 / 제나로 시리즈의 대단원의 끝맺음인 문라이트 마일은 그동안의 고생담에 대한 자연스러운 안식이면서도 그 결말이 후련함 보다는 쓰디씀으로 마무리 된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비극성과 암울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개운한 마무리가 아닌

뒤숭숭한 기분의 우울한 마무리를 선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켄지 / 제나로 시리즈의 4번째 작품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의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만이 아닌 다른 켄지 / 제나로 시리즈 작품들도 부분적으로 다시금 가져오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재구성-재활용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과 비교하는 평가도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이런 과거 작품들의 되새김이 문라이트 마일의 독자성을 부족하게 만들고 시리즈의 끝맺음을 위한 내용 구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이야기 진행이고,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끝을 향하게 된다는 점에서는 칭찬을 해주고 싶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내용 진행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언뜻 과거 작품들을 언뜻 생각나도록 만드는... 그런 느낌이 들게 되는 작품이었다.

 

그동안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 / 제나로 시리즈 말고도 하드보일드-범죄소설 장르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켄지 / 제나로 시리즈만큼의 재미와 흡인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실패한 시도들이라고 생각되지만(아쉽게도 아직까지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미스틱 리버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평가를 조금은 미뤄야 할 것 같다) 켄지 / 제나로 시리즈 이외의 작품들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감와 재미가 있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좋은 작가라고 생각되고, 아쉽게도 이번 작품을 끝으로 더 이상의 켄지 / 제나로 시리즈를 만날 것 같지 않다는... 마지막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들이 어떤 완성도를 보여줄지 궁금함을 느끼게 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이 문라이트 마일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의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고, 아만다 실종 사건이 종결된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다음에 사건은 시작되고 있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부터 더욱 짙어지기 시작하는 사립탐정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와 내면적 갈등 그리고 자괴감은 좀 더 커졌고, 그런 고민과 함께 앤지와 가정을 꾸리고 딸아이가 있는 등의 가장으로서의 모습과 시대적으로는 경제적인 불황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경제적인 곤란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전보다 더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를 바라는 기도이후 10년이 넘는 기간의 공백기를 읽는 이들도 느끼도록 하려는 듯 다양한 소품들과 여러 대화들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그리고 변해버린 시대상을 확연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고, 그런 시대의 풍경 속에서 자신이 늙었음을 그리고 모든 것에 지쳤고 회의에 빠졌음을 알려주는 여러 독백들을 통해서 문라이트 마일은 한편으로는 다시금 사라진 아만다를 찾고 그 찾게 되는 과정 속에서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의 선택에 대한 (예상하기는 했지만) 뼈아픈-현실적인 결론을 마주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켄지 / 제나로 시리즈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패트릭 켄지 시리즈라고 말할 수 있는 주인공 패트릭 켄지의 현실에 좌절하고 세상에 좌절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켄지 / 제나로 시리즈가 진행이 될수록 앤지 제나로는 점점 더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만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거의 비중이라고 찾을 수 없는 조역에 불과할 뿐이고 부바와 마찬가지로 예전의 개성 넘치는 모습들을 기억나게만 만들고 그 모습들마저 희미하게만 기억나게 되는 그런 미미한 존재로서 축소되는 느낌이 들어 앤지와 부바의 팬들이라면 아쉽게 느껴졌을 것 같지만 달리 본다면 데니스 루헤인은 좀 더 패트릭 켄지에 집중해 이야기를 완성시킴으로써 이 시리즈가 마치 보스턴-도체스터를 배경으로 하는 오디세이아로 완성시키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오디세이아와 엇비슷한 끝이기는 하지만 그게 그렇다고 볼 수 없기도 할 것 같다.

생각에 따라서는 이보다도 더 불편한 결말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라이트 마일은 어떤 의미에서든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의 패트릭 켄지의 선택을 철저히 부정하는 작품일 것이고, 사정없이 가혹하고 잔인하기만 한 보복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견디기 어려운 결말이고 충분히 가슴 아프고 애초의 선택에 대한 불길함을 설득력 있게 서글픈 결말로 그려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부분적으로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의 결말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아만다를 통해서 신성한 관계에서의 데지레를 좀 더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려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흥미로운 진행과 흡인력 그리고 박진감을 만들어내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결말에 가서의 반전과 슬픈 마무리는 켄지 / 제나로 시리즈가 갖고 있는 하드보일드-범죄소설이 갖고 있는 비극성과 완결성을 충분히 만들어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완성에 있어서의 만족감은 이전과 달리 조금은 아쉬움이 남게 되는 것 같다.

 

우선 느끼게 되는 아쉬움은 패트릭 켄지가 많은 모순과 틀렸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선택했던 그 결심들에 대해서 다시금 그 선택을 반복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런 선택들로부터 도망치거나 그냥 그대로 두고 싶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인데,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고 감춰졌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더 이상의 행동을 옮기지 않고 개입하기를 꺼려하면서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아만다를 통해서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그릇된 결과를 만들었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일까? 하지만 그보다 패트릭 켄지 본인이 아만다에 대한 선택에 후회하거나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모습은 없으면서 새롭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어떤 선택이나 갈등도 없이 도망치듯 가족으로 향한다는 점은 좌절로 인한 더 이상의 선택을 거부하겠다는 뜻으로만 느껴진다.

 

변명하듯이 도망치는 모습이랄까?

그동안의 고난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걸 갖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이기도 했다.

 

그가 그동안 겪어왔던 수많은 고난들과 고비들 덕분에 모든 것으로부터 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점과 그래서 결국 지금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보겠다는 모습에 멋진 마무리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선택 전에 그동안 그가 수많은 갈림길에서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해냈던 선택들을 이번 작품에서는 그 선택에서 비켜서고 미루기만 하는 모습에서 좀 더 복잡한 존재로서 패트릭 켄지가 만들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흔한 말로 좀 더 현실적인 인물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주어진 선택에 대해서 우리들과 다를 것 없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자신과 무관함을 좀 더 내세우는 모습에서 패트릭 켄지가 그간 갖고 있었던 자신만의 규칙에서 사회와의 일정한 갈등에서 도망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가기로 선택했다는 생각을 들도록 만든다.

 

아마다가 겪었던 과거와 그리고 겪어야 할 미래들을 생각하며 그녀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게 되거나 한편으로 대견한 느낌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선택했고 행했던 여러 잘못들에 대해서 단순히 훈계나 비판으로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은 좀 더 패트릭 켄지의 모습에 복잡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것 같다.

 

작품은 아만다에 대해서 그릇됨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녀의 선택에 어떤 매력을 불어넣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데니스 루헤인이 부분적으로 자신의 생각들을 수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도 예전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방식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입장의 변화 이후의 결론이 어떤 의미에서 무척 자연스럽기도 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패트릭 켄지는 세상과의 갈등을 뒤로하고 가족으로 향하고 자신의 가족과 친구인 부바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작품은 마무리를 짓게 되는데, 그가 그 수많은 모험과 온갖 고난 끝에 선택하는 가족이라는 명확한 테두리와 그 테두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자신과의 무관함을 강조하는 모습은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등을 돌린 것이 맘에 걸려서 집요하게 사건을 파고드는 모습과 분명하게 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고, 그 자기부정과 자기긍정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보다는 모든 것들을 잊고 안정과 평온을 찾겠다는 결론을 찾아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 속에서는 당연한 결말인 것 같다.

 

가족과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변사람들에 대한 확실한 선긋기는 이전과는 꽤 달라진 모습이고 이것을 매우 미국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동안의 서구-근대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이런 선택이 아만다와 대립되기 보다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마찬가지의 결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아만다 또한 그녀 스스로 자신만의 규칙 속에서 행동했고 그 과정 속에서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이라고 정당함을 항변하겠지만 자신이 정한 가족들을 만들어내는-지켜내는 과정으로 인해서 만들어낸 죽음들과 타협들(약물중독의 드레는 쉽게 죽이면서 온갖 범법을 자행하는 마피아 조직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마피아 조직 때문인데도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에 외면하고 있을 뿐이고, 그런 외면은 패트릭 켄지와 아만다 맥크레디 둘 다 동일한 정서와 논리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는 누구도 죽일 수 있다는 가라, 아이야, 가라의 마지막 주장을 문라이트 마일은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그리고 지금-현재의 미국은 바로 이 논리 속에서 모든 선택이 이뤄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선택이 단순히 미국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논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대부분은 이 논리 속에서 선택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 논리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는 쉽게 다뤄지지 않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게 된다면 켄지 / 제나로 시리즈는 세상과 다툼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바로 그 세상과 화해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버지와의 격렬한 갈등과 함께 세상에 대한 냉소와 환멸 그러면서도 애정을 보여주었던 작품이 점차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세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는 세상 속에 머무는 것을 긍정한다는 점은 세상에서 이탈된 존재들이기도 했던 그것을 긍정하기만 했던 이들이 세상으로 귀환한다는 방식으로 오디세이아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켄지 / 제나로 시리즈는 하드보일드-범죄소설이면서 서구-근대의 세계관이라는 밑바탕 위에 서있는 이야기 구조일 것이고 결론도 아주 틀린 결론은 아닐 것 같다.

 

하나의 성장소설일 것이며,

하나의 개인이 완성되는 작품일 것이며,

벗어난 존재가 세계 안으로 향하게 되는 이야기일 것이며,

어떤 합리화가 완성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이걸 어떤 식으로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안타까움을 가져야 할 것이고 좀 더 치열하게 세상을 싸워나가길 독촉해야 할 것인가?

그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는 이미 패트릭 켄지가 겪었던 사건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그런 결론을 내놓지도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어떤 결론을 내놓아야 한다면,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조심스럽게 지금의 패트릭 켄지의 선택에 대해서 의문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최소한 그렇게는 말해야 할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이정도만이라도 말해야 할 것 같다.

근데, 이걸 누구에게 강요하겠는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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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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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88만원세대

 

이제는 너도나도 쉽게 사용하는 용어가 되어버린...

지금 현재의 한국사회의 젊은이들을 규정하는 가장 간략한-우울한 단어 중 하나가 되어버린...

처음에는 낯설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당연시하게 느껴지게 된 이시대의 젊은이들에 대한 이름표와 같은...

 

어쩌면 저자인 우석훈 / 박권일은 특별한 생각 없이 좀 더 인상적으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을 불러내기 위해서 지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지어진 이름대로 한국의 젊은이들은 절망()의 시대를 여전히 살아가고 있고, 아마도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 절망이 이어질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갈 것만 같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은 (자신만만함만 가득하고 하는 것이라고는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박근혜 정권에 대한 지나친 비관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저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더 나빠지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런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 같다.

 

세상은 전혀 나아질 것 같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더 나빠질 것 같다고 쉽게 단정하게 된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주 언급되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읽어보려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항상 나중으로 미루기만 했었고, 그렇게 미루던 중 절판이 된다는 소식을 접해서 아무래도 인연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잊고 지내던 무렵 갑작스럽게 손에 들어왔기 때문에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읽게 되었고, (박권일의 경우는 아니지만) 팟캐스트(김미화, 선대인, 김용민과 함께 한 나는 꼽싸리다’)를 통해서 이미 우석훈이 바라보고-생각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함께 그 대안들을 접했었기 때문에 되도록 이해하기 쉽게 써내려간 내용들에 막힘없이 읽어나갈 수 있기는 했지만 그 막힘없이 읽는 도중에 느끼게 되는 계속해서 악순환으로만 나아가는 한국사회의 침몰에 대해서 답답함과 불편함이 커지기도 했다.

 

저자()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1020대의 지금-현재의 삶과 쉽게 예상되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우려와 고민 그리고 걱정으로 서장을 시작하고 있고, 그런 그들에게 주어진 이름인 88만원세대가 어떻게 붙여지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며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승자독식

무한경쟁

세대 간 경쟁과 세대 내 경쟁

 

위와 같은 틀로 정의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 대한 간략한 평가와 함께 ‘88만원세대는 사정없이 어렵고 읽기가 부담스럽기만 한 경제서적의 (정교하고 상세하지만 읽기가 싫기만 한) 이론적인 접근이 아닌 일반적인 교양서적이나 인문서적의 모양새로 글이 쓰여서 쉽게 읽혀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학적인(그리고 그밖의 다양한 인문학적인) 이론적 밑바탕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해하기 쉽기만 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전에도 자주 주장되었고,

그리고 여전히 주장되고 있는...

미래와 다양성을 긍정하는 시각 속에서 최대한 구체적인 대안도 제시되고 있는 꽤 흥미로운 논의들이 많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저자()이 언급하는 대안들 중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에(적용시키려고 하는 시도조차도 없기 때문에) 글로써만 만들어진 대안이라는 점 때문에 안타까움은 더해지게 되는 것 같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어째서 동거권을 언급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약간은 엉뚱하고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는 ‘88만원세대는 자칫하면 뚱딴지같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질문을 통해서 한국과 (동거권을 말할 수 있는) 다른 사회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경제구조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그렇게 ‘88만원세대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어떤 사회적 / 경제적인 틀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민감하게 다뤄내고 있다.

 

최근 갑작스럽게 논의의 중심에 위치한 대학등록금 문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대부분의 시간을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서 알바를 해야만 하는 젊은이들이 좀 더 다른 것들을 꿈꿀 수 있고 관심을 가져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여러 문제점들과 대안들을 언급하며 지금의 1020대 젊은이들이 인질이 되었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착취당하고 있는지 자세히 지적해주며 전체적인 논의는 시작되고 있고, 그런 시작과 함께 지금-현재가 지난 과거와 얼마나 다른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주며 포드주의 이후의 첫 번째 세대라고 젊은이들을 정의해주며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되도록 간략하게 정리해주면서 이처럼 뒤바뀐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 어떤 변화된 등장과 성장, 조건 속에 놓이게 되는지를 다양한 시각과 직군을 통해서 검토하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서 질식해가고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88만원세대는 계속해서 제안과 대안들을 내놓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제안과 대안들이 실행에 옮겨지기 어려운 이유 또한 냉철하게 인식하며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여러 선진국들의 경우들을 비교하며 한국만의 특성과 기형적인 부분을 확인하며 젊은이들이 희망이 되어야 하지만 착취당하고 있을 뿐이고 벼랑 끝으로 내몰려지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깨우쳐주고 있다.

 

다시금 여러 제안들과 대안들을 내놓으며 끝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그 끝맺음 속에는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우울한 진단 속에 허무함과 허탈감이 느껴지기만 하고, 좀 더 안정적인 균형을 찾기 위해서 어떤 선택이 필요한지를, 어째서 존중과 신뢰를 찾아야 하는지와 그것을 찾음으로써 어떤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을지를 알려주기 위한 절박감도 느껴졌다.

 

개인들의 노력이 아닌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한 이와 같은 제안과 대안에 대해서 지금까지는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한동안은 한국사회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있고-않을 것이고, 그 대답 없음은 점점 더 악화되어만 가고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계속해서 나락으로 향하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과연 이대로 계속해서 우리는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기만 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바깥으로 향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볼 것인지 좀 더 고민하며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아야 할 것 같다.

 

혼자서 고민하고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는 좀 더 바깥으로 나와서 얘기를 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88만원세대에 대한 논의가 거의 종료 되었거나 더 이상의 언급은 없게 되었는데, 이처럼 뒤늦게 읽게 되어 오히려 좀 더 편하게 지금의 한국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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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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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지 / 제나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제 마지막 작품인 문라이트 마일만이 남았다) ‘비를 바라는 기도는 제목만으로는 서정적이거나 감상적인 기분이 들게 만들지만 켄지 / 제나로 시리즈의 그동안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잔혹하고 비정한 세상을 보여주고 있고, 현실-세상을 보여줌과 함께 음울한 결론으로 끝을 맺는 방식은 여전하기만 하다.

 

이전보다 좀 더 암울한 결론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가라, 아이야, 가라와 같이 논쟁적인 끝맺음을 보여주진 않고 있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보스턴에 대한 상세한 묘사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민한 시선을 보여주지 않고 있고,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는 읽는 이에 따라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쉽다면 아쉽겠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갖고 있는 재미와 흥미가 부족하진 않기 때문에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가라, 아이야, 가라가 전체적으로 큰 이야기 흐름을 보여주었기 때문인지 그와 같은 방식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처음의 시작에 비해서 조금씩 이야기가 축소되고, 결국에는 한 가족의 문제로 최소화되는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제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아쉬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일종의 가족 내부의 갈등의 무척 거대한 이야기처럼 확대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개입 속에서 기형적인 방식으로 해결되고 있는 결말이기 때문에 이런 결말에 대해서 좀 더 흥미로운 분석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비를 바라는 기도는 침울함과 피곤함이라는 정서로 가득한데, 작품의 중심인 패트릭 켄지는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부러진 인생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 시도는 계속해서 실패하기만 한다.

 

이렇게 좌절한-낙오된 정서 속에서 이야기는 진행되고 있고, 그의 피곤함으로 가득한 수사는 패배감 속에서도 자신이 정한 방식 속에서, 어떤 정당함 속에서 삶을 살아가려고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긴장을 통해서 비를 바라는 기도는 범죄소설이면서도 일반적인 범죄소설의 영역을 넘어서고도 있다.

 

개인적인 고뇌와 방황 그리고 계속되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와 함께 그와 별개로서 점차 흥미와 궁금증을 더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두 개의 축으로 데니스 루헤인은 여러 가지를 탐구하려고 하고 있고, 그 시도는 무척 성공적이다.

 

누구도 의문부호를 보이고, 어떤 이들도 의미를 느끼지 않는 사건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집착하는 켄지의 모습과 그 열중으로 인해서 점차 밝혀지게 되는 진실들, 그리고 그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들은 점점 더해지는 박진감과 함께 비를 바라는 기도가 탐구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눈치를 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에서의 반전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 마지막의 지독한 쓰디씀이 좀 더 구원에 대한 열망과 의미,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이 작품에 가장 어울리는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좋은 정리를 보여주면서도 결국 사건은 해결되지만 해결됨과 함께 패배자가 된다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범죄소설의 이야기 구성을 철저하게 따른다는 점 또한 인상적인 것 같다.

 

씁쓸함이 가득한 패트릭 켄지의 독백들과 함께 언제나처럼 개성이 넘치고 즐거움을 안겨주는 여러 등장인물들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단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째서 켄지 / 제나로 시리즈가 현대 하드보일드-범죄소설의 고전으로 통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삶에 대한 환멸로 가득하면서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패트릭 켄지의 노력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 나 자신에게 향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게 되는 것 같다.

 

그가 느끼는 환멸과 좌절이 어쩐지 그만이 아닌 누구나가 느낄 법한 기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고, 그렇기 때문에 패트릭 켄지의 고민들과 괴로움들에 많은 이들이 설득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개인적인 고뇌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의문의 사건과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의 긴박감과 재미는 패트릭 켄지의 내면적 갈등과 정반대되는 외향성을 만들어 내면서 절묘한 균형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문학적인 관심을 추구하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시도가 성공한 보기 드문 작품이기 때문에 켄지 / 제나로 시리즈는 좀 더 정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흥미롭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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