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분명 ‘신자유주의’로 통틀어 설명할 수 있는 자본의 새로운 지배 방식은 그리고 그에 따라 변화된 환경(경제-정치-사회-기술 등)은 그로 인해서 정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과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전 시기와는 달라진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변화된 환경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과 그에 따라 ‘포스트’와 ‘탈’이라는 단어가 달라붙어서 사용되는 온갖 논의와 이론들은 변화된 환경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위해서 혹은 이전의 것들을 부정하거나 다른 제안을 내놓기 위해서 쓰이게 되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런 변화된 환경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제안이자 21세기에 맞게 업데이트 된 ‘공산당선언’인 것 같은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의 ‘제국’은 가장 암울하고 절박한 시기에 쓰여진 혁명에 대한 (좌절감 속에서도 낙관을 잃지 않은) 모색일 것이다.

 

네그리/하트는 기본적으로 21세기는 기존의 제국주의 시대와는 다른 시대이며 엄청난 기술발전과 재편성된 정치-사회-경제적 구성으로 인해서 더 이상의 특정한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제국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제국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무언가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도 그런 구체적인 제시에 대해서는 곤혹스러워하고 있고 그저 그동안과는 전혀 달라진 환경으로 인해서 어떻게 기존의 것들이 다른 방식으로 다뤄지고 논의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있을 뿐이다.

 

뚜렷하게 포착되지 않는 흐릿한 윤곽을 그들은 보고 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런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그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논의 과정이 매우 상세하면서도 논의에 대한 결론에 가서는 조금은 설득력이 부족해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조심스럽게 논의에 대한 결론과 대안 제시에 대한 조심스러운 검토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제안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면 핵심이 없는 수식어로 가득한 매뉴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적극적으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그리고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하고는 있지만 결론에 가서는 자신들조차 제국이라는 것에 대한 명쾌한 확신-제안을 보여주지-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상적이고 통찰력으로 가득하면서도 그것이 구체성을 갖고 있는 논의인지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고, 마치 예언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그들로서는 안타까울 수 있겠지만 그들이 자초한 것 같다.

 

기존과는 달라진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으로 가득하고 그 곤혹스러움을 현대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통해서 돌파하려고 하고 있는 네그리/하트의 논의는 결국 더 이상의 외부를 찾을 수 없는 혹은 어떠한 뚜렷한 대안을 찾을 수 없는 현재에 대한 급진적인 도약/돌파를 위한 과감한 시도로 가득한 것 같다.

 

근대부터 시작된 진보와 미래에 대한 믿음을 철저하게 비판했던 아도르노의 논의들과 어떠한 외부도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는 모두 권력의 틀 속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푸코의 논의로 대표되는 철학적 논의와 함께 소련-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중국-자본주의로의 전향으로 대표되는 좌절은 어떠한 제안-대안도 설득력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아가는 혁명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그 곤혹스러움과 좌절감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그리고 과감한 제안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논쟁적인 결과물인 것 같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 많이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네그리/하트의 논의로서만 다루기는 어렵기도 할 것이고, 20세기 후반에 적극적으로 다뤄지는 다양한 논의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좀 더 상세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

 

흥미로운 입장이고

놀라운 통찰력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인상적인

일종의 현재에 대한 포괄적-구체적인 검토와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논의에 대한 내용으로서는 구체성이 부족하고 예언적인 성향이 크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논의를 통해서 좀 더 다양한 논의들과 의견들이 제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의미 깊은 시도인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이를 통해서 얼마나 더 큰 용기를 갖고 전투에 임할 것이냐이다.

고민은 좌절이 아닌 도약과 돌파로 실천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그리/하트의 ‘제국’은 일종의 새로운 다짐처럼 읽혀지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디세이아 - 개정판
호메로스 지음, 유영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이디푸스와 함께 언제까지나 많은 이들의 영감을 자극할 그리스 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또다른 주인공인 오디세우스는 그가 겪은 온갖 고난과 모험으로 인해서 그리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영리함으로 인해서 수없이 반복되며 해석되고 있고, 다양한 의미로서 다뤄지고 있는 인물인데,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관해서는 점점 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와 해석이 더해지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오디세우스는 우리들 모두를 대변하는 존재일 것이고,

실제로도 그는 인류-남성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자주 다뤄지고 있는데,

한명의 남성이고,

아들이며,

남편이면서 연인인,

지배자이면서도 노동자인 오디세우스에 대한 평가를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근대-탈근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조차도 자주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에 대한 지속적인 검토가 이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집 떠나서 죽도록 고생하다 결국 꿈에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로 구성된 ‘오디세이아’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신화와 우화 그리고 당시 시대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으며, 한명의 주인공을 내세우는 소설적 구성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일리아드 / 일리아스’와 함께 호메로스의 대표작이면서도 두 작품의 차이는 꽤 거리감을 갖고 있는데, 어째서 이처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는 누구도 쉽게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이 그리스 신들은 사건에 직접적 / 간접적으로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있고, 그들이 만드는 고난과 함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도움 속에서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다양한 고난 / 경험을 하고 있고, 이를 견뎌내며 자신들을 그리고 가족-공동체와 아내를 지켜내고 있다.

현란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장황한 대사들과 함께 오디세우스가 겪는 다양한 모험은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졸음을 밀려오기에 충분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든 서구 문학의 원형으로서 그 매력을 뽐내고 있다.

이제는 정작 실제 작품에 대한 내용보다 하나의 해석으로서 그리고 은유로서 더욱 자주 다뤄지게 되어버렸지만 항상 그렇듯이 작품을 실제로 접함으로써 좀 더 적절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에 이어지는 해석에 대한 각자의 평가가 뒤따를 것이다.

참고 : 아마도 ‘오디세이아’에 대한 가장 철저한 해체와 냉소적인(혹은 암울한) 해석은 아도르노/호르크하이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다룬 해석일 것이다. 워낙 널리 알려진 해석이고, 난해하면서도 꽤나 흥미로운 해석이기 때문에 ‘오디세이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를 뒤흔든 열흘
존 리드 지음, 서찬석 옮김 / 책갈피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들 '러시아 혁명‘으로 얘기되는 러시아에서 벌어진 1917년 10월 사회주의 / 공산주의 혁명은 단순히 (기존 정권에서 새로운 정권으로) 정권이 교체되거나 지도자가 바뀌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 체제가 변하게 되는 것이었고, 전혀 다른 방식의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자신들의 이상-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꽤나 중요한 의미의 사건이(었)지만 알다시피 이후에 벌어진 체제를 둘러싼 경쟁과 그 경쟁에서의 실패 또는 패배로 인해서 러시아 혁명은 어렵사리 이뤄진 혁명의 성공이 쉽게 잊게 되었고 실패한 혁명으로 결론이 내려지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결론이 내려진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다시금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조롱의 대상으로만 비춰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냉소의 대상이 되어버린 혁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자 하는 나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찾게 된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1917년 10월 혁명이 이뤄지고 있던 당시의 러시아에 대한 가장 사실적인 현장 보고서이며 혁명이 벌어지는 그곳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저작일 것이다. 존 리드는 혁명의 중심에서 열정과 흥분을 최대한 자제하며 글을 써내려가고 있고, 그의 글을 통해서 쉽게 자제되지 않는 혁명의 열기를 느껴가며 혁명의 시작과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의 다양한 보고서와 자료들 그리고 연설문과 온갖 선언들을 통해서 그때 그 순간의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고,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정세와 함께 혁명이 진행하는 과정 그리고 혁명이 이후에 벌어지게 된 혁명 세력과 혁명에 반대하는 혹은 애매한 입장을 갖고 있는 세력 사이의 투쟁을 간략하고 속도감 있게 다루고 있으면서 간간히 그때 당시의 도시의 분위기와 일반인들의 반응까지 검토하며 현장에서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고 있는 것이 없기에 존 리드의 글에 아주 빠져들게 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전하려고 하고 있는 혁명에 대한 옹호와 그 과정 속에서의 열정은 충분히 전달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결국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은 몰락하게 되고 레닌과 트로츠키로 대표되는 볼셰비키 혁명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으로 내용은 마무리 되는데, 존 리드는 이처럼 혁명의 성공을 자축하고 보다 나은 세상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내용을 마무리 하고 있지만 앞으로 혁명이 어떻게 변질이 되어가는지 그리고 어떤 참혹한 과정이 벌어지는지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존 리드가 전하는 환희와 감격에 조금은 거리감을 갖게 되기도 했다.

 

이제는 일부 소수들만이 논의하고 있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이제야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현실감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지금이야 말로 러시아 혁명을 얘기하고 재검토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바보 같더라도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어갈 것 같다.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만 있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저 실패한 혁명으로서 다뤄지고 있고, 잊고 침묵하도록 암묵적인 강요를 받고 있는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조금은 재검토가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존 리드와 같은 무한한 긍정과 낙관으로서 검토할 것도 아니고, 옹호와 환희에 도취된 검토가 아닌 그 성공과 실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좀 더 나은 대안을 혹은 결과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금 실패가 이어질 뿐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대한 온갖 찬사와 명성에 대해서 더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한두번 읽어보았기 때문에 다시금 읽어야 할 필요성도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한번 더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무척이나 후회할) 생각이 들어서 읽어보게 되었고, 역시나 명성과 찬사와는 다르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운 부분이 별로 없는 독서였을 뿐이었다.

가끔 이런 책들이 손에 잡히기 마련이다.

누구나가 칭송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전혀 만족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만족스럽거나 재미를 느꼈던 적이 한번도 없었고, 또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신통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일리아스’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분석은 이미 많이 거론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반복해서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시의 트로이에 대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갈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때에는 여성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혹은 왜 그렇게 상세하게(혹은 지루하게) 집안 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인지를,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앞으로의 문학이 만들어낼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원형이 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끊임없이 전투에 개입하고 있는 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미 많이 논의가 되었고, 아마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별도로 책을 한권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수없이 논의되고 읽혀지고 있는 ‘일리아스’는 실제로 읽게 된다면 갈등과 전투의 반복 속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그리고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모습들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들을 찾아내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꽤나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하는 것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어째서 갈등을 겪게 되는지,

헬레네는 어째서 트로이로 향하게 되었는지,

결국 트로이는 함락되었는지,

오디세우스는 나중에 어떤 죽을 고생을 하는지,

항상 얘기되는 ‘목마’는 정작 ‘일리아스’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인지 등등등

‘일리아스’는 그리스 신화의 그리고 그리스 문학의 정수이면서도 드넓게 펼쳐진 그리스 신화와 문학의 한 지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리아스’의 진면목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꽤 깊이와 넓이가 있는 지식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리스 신화와 문학과 희극 및 비극들을 읽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좀 더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리아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야 할 것이고 깨달아가야 할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온갖 시건방과 함께 우정에 대한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임과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 향하는 과정으로서의) 분노와 헥토르의 (자살을 하듯이 선택하는) 용기에 대한 작품인 ‘일리아스’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 부족함이 많기 때문에 이처럼 그저 읽고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며 투덜거리게 될 뿐인 것 같다.

그렇게 투덜거리며 무지함을 그리고 부족함을 회피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름 2011-05-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도 세간의 베스트셀러 1Q84를 읽고나서 든 느낌이 상기되네요. 소문은 소문일 뿐 만족스럽진 않고...

배군 2011-05-28 22:51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이러한 요인들이 한데 섞이지 않았더라면 코뮌은 그러한 형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하지만 코뮌의 원재료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느린 리듬에 맞추어 이미 한데 모여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파리의 전경을 불가항력적인 방식으로 바꾸어놓은 경제와 사회 조직, 정치, 문화 영역에서 변형의 복합적인 양식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공간과 지리학에 맑스적 관점을 도입해서 색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데이비드 하비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가 그다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만 갖고 있었을 뿐 그의 저작을 제대로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루이 나폴레옹 시기에서부터 파리 코뮌 시기까지의 파리의 공간적 변화와 함께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서 자본주의 근대화와 도시화 그리고 그 도시 안에서의 계급구조 및 기타 다양한 변화와 갈등을 매우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해내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데이비드 하비의 시각은 맑스와 노동계급 혹은 빈곤층과 피지배계급에 애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분석은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검토한 뒤의 의견이기 때문에 편향된 의견이기 보다는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고 의미 있는 의견이라고 볼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는 ‘철저한 단절’로 요약되는 ‘근대성’이라는 신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내며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 과정과 함께 아직까지 근대 자본주의에 적합한 공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던 파리가 (오스망이 총괄하여 지휘하는) 새로운 도시계획에 따라 어떤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는지를 논의하면서 파리에 대한 그리고 근대화에 따른 도시의 변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모색하고 있던 루이 나폴레옹과 오스망의 도시정비가 이후에 파리 코뮌이 발생되는데 일정부분 원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공간의 변형이 단순한 공간의 변형만이 아닌 사회관계와 정신구조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루이 나폴레옹 / 오스망이 지배했던 시기가 보다 더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가 시작되고 ‘근대적 공간이 생성(물론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확연한 구분도 이뤄진)’되는 시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데이비드 하비는 루이 나폴레옹 시기의 오스망의 주도하에 이뤄진 파리의 도시계획/ 도시정비야 말로 이전 사회와 일종의 커다란 / 진정한 변화가 모색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변화를 위해서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그리고 그 이해관계에 반발하는 다양한 계급들과 그들의 입장에 따른 갈등과 반발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으며, 그 갈등 양상에 따라 그리고 거부감으로 인해서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가 되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파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생각들을 간접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고, 변화되기 전과 변화되는 과정에서의 파리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계급 / 사회적) 관계와 도시와 농촌이라는 구분으로 인한 갈등,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과 자본의 운영 방식에 따른 이해관계의 차이에 대해서까지 매우 다양한 관점들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다양한 관점과 그 차이들로 인해서 파리의 변화에 대한 여러 입장의 차이 그리고 그로 인한 정부(정확하게 말한다면 루이 나폴레옹과 오스망)에 대한 뚜렷한 견해 차이, 노동자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활 속에서의 여성들의 위치까지 상세하고 정교하게 격렬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던 당시의 파리를 그리고 근대 도시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교한 분석을 통해서 각 계급들의 이해관계와 생산과 소비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순환과 함께 공간적 그리고 정신적인 구분이 확연해지는 계급들 사이의 대립을 논의하며 그들이 기존의 공간, 공동체 / 계급에서 새로운 공간과 공동체 / 계급으로 변화됨과 함께 그 과정에서 어떤 문제점들이 발생되고 그 문제점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도시화에서 얼마나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마지막 종결부분에서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사크르퀘르 사원)라는 하나의 건축물이 어떻게 그 이면에 계급적 / 정치적 갈등을 그리고 수많은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숨기고 있는지를 (냉소적으로 조롱하듯이) 논의하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인 도시가 어떤 갈등을 그리고 대립을 숨기고 있고 그것들을 확연하게 밝혀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읽는 사람들에 따라서 맑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에 대한 상세한 덧붙임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고, 발터 벤야민의 시각을 많이 엿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상세한 자료들 그리고 데비이드 하비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들은 파리라는 도시의 이면에 있는 수많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계급투쟁을 확연하게 드러내놓고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파리에서만 이뤄진 갈등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도시 어느 곳에서나 그 이면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만, 루이 나폴레옹과 오스망의 파리는 그 갈등과 투쟁이 보다 격렬하고 극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검토 대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데이비드 하비의 논의는 파리에 대한 그리고 근대화와 자본주의 도시화에 대한 상세한 논의일 것이고, 그의 논의는 한국의 도시화와 근대화에 대한 논의로 당연히 이어져야 할 논의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그런 과정을 겪었다면,

우리는 어떤 과정을 겪었던 것일까?

도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 대답을 찾아내고 발견해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고,

어떻게 우리 자신이 구성되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해야만이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 발터 벤야민의 저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어느 정도 데이비드 하비가 벤야민의 입장을 받아들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플로베르와 발자크의 작품들을 읽어보려고 다짐만 했던 것이 매우 후회스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