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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 두리신서 12
F.엥겔스 / 두리미디어 / 1988년 9월
평점 :
절판
엥겔스는 노동자들은 고통 받는 계급 이상의 존재임을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 레닌 -
맑스(마르크스)와 항상 함께 논의가 되는 엥겔스는 그렇게 당연한 듯이 함께 논의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엥겔스 본인만의 독자적인 논의가 특별히 이뤄지지 않(았)거나 혹은 논의가 된다고 해도 긍정적인 평가를 위해서가 아닌 부정적인 평가를 위해서(그가 어떻게 맑스를 오해하도록 만들었는지 혹은 맑스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논의를 했었는지, 맑스의 메모들을 얼마나 미흡하게 정리했는지 등)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점점 더 그에 대한 논의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맑스와의 우정과 동료애,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 등)만이 다뤄질 뿐일 것 같고, 학문적인 혹은 이론적인 논의는 맑스와 분리되어 별다른 논의가 나올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의 맑스에 대한 그리고 레닌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다시금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도 엥겔스에 대한 논의는 거의 혹은 전혀 이뤄지지 않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당시로서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엥겔스의 논의들은 혹은 그의 분석들은 관심이 덜해지고 있기만 한데, 그런 그의 저작들 중 유일하게 여전히 관심을 갖게 되는 저작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인 것 같고, 그의 초기작인 ‘... 상태’는 19세기 노동자들에 대한 일종의 상세한 실태 보고서이기면서 자본주의 초기에 얼마나 가혹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는지에 대한 가장 현실감 넘치는 풍경화일 것 같다.
노동자 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글로써 담아내는 무수한 시도들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이고,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의도적으로 가혹한 삶을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만들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깨닫게 만들고 있다.
엥겔스의 ‘... 상태’ 이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혹은 노동 환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살펴보고 있는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일하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잇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그들의 시각으로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는 19세기의 노동자의 삶의 모습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어떻게 그들의 그런 삶으로 내몰려졌는지에 대한 일종의 원인 분석을 하고 있고,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증기기관 / 방적기계의 발명이라는, 기술 발달로 인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 혁명이 가장 큰 원인으로서 파악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연관관계로서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이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이뤄진 오직 이익과 이윤을 만을 위한 과잉된 노동 그리고 잔인하기만 한 노동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그들의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노동자 계급이 (되어) 잔인한 세상 속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 가혹한 환경에서 삶을 꾸려가게 되었다고 엥겔스는 분석하고 있다.
엥겔스의 표현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인간으로서 대접받기 보다는 그저 ‘땀 흘리는 기계’였을 뿐이었다.
엥겔스는 19세기의 노동자 계급의 삶에 대해서 파악하기 위해서 우선은 산업 분야에서의 노동자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고, 분업과 기계화가 그들이 인간이 아닌 기계가 되도록 만들게 되었다는 점과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되어 생겨난 도시화의 여러 문제(주거, 불결한 환경 등등)들을 언급하며 얼마나 비참한 환경 속에서 삶을 꾸려나갔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대도시에 노동자들이 모이게 되면서 생겨난 슬럼가에 대한 상세한 실태를 파악하면서 얼마나 그들의 비참함 환경 속에서 놓여 있는지를 자세하게 논의하고 있고, 그 비참함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한 과도한 음주 문화와 무절제한 성생활과 그리고 밀집화로 인한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엥겔스는 단순히 노동자들의 주거와 생활상 그리고 비참한 삶의 모습들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그런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는데, 그들의 그런 생활을 해나가도록 만들고 있는 ‘경쟁’을 유도하도록 하는 사회구조와 그 ‘경쟁’이 어떻게 비참함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이후 각 업종별 노동환경과 실태에 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 있고, 그런 비참함과 가혹함으로 인해서 점점 더 쌓여져만 가는 불만과 분노가 어떤 방식으로 노동운동으로 표출되는지와 이익에만 몰두하는 부르주아들의 모습들을 비교하며 부르주아들이 전혀 이런 상황을 개선하거나 완화할 의지나 생각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곧 일어나리라 생각되는 혁명에 대해서 우연이 아닌 논리적인 귀결로서 이해시키려고 하고 있다.
아쉽게도 이런 엥겔스의 혁명에 대한 낙관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결론과는 다르게 혁명이 일어나기 보다는 조금씩 개선되고 변형되는 모습으로만 자본주의 사회는 변화를 보이고 있었고, 여전히 그런 변화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혁명에 대한 낙관을 빼놓고 본다면 19세기의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들을 이처럼 상세하게 담아내고 있는 엥겔스의 논의는 당시로서나 지금으로서나 무척 놀라운 시도였고, 여전히 찾아보도록 만들고 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시대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고, 지금은 분명 그 당시보다는 많이 나아진 환경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때와 변함없는 환경 속에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엥겔스가 바라본 노동자 계급의 삶의 모습은 하나의 과거의 모습이면서도 여전히 현재의 모습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겉모습만 조금 달라졌을 뿐,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변한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엥겔스의 저작은
그리고 수많은 고전들은 바로 그런 오해들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