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통화를 하지 않는 사이. 그런 관계가 전화를 오면 태세는 하나다. 받는 거다. 받기 꺼림칙한 상태에서 받는 상황도 있고, 의문을 가지고 전화를 받는 상황도 있지만, 보통 우리는 여러 가지 마음을 가지면서도 걸려온 전화에 응하게 된다.

이번 전화는 같은 동에 사는, 대학교에서 같은 박사 랩실이지만 함께 수업을 듣지는 않았던 애매한 관계의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만나면 어색하게 웃는 사이. 그런 사람이 만나면 신경과에서 일하고 싶으니, 신경과 심리실에서 자리가 나면 연락을 달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그 뒤 신경과 심리실에서 자리가 나서 연락을 했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러고 약 1년여가 지나서 연락이 왔다. 이사를 간다는 것이다. 집에 위인전이 있냐고 물으며, 집에서 처치곤란의 비싼 아이 관련 물품들이 많아서 정리해서 주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원하는 날을 물어보고 그날 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물론 쓰잘데기 없이 1시간 이상 길게 수다를 떨며 친근감을 표하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것은 당연지사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수다의 봇물이 터지는 것에 깊은 반성을 하지만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잘 참았다가 목요일쯤되면 나도 몰라 상태가 되면서 관계의 깊이를 생각하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한 날이 됐다. 선물을 사서 찾아갈 생각으로 연락을 했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라고 하더니 끊어버리는 것이다.

다음 날 문자가 와 있었는데

아이 숙제를 봐주는 중으로 화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전화가 왔더란다. 아이에게 자신이 화가 많이 나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며 미안하다는 것이다.

불과 몇 달의 나였다면 화가 많이 나도 겉으로는 괜찮다며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을 것이다. 이번에도 습관적으로 쓰다가 지우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 다 읽고 나서 주고 싶으실 때 연락주세요.”라고 답을 했다. 그러나 나의 답장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화도 상대를 보고 낸다. 내가 화를 낼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 담당 교수였다면 그렇게 화를 내며 전화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화를 조절하지 못해서 화를 낸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아이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화를 낸 것이다.

약속 시간이 됐는데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상대방. 그 사람은 그저 자신의 집이 비싼 가격에, 그것도 집을 보지도 않고 제 때에 팔렸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던 것 뿐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꽤재재한 상태로 산어흥(가제)라는 음식점에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오전에 땀을 내며 아이들과 놀고 씻지 못한 상태로 음식점에 갔다. 남편이 고른 그 집은 이전에 남편과 둘이 한번 갔었고,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딸아이가 스파게티를 좋아한다. 갔더니 사람이 많아서 대기를 해야 했다. 9 테이블 정도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옆 가게의 강아지를 창문 밖으로 보고 있었다. 딸아이는 배고프고 피곤한지 강아지를 사달라며 떼를 썼고, 나는 안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다가와서 나를 거들었다. 그러나 한 명은 대기 상태를 확인했어야 했다. 내가 물어볼 때만 남편이 확인했다. 내가 세 번 째 쯤 물어보니 대기가 지나갔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가게 점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가게를 여니, 점원이 나왔다. 막 우리 가족의 순서가 지나간 것이다. 그래서 못 들었다고 하니, 강경한 태도, 그리고 나를 훑어보는 눈빛과 함께,

가게 앞 대기판 맨 뒤에 다시 이름을 적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여태까지 기다렸는데, 다시 맨 뒤로 가서 기다리라니.....라는 생각에 당황스러운 눈빛이 되니.

여태까지 기다리는 사람들 안보이냐며 나를 무슨 무임승차하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내가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하자, 자신이 큰 소리로 여러 번 불렀는데 못 들은 것은 나의 잘못이니 맨 뒤에 다시 적고 처음부터 기다리라는 것이다.

화도 상대를 보고 낸다.

거기에 대해 남편은 기다리자, 어디 가서 먹냐 라는 말을 한다. 그래서 다른 곳에 가서 돈까스를 먹자고, 다시 언제 기다리냐는 말로 자리를 떴다.

 

아침부터 계속 잠을 자다가 자신만 번지르르하게 씻고 나온 남편은, 꼬질꼬질하고 어디서 구한 옷을 맞춰 입고 온 사람을 보면서 종업원이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 씻고 깨끗하게 다니라는 말을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밀면, 돈까스, 볶음 우동을 시켜서 먹었다. 아이들은 시장이 반찬이라고 너무나도 맛있게 밀면을 뚝딱했다.

집에 돌아와 베란다 작은 풀장에 물을 받고 아이들을 씻기며 나도 머리를 감았다. 밖에 베란다에서 벌거벗은 거 다 보인다는 남편의 말에

당신이 그럼 좀 도와주던가라는 말을 했다. 그런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그래도 오늘은 화는 안내는 날인 그런 날일 뿐이다.

아무 말을 안 해서 남편이 몰라주는 것이라서 말을 해야 안다는 것은 실제 부부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말을 하면 잔소리이고, 말을 안 하면 몰라서 그런다는 것은 남편의 그러고 싶은 마음이다. 그냥 모른 채 자신만 편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일 뿐이다.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말이 무색한 부부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화를 낸 적이 없다. 마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도중 미친 손님을 만나도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대응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조금씩 태도의 변화를 해 나가려고 한다. 상대방의 무례한 태도에 나도 기분이 나쁨을.

... 이번 산어흥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시는 가지 않는 방법밖에는. 그것을 염두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기분이 좋지 않지만. 아이 둘을 데리고 스파게티집 가면 안되나. 거기 물을 내가 흐린 것인가. 생각할수록 감정적으로 가는 날이었다. 글도 감정을 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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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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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를 읽었다.

2012년 대학원 선배들과의 트러블, 새 직장에서 계약직의 삶으로 살던 시기.

2012년에 나는 거기에 있었다.

 

시작이 매우 흥미롭다. 첫 한페이지가 몰입하게 한다. 마치 다음은 없다는 듯이 매력적이게 다가온다. 전형적인 정신증 case로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 시절 작가들이 유행하던 애매하고 모호하면서 그런 것들을 나열해야 그 시절의 작가라는 느낌을 받게 하는 글들이 이어진다. 글에도 유행이 있나보다. 요즘의 글들은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솔직해졌다면. 2010년 초반의 글들까지는 작가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이 전개되어야 소설로 생각하는 것 같다. 2000년대 초 읽었던 박민규의 소설이 대표적이었다.

 

내가 김영하라는 작가를 아... 정말 글 잘쓰는구나 라고 느낀건 여행의 이유라는 책에서 였다. 그 글을 읽고, 김영하라는 사람, 알쓸신잡에서 본 사람.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옥수수와 나로 만나게 되었다.

 

문체는 약간 유치하고 가벼우면서도 읽는 사람을 약간 부끄럽게도 하는 정도의 글. 자신의 이야기인 듯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소재. 그 경계의 어딘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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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주제로 한 연구를 2년여 동안 안고 있다가 세상에 내놓게 되었는데, 첫 시작은 간단, 명료, 미약했습니다. 정의가 분분한 이 용서라는 것에 대해서 한국적인 시각에서 정의를 내려보겠다라는 것이었죠. 그런 나의 첫 시작이 일반인들의 개념 형성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는 원형적 접근을 통하여 용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정신적인 치료과정에서 용서의 개념을 적용할 때 발전적 함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향후 스트레스 대처전략, 진단이나 제언, 치료 등의 영역에서 활용할 때 좋은 참고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라는 아주 큰 그림이 되어갔습니다. 다행히 게재된 시점에서 바라본 제 논문은 비교적 잘 마무리됐다는 생각이 드니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연구를 하면서 연구자인 제가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으니 인생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누군가가 내 앞길을 막으려 할 때, 평소엔 연락이 되다가 논문 이야기만 나오면 감감무소식이고, 주변에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것이 다시 나에게 되돌아올 때, 그 시간은 상상하기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힘든 시간에도 인간은 참으로 놀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데, 실력이 되지 않아 논의할 수 없는 자신을 숨기고 싶어하는 면이,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그렇게 작용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제 나를 옭아매는 사슬이 아니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입니다. 하루 사이에 나는 변화한 것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영원히 정의될 수 없으면서도 우리와 함께 흘러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용서는 나를 괴롭혔던 대상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동안의 끈적하고 쉽게 내려놓지 못했던 인간관계와는 사뭇 다릅니다. 저도 저 자신에 대해 놀랐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동시에 좋은 성과물을 혼자서 해 낼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했습니다. 저는 성장했습니다. 용서는 그 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하고 난 이후의 상황, 내면의 변화가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의미를 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훌륭하게 대인관계 속에서 경험한 상처를 용서를 통하여 극복하였고, 갈등의 악순환을 발생시키는 고리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내게 소중하지 않을 뿐 미움, 분노, 증오와 같은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논문이 게재되도록 막았던 그 사람의 부정적인 2년 동안 내 논문이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년 전에 썼다고 하여 그 논문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준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2년 동안 값진 것을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용서의 내면화였습니다. 연구를 하면서 이보다 값진 일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수많은 용서의 효과를 검증하는 논문들 사이에서 굳이 제가 용서의 정의적인 측면을 바라보고자 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성장도 그 미약하고 간단하지만 명료했던 시작과 함께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들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겠지요. 그 일을 통해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다면, 당신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라면 멋지게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고생했어. 넌 모든 순간 멋졌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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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5, 나는 전화하지 않았다. 수련 스승, 대학교 스승, 현재 연락을 하지 않으면 나의 일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에게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당연히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하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스승의 날이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에서 김연수 작가의 인터뷰를 봤다. 인터뷰 글을 쭉 읽어보다가 내 마음에 무언가를 던져준 부분은 김연수 작가에게 청춘이란 이었다.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는 시절이어서요. 제가 생각해보니까 그 스무 살 때는 뭐 죽는다는 거에 대한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그다음에 이 세계가 바뀔거라는 것에 대해서도 조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단 한 순간도.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는 그 세계는 영원히 계속 지속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생으로 살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부모님들이나 어른들이 봤을 때는 되게 철이 없는 태도인데요. 그래서 그리운 거죠. 그 철 없었던 시절에 대해서. 왜냐하면, 시간이 뭐 계속 남아 무한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니까 웬만한 일들은 다 내일 하면 돼요. 그래서 당장 해야될 일들은 뭐 그렇게 많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책을 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책을 읽었고요.

그다음에 책을 읽고 나서도 하루가 길어서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글을 썼어요. 다른 뭐 토플을 공부한다든가 아니면 뭐 자격증을 하나 딴다든가. 이런 걸 하면 좋았겠는데 시간이 워낙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건 나중에 해도 됐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하고 싶은 걸 그냥 계속 했단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 시간이 많지는 않다는 생각이, 많이 남지는 않았단 생각을 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러면서부터 내일로 미룰 수 있는 일들이 이제 점점 없어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전 같았으면 젊었을 때 같았으면 안 했을 일들을 지금은 막 그걸 먼저 해야되고. 젊었을 때 시간 많을 때 할 만한 일들은 점점 뒤로 미루게 되고 있어요. 그게 청춘이 끝난 자들의 삶이죠. 힘든 삶이죠. 할 일들이 이렇게 할 일 목록이 쭉 쌓여 있는 그런 삶이죠. 그래서 젊었을 때가 그립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근데 뭐 돌아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게도 미루면 돼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일단 미루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면 그게 청춘과 유사한 상태가 되는 거죠. 그런데 뭐 그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고, 내가 스승의 날 미루었던 연락은 어찌 보면 나의 청춘으로의 회귀는 아니었을까? 해야 할 일들 말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고 싶은 내 내면의 반항은 아니었을까?

 

오늘 하루가 지난 생일 축하를 알리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생일축하한다. 고맙다는 산뜻한 문장들로 시작을 했다. 그러다가 행복하구~라는 말에 행복하시라는 답을 했다. 그러다가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어제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실습생의 생일축하 문자에 다시 올라온 박사 논문에 대한 고민이 쓰여졌다. 그러자 하고플 때, 절실할 때 하면 되잖아요.”라는 말과 잘하고 있다’. ‘내가 너를 안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박사 논문을 쓰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것 같은 이런 씁쓸한. 내 실력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은 생각. 이로 인해 드는 괴로움. 이러한 늪은 내가 만든 것인데도 나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김연수 작가와 지인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하고 싶은 걸 하라는, 하고 싶을 때 하라는 말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고 싶어서 즐기면서 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면은 나를 스승의 날 연락도 하지 않는 괘씸한 녀석으로 표면화하고 있지만, 사실 내면에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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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는 글.

 

그곳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력서 같은 무미건조한 유서를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쓰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맞이하며 쓰는 글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어도 되지 않나 싶다.

 

 

당신에게. 내가 울 때, 내가 힘이 들 때 항상 당신은 내 곁에 없었다. 힘이 든다고 말을 해야 상대방이 안다는 것을 알지만, 부부이기에, 남편이기에, 사랑이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주기를 기대했었다. 반면, 당신의 마음이 고플 때, 당신의 일을 대신해 줘야 할 이가 필요할 때 그런 때에 나는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다. 우리가 함께 웃고, 함께 울 때는 당신의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애초에 왜 당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는 그저 당신이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래서 내가 힘이 들 때 당신이 내 곁에 없어도, 당신이 힘이 들 때는 항상 내가 당신인 것처럼 있었던 것은, 당신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나에겐 그게 사랑이었던 것 같다.

 

 

딸아. 엄마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너를 처음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구나. 아마도 그게 신이 있다면 신이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너는 그렇게, 끔찍이도 사랑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나는 너로 인해 덜 이기적이어지고, 더 많은 사랑을 채우게 되었으며, 나의 영혼이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너는 세상이라는 것과 만나서 때론 가혹하고, 때론 원망스럽기도 하겠다만, 나는 잠자는 너의 모습을 보며, 슬쩍 발을 한번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이 어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가장 슬픈 것은 오직 나만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나 자신만을 위하여 너를 낳고, 키우고 함께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미안함에서이다. 딸아. 엄마는 부끄럽게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머니. 내가 세상이라는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와의 기억은 내내 암흑이었습니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이 암흑이 옅어지고, 옅어질지 모를 울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한참이 지나서도 저는 그 암흑을 걷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세상에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저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누군가는 조금 가볍게 사랑을 받은 것 뿐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세상에 거저 크는 사람이 어디있냐.”라는 말을 여러 차레 하셨죠.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뭔가를 바라는 그 말투에 저는 진저리를 쳤었죠. 그런데 그 말에 답이 있더군요.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으면 언제나 혼자였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울고 보채는 나를 안고 어머니는 얼마나 우셨을까요. 그렇게 사는 삶이 폭하고 서러운 날에는 또 얼마나 더 우셨을까요. 지금도 어머니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제게 주었던 사랑을 느끼고 갑니다.

 

 

나에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젊은 시절에는 나에게 종종 유서를 쓰곤 했었다. 그러면서 나의 먼 과거나, 나의 현재, 나의 미래에 대해 돌아보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저 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급급한 좀비가 되어 버렸다. 나의 젊음은 항상 우울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두려워했다. 하여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나의 과거를 묻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나의 과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미래에 변화를 주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한 것 같다. 나는 나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기저에 깔려있는 우울함을 원인으로 돌리지 말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괜찮은 나와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행복할 필요가 있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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