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는 글.

 

그곳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력서 같은 무미건조한 유서를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쓰고 싶지는 않다. 죽음을 맞이하며 쓰는 글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어도 되지 않나 싶다.

 

 

당신에게. 내가 울 때, 내가 힘이 들 때 항상 당신은 내 곁에 없었다. 힘이 든다고 말을 해야 상대방이 안다는 것을 알지만, 부부이기에, 남편이기에, 사랑이기에 어느 정도는 알아주기를 기대했었다. 반면, 당신의 마음이 고플 때, 당신의 일을 대신해 줘야 할 이가 필요할 때 그런 때에 나는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다. 우리가 함께 웃고, 함께 울 때는 당신의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애초에 왜 당신을 사랑했던 것일까.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는 그저 당신이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그래서 내가 힘이 들 때 당신이 내 곁에 없어도, 당신이 힘이 들 때는 항상 내가 당신인 것처럼 있었던 것은, 당신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다. 나에겐 그게 사랑이었던 것 같다.

 

 

딸아. 엄마는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너를 처음 가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구나. 아마도 그게 신이 있다면 신이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너는 그렇게, 끔찍이도 사랑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나는 너로 인해 덜 이기적이어지고, 더 많은 사랑을 채우게 되었으며, 나의 영혼이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너는 세상이라는 것과 만나서 때론 가혹하고, 때론 원망스럽기도 하겠다만, 나는 잠자는 너의 모습을 보며, 슬쩍 발을 한번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이 어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가장 슬픈 것은 오직 나만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나 자신만을 위하여 너를 낳고, 키우고 함께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미안함에서이다. 딸아. 엄마는 부끄럽게도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어머니. 내가 세상이라는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와의 기억은 내내 암흑이었습니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이 암흑이 옅어지고, 옅어질지 모를 울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한참이 지나서도 저는 그 암흑을 걷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세상에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저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누군가는 조금 가볍게 사랑을 받은 것 뿐이라는 깨달음 같은 것이 왔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세상에 거저 크는 사람이 어디있냐.”라는 말을 여러 차레 하셨죠.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뭔가를 바라는 그 말투에 저는 진저리를 쳤었죠. 그런데 그 말에 답이 있더군요.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으면 언제나 혼자였던 것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울고 보채는 나를 안고 어머니는 얼마나 우셨을까요. 그렇게 사는 삶이 폭하고 서러운 날에는 또 얼마나 더 우셨을까요. 지금도 어머니를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제게 주었던 사랑을 느끼고 갑니다.

 

 

나에게. 참으로 오랜만이다. 젊은 시절에는 나에게 종종 유서를 쓰곤 했었다. 그러면서 나의 먼 과거나, 나의 현재, 나의 미래에 대해 돌아보곤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저 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급급한 좀비가 되어 버렸다. 나의 젊음은 항상 우울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두려워했다. 하여 되도록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나의 과거를 묻어두었다. 그런데 지금 되돌아보면, 나의 과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미래에 변화를 주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한 것 같다. 나는 나의 삶을 조금 더 사랑할 필요가 있었다. 나의 기저에 깔려있는 우울함을 원인으로 돌리지 말고,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괜찮은 나와 가족과 친구가 있었다. 그렇게 행복할 필요가 있었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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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네 집은 메론 농사를 짓는다.

어젯저녁 친구가 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엄마 목소리가 풀이 죽어 있더란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올해 메론 농사가 잘 안됐어......”라고 하더란다.

그러곤,

“메론이 살기가 싫었나봐. 다 죽어버렸어.”라고 하더란다.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왔던 엄마에게 올해와 같은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고, 자연이 하는 일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고 하더란다.

오늘 오전, 담담하게 말하는 친구 녀석의 말에 나는 화가 났다. 여름 내내 땡볕에서 일하고, 고생하고, 무엇보다 온갖 정성과 마음을 주었을 녀석의 부모를 생각하니, 화가 났다. 마음이 애잔하고 슬픈 것은 둘째치고, 조금이라도 산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팔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드니, 화가 나고 말았다.

“어머니. 오늘은 힘내지 말고, 마음껏 슬퍼하고, 내일은 훌훌 털어버리세요.”

그리고 그 탓할 수 없는 자연이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기보다는 인간의 정성을 아울러주길, 보듬어주길, 인간이 하는 일에 노여워하기보다는 어리석은 것들의 마음을 감싸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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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거 소장해서 다시 봐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떤 면이? 생각하게 하잖아. 머리 아프지 않게.

좋았어? 나오는 사람들의 조합도 좋았어.

 

지식이야, 컴퓨터에 치면 왠만한거는 다 나오는 세상이잖아. 그런거 말고, 그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분별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생각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자제 좀 하려고 했는데, 잘 되지를 않네요).

 

마음 한 켠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어.

 

그 덕에 내가 간만에, 실로 오랜만에 알라딘에 글을 남기도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오랜만이야. 반가웠어. 나의 공간. 나의 머릿 속 한켠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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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이 넘어서 인턴? 기간제? 식으로 근무를 하게 된 성선생.

그녀는 대학원에서 알게 됐는데, 인상도 좋고, 착한 속성에 드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인가 수업시간에 늦게 오고, 와서는 허둥지둥.

그러다가 수업시간 후 남편이 기다리고 있어서, 급하게 가야하는 나를 붙잡고 심리검사 강의에 대해 물어보았다. 내가 많이 바쁘니, 따로 연락을 달라는 말을 했는데도, 기거이 내 시간을 10분이 넘게 잡수셨다. 그러고 나서, 나는 연락이 오겠거니 했는데, 연락도 없다.

그리고 다음 수업시간에 만났다. 이때도 나는 수업이 끝나고 약속이 있는 상황이었는데, 또 지난번과 같은 상황을 만든다. 정중히 거절을 하고 나는 자리를 떴다. 그러고 한참이 지난 후에 문자가 왔다. 시간 괜찮을 때 연락을 달라는 말이다.

전화를 했더니, 자신이 속한 곳의 직원 3명에게 심리검사 강의를 해 달라는 말을 요지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중요 요점을 빼놓고 정신없이 해대는 이야기에, 중심을 잡아주었다.

무료로 나눔 봉사?형식의 강의를 해달라는 말인가? 내가 산달로 출산을 일주일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다른 선생님을 소개시켜준다고 했더니, 감사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물론 강의료를 얼마를 줄 것인지에 대해서 말을 해달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아는 선생에게 부탁까지 해두었다. 그런데 그 뒤로 아무런 연락이 없다.

그리고 계속 찝찝하게, 연락을 해둔 선생에게도, 성선생에게도 마음 찌끄러기가 남아 있다.

왜 그러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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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나와 조금 달라진 점은 둘째를 임신하고 나서부터를 경계로 본다면, 견물생심에 있다.

그 전에는 보고도 다시 마음을 접고, 보고도 그것이 과연 나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었다면,

이후의 나는 물건을 보고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면 계속 마음에 남아서 결국은 사게 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호르몬의 작용때문인가? 하고 여기다가, 둘째를 낳고 한달 무렵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나는 그 행위?를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 물건이라는 것은 특정한 것이기 보다는(주로 그 범위가 옷, 신발에 있기는 하지만) 보이는 것에 있다. 말그대로 '견물'인 것이다.

좋게 생각하면 돈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더 관대해 진 것에도 있다. 느슨해진 것이라고 해야 좀 더 맞을까?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돈이 아까워서 사지 못했던 과거에, 지금은 뭔가의 끈이 많이 느슨해진 것 같다. 문득, 순간 아하!에서 돈에 연연하면서 이렇게까지 살아야하는 것인가? 그렇게 살지 않아도 비슷한 것 같다. 더이상 자린고비, 10원 한푼을 아껴서 살아 집을 마련하고 빌딩을 사는 그런 사람들의 뉴스를 들으면서 아둥바둥 살고 싶지않은 내 이면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데, 내 머릿속이 어지러워서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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