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보편의 내용으로서의 '모성' 정치와 엄마 구청장

   

3초의 시간

여기 한 후보가 있다. 그가 길가는 사람에게 얻어낼 수 시간을 3초라고 해보자. 이 3초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길어봤자 두 문장을 말할 수 있다. 인지도를 높이는 건 선거 후보들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므로, 첫 번째 문장에서는 우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야 한다. (“기호 〇번 아무개입니다.”) 자, 그럼 두 번째 문장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인지도·호감도가 합쳐져 지지율을 높인다고 했을 때 승패는 이 두 번째 문장에 달려 있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의 흥미를 끌고 호감을 얻기 위해서 보통 상대방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한다. 많은 후보들은 이 두 번째 문장에 가족관계를 지시하는 단어를 넣거나 정당 이름을 강조하며 자신의 소속을 소개한다. (“〇〇의 아들”, “☐☐가 낳은 장한 딸”, “대통령과 함께 경제 기적을”, “~처럼 일하겠습니다.”) 

 

 

2008년 종로구 국회의원 박진의 선거현수막 
 


종로에서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최현숙의 경우, 유권자를 직접 만나는 이 3초의 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두 문장이 늘 문제였다. 이전에 살던 지역에서 십 수 년간 활동하여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쌓았지만 이혼과 커밍아웃은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한 최현숙은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가족과 지역 사회로부터 ‘추방’당하다시피 했다. (최현숙은 그 때의 일을 두고 “뿌리 뽑혔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현숙의 출마는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정상’가족 중심주의에 기반을 두지 않은 지역 정치가 과연 가능한가를 묻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기반이 허약한 한국 사회에서 최현숙이 ‘정상’가족과 정상가족 중심의 지역 공동체를 경유하지 않고 선거 과정에서 조금 더 오래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 독신이라 해도 이성애자라면 언젠가는 가족에 편입되어 누군가의 사위이자 며느리가 될 수 있다고 상상이 되지만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가족 중심주의는 재현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현행 선거법에서 후보를 제외하고는 오직 가족만이 명함을 대신 돌릴 수 있는 것도 선거 제도의 가족 중심주의 중 하나이다. 
 

보통 ‘엄마’들의 대표

이렇듯 지역 사회에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일이 곧 지역 사회의 ‘보통’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의 빠른(어쩌면 유일한) 길일 때, ‘보통’ 여자들의 대표가 되기 위한 보편주의적 운동 방향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짐작대로, 바로 ‘엄마’였다. 한국의 여성 국회의원은 1996년 3%, 2000년 5.9%에서 2004년 17대 국회부터 13%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7대 국회에는 총 299명의 의원 중 39명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었다(비례:30명, 지역:9명). 2008년 18대 국회의 여성 국회의원 수는 41명(비례:28명, 지역:13명)으로 전대에 비해 단 2명 증가하는데 그쳤지만,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여성들이 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2008년 당시 지역구 선거에 도전한 여성 후보는 2004년 66명에서 132명으로 2배 이상 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직 지역구에서 여성 정치인이 넘어야할 벽은 높다고 볼 수 있다. 정당 지지율을 바탕으로 하는 비례 대표는 성별, 지역, 장애 여부 등의 차이에 따라 비례 후보의 순위를 결정한다. 최대한 다양성을 확보하여 대표성의 외연을 넓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내 비례 명부를 통해 선출된 비례 후보는 정당 내 기여도와 인지도를 바탕으로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대변하고 있는 집단을 대표할 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직접 유권자의 표심을 통해 결정되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및 의원은 당내 정치적 역학을 견제할 수 있는 소위 대중의 힘을 대표한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지역 사람들에게 표를 얻는 선거에서는 ‘보통’ 사람으로서의 대표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구 선출직 의원에 도전하는 여성 정치인들은 차이에 기반을 둔 비례 후보의 대표성과는 달리, 여성으로서 얼마나 ‘보통’이라는 범주의 실천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가족의 새로운 대표로서의 엄마, 즉 ‘모성 정치’로 갈음된 이유였다.  

여기에서 ‘모성’(mothering)은 페미니즘에서 매우 논쟁적인 화두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에서는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성 역할을 생물학적인 운명으로 고착시키며 여성을 하나의 성 계급으로 만든다고 보고 ‘어머니 노릇’으로부터의 해방을 페미니즘의 주요 과제로 삼는다. 한편 문화적 페미니즘에서는 대안적 가치로서 모성의 의미를 강조한다. ‘모성’ 경험이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정치적으로 다시 해석될 필요가 있으며, ‘모성적 가치’가 사회 전체의 핵심 작동 원리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모성적 가치를 바탕으로 할 때 경쟁적이고 자율적인 남성 중심적인 자아관념이 해체되고 상보적이고 관계적인 자아관념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성’은 여성 특유의 경험이지만 인간 모두와 관계되었다는 점에서 여성 중심적인 새로운 보편의 가능성으로 제기될 수 있었다. ‘모성’은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강조하고, ‘보통’ 여성으로서의 모습을 강조하며, ‘모성적 가치’라는 차원의 대안적 여성 정치 내용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여성적 보편을 구성하는 언어로 선택되었다. 
 

모성 정치와 ‘엄마 구청장’

돌봄, 상생, 살림을 새로운 시대의 대안적 가치로 강조하는 전략은 한국의 진보 여성운동 진영에서 끼워 넣기가 아니라 새 판짜기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2000년 이후부터 꾸준히 주장되었다. 또한 2005년 합계 출산율이 1.08이라는 통계청의 발표 이후 인구 감소와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가시화되었던 것도 ‘모성 정치’라는 슬로건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된 근거 중 하나였다. 이런 사회적 맥락 속에서 2006년의 지방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구 열린우리당)의 여성 조직과 진보 여성운동 진영의 합의 하에 ‘모성 정치 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1월 22일 한겨레신문은 “여성 정치인 리더십, ‘남성형’에서 ‘엄마형’으로”라는 표제를 단 기사를 발표하며 새로운 여성 리더십이 더 이상 남자 같은 여자가 아니라 부드럽게 보살피는 ‘엄마형’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모성 정치를 내세운 대표적 문구

 

그리고 급기야 2010년 지방 선거에서는 구청장 후보로 나선 여성후보들이 모성 정치를 다시 대중 언어로 풀어낸 ‘엄마 구청장’이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나 육아부터 가사 노동, 간병에 이르기까지 사회 안전망의 대부분을 이미 어머니들의 너무 많은 돌봄 노동으로 해결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모성 정치’ 선언과 ‘엄마 구청장’이라는 구호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보다는 ‘엄마 노릇’의 피곤한 현실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선거 당시 내가 사는 지역에도 예비 후보로 ‘엄마 구청장’ 현수막이 걸렸는데, 이를 본 동네의 중년 여성들은 “아니 엄마가 얼마나 바쁜데 구청장 노릇 할 시간이 있어?”라며 ‘엄마’ 정치인의 등장에 실소를 보냈다. 사회적 맥락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선언만 존재한 모성 정치 선언이 정상가족 중심적이고 성별 분업을 지지하는 구시대적인 낡은 언어로 비춰진 셈이다.  

남성 중심적인 대의제 내에 여성들이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가정은 여성 대표가 더 청렴하고 도덕적이며 공동체에 헌신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기대는 여성이 가진 도덕성의 특징이나 본질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지속되어온 남성 엘리트집단 사이의 부당하고 불공정하고 부패한 정치 문화에 여성들이 비교적 덜 노출되어 있다는 경험적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모성 정치와 엄마 정치인이라는 수사를 통해 새로운 여성적 보편의 언어를 만들려고 한 시도들을 원래의 의도처럼 본질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공적 담론에 기입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성 연대(old boys network) 바깥에 있다는 것은 (기존의) 권력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때문에 여성들이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형식상의 양적 변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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