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징표(scalp/stigma/token)적 대표성의 위험

   

유엔 성별권한척도(GED)에 따르면 한국은 2009년 전체 109개국 중 61위이다. (같은 해 GDP 순위는 15위다.) 경제 성장과 법 제도의 정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성권한척도가 낮은 이유는 정치·경제의 상위 5% 집단에서 남성 중심성이 여전히 완고하기 때문이다. (각국의 여성 의원에 대한 현황은 다음 링크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ipu.org/wmn-e/classif.htm)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시민들의 직접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의 경우 아예 대표성의 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명박 정부는 여성이 과소 대표되고 있다는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정권의 임명직 여성 장관의 비율은 역대 어떤 ‘문민’ 정권보다도 더 낮다. 이 정권은 이미 치러진 선거의 법적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 대표성 자체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틀러도 선거를 통해 뽑혔다.  

 


  1932년 히틀러의 선거 포스터
이미지 출처: http://rexcurry.net/socialist-propaganda/posters1.html
 


대의제 선거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유일한 방책도, 민주주의의 정신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그릇도 아니다. 대의제 선거가 ‘민주주의’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대표성의 위기’에 대한 내적 긴장이 살아 있어야만 한다. 대의제 선거는 다수결의 승리가 아니라 언제나 국민 안에 소수자와 반대자의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정치적 형식이다. 따라서 대표성의 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동안 배제되어 있던 집단이 대표성의 문제를 제기하며 권력 배분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표성의 문제를 환기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충분히 대표되지 않았다는 선언과 주장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으로서 명백히 민주주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타자로서 배제되어온 집단이 처음으로 대표성을 획득하기 시작할 때는 언제나 상징적인 징표로서만 머물게 될 위험을 안게 된다. 
 

징표로서 타자화된 여성

특히, 성적 타자로서의 여성은 그 가시성으로 인해 언제나 징표가 되는 위험에 처한다. (단 한 명의 여성이 얼마나 눈에 잘 띄는 존재겠는가.) 고전적인 의미에서 징표(scalp: 승리의 징표로 챙기는 머리 가죽 벗기기 풍습에서 유래된 말이다)가 된다는 것은 매개이자 전리품을 뜻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나눠가지는 반지, 산 정상에 올라가서 꽂는 깃발, 우승자에게 수여되는 메달 같은 것이 이러한 종류의 징표다. 이때 징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사랑, 승리, 성취) 등을 눈에 보이는 사물(반지, 깃발, 메달)로 변환시켜 간직하도록 해주는 상징적 역할을 한다. 부족 간의 평화 협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성을 교환할 때 여성은 곧 평화를 상징하는 전리품, 즉 징표가 된다.

그러나 약속이 깨지는 순간 징표의 의미는 변한다. 자민족 여성의 비극적 죽음, 강간, 고난은 곧 깨진 약속의 증거로서 제시된다. 이때 여성은 희생자로 징표(stigma: 소나 말에게 불도장을 찍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더럽혀진 명예를 뜻한다)된다. 공동체의 타자였던 여성이 가장 숭고한 국민으로 통합되는 순간은 그녀가 명백히 외부에 의해 죽음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했을 때이다.
한편, 희생자로서의 징표(stigma)가 아니라 공동체를 직접 위기에서 구하는 징표적 대표로서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프랑스의 구국 영웅 잔 다르크나 3·1운동의 징표 유관순처럼 말이다.  


 

잔다르크
이미지 출처: http://www.biographyonline.net

유관순
이미지 출처: http://www.yugwansun.com
 


한명숙 여성 총리의 탄생 역시 참여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때 징표(token: 명목상의 표식, 화폐라고 ‘치는’ 것들,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있는 자리에 끼워 넣는 것 등을 의미한다)적 대표가 되는 것은 민족 혹은 국가의 대표로서의 상징적 표식이 되는 것이다. 국가와 공동체의 위기는 그동안 배제되었던 타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로 작동한다. 징표적 대표는 국가를 ‘대표한다고 치는’ 것, 위기의 순간이기 때문에 명목상 대표 자리를 넘기는 것, 혹은 성차별의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치기’ 위해 끼워 넣는 것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론 위기 순간이 지나면 다시 징표적 대표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스피박의 말대로, “하나의 <징표(token)>로서 비추어진다는 것은 언제나 침묵당하는 행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입장에 처해진다는 것은 지배권이 행하기 쉬운 동질화와 일맥상통하면서, 그 말하기를 듣고 있는 지배권의 청중들은 그 징표적 입장이 대변하고 있는 그룹의 관심사를 모두 포함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야트리 스피박, 태혜숙 옮김, 《다른 세상에서》, 여이연, 2003, 61쪽) 
 

최초의 여성, 최소한의 여성

어떤 분야에서 최초의 ‘여성’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징표(token)적 대표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 예외적인 인물들은 성차별주의가 “사라졌다고 치자”는 징표적 증거로서 제시된다. 지금까지 배제되어왔던 사람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그 자체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성취되었다는 ‘징표’가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성취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지금까지 게임의 규칙이 불평등했다는)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증거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등장인물이 민주주의의 성취에 대한 징표에 머물게 될 때, 이는 관용을 베푼 지배자의 알리바이로 작동하며 지배의 규칙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만약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한들 그것이 정치에서의 성차별이 사라졌다는 증거가 될 리 만무하다. 오히려 박근혜가 여성 대통령이 되는 순간, 오히려 여성이 정치에서 과소 대표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은 비판의 힘을 잃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여자가 대통령도 하는 시대인데, 뭘 더 바라냐?”) 이것이 여성이 징표적 대표에 머물게 되었을 때 전형적으로 생겨나는 위험 중 하나다.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앙겔라 메르켈
 


또한 최초의 여성은 자칫 최소한의 여성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레나토 로살도는 예전에 제외시켰던 범주의 사람들인 비유럽, 유색 인종, 여성과 같은 이들에게 문호를 개방할 때 이들에게 “들어와서 앉아, 단 너는 우리 규범을 준수한다는 조건으로 여기 있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이들에게 임시적으로 일회적인 영주권만을 발급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기존의 규칙에 따를 수 있는 위치 자체가 특권적이라는 점을 무시하며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급히 내보내는 회전문”에 불과하다. (레나토 로살도, 권숙인 옮김, 《문화와 진리》, 아카넷, 2000, 10쪽) 최초의 여성이 징표적 대표에 머물러 기존의 규칙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이 최초의 여성이 될 수 있는 여성은 최소한도로 좁혀진다. 즉 성차만 제외하고는 모든 자격을 갖춘 여성들로 말이다. 지난 30년간 76명의 대법관의 98%는 남성들이었다. 75%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다. 2명의 여성 대법관 역시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이 여성들은 성차가 ‘아니었다면’ 정당하게 기용될 만한 인물들, 즉 성차 말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는 않는 자격을 갖춘 인물이다.

즉 성차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성차를 ‘없는 걸로 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여성들은 결코 성적 타자로서의 여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때문에 대표자로서의 여성들이 등장했다고 해서 이것이 여성 집단 전체의 권한이 강화되는 증거라고 볼 수는 없다. 최초의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을 비롯하여, 최초의 여성 총리의 한명숙 등의 등장은 한국의 정치 환경에서 성별의 벽이 점차 깨어지고 있다는 상징으로 자주 인용되었지만, 과연 한국 여성들의 처지가 이 최초의 여성들이 유리 천장을 깬 이후에 더 나아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여성의 비정규직화는 더욱 가속되고 있고 빈곤은 여성화되고 있다. 몇 명의 여성들이 징표적 대표성을 가지는 것은 여성‘도’ 대표가 될 수 있다는 증거가 될지 몰라도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남성 중심적으로 분리된 ‘공적’ 영역에서 과연 여성은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얘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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