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자는 여자로서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

   

여자의 자격: 지우마와 힐러리의 젠더트러블

2010년 11월 브라질에서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전 8년간 집권했던 노동당 정권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지우마의 탄탄한 공직 경력을 바탕으로 거둔 승리였다. 무엇보다도 지우마는 브라질에서 공화정을 도입한 이후 122년 만에 탄생한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지우마는 반대파로부터 두 가지 종류의 공격을 받았다. 하나는 그녀는 룰라의 꼭두각시라는 흑색선전이었다. (룰라가 부패 스캔들이 터졌을 때 그녀가 보여준 ‘의리’가 빌미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여성 문제였다. 브라질은 인구의 70% 이상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다. (주지하다시피 카톨릭은 낙태와 이혼 문제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사회민주당(이 보수파라니 놀라운 일이지만)이 주축이 된 반대파에서는 지우마의 두 번의 이혼 경력을 문제 삼고 낙태에 대한 입장을 심문했다. 선거 초반 지우마는 낙태하는 여성을 처벌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반대편이 그녀에게 ‘죽음의 사도’라는 별칭을 붙이며 집중 공세를 펼치자 그녀는 낙태 반대로 입장을 선회한다. 또한 건장한 체격과 바지를 즐겨 입는 패션센스를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젠더 표현은 종종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20대에 무장 게릴라 활동으로 감옥에 가서 고문을 견뎌냈던 지우마에게 이런 조롱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의 36번째 대통령이자 최초의 여성 대통령
 


지우마가 겪은 젠더 갈등은 2008년 민주당의 대권 후보에 도전한 힐러리 클린턴에 비하면 약과였다. 지우마가 주로 카톨릭 교회와 손잡은 보수파 남성들로부터 공격받았다면, 힐러리를 가장 괴롭힌 건 반대파 여자들이었다. 힐러리가 한 인터뷰에서 “나는 쿠키는 잘 못 굽지만 정치와 법 같은 다른 일은 잘해요”라고 한 말은 전업주부들의 분기를 일으켰다. 나중에 힐러리는 쿠키를 굽는 모습을 보이며 이들의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하지만 한번 돌아선 남부의 여심은 좀처럼 힐러리에 대해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고,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패션은 늘 하마평에 올랐다.  

하지만 힐러리의 가장 열성적인 지지 그룹 역시 여자들이었다. 모금부터 홍보, 조직에 이르기까지 힐러리를 돕는 탄탄한 여성 조직은 그녀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평가된다. (2008년 힐러리 대선 캠프의 총지휘자는 패티 솔리스 도일이었다. 그녀는 미 대선 캠프 총지휘자가 된 최초의 히스패닉 여성이기도 하다.) 힐러리의 삶은 그 자체로 여성의 사회 활동과 정치 참여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입장으로 비춰졌으므로 힐러리에 대한 지지/반대/유보 등을 결정하는 것은 곧 여성주의 이슈에 대한 특정한 입장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힐러리에 대한 미국 여성들이 복잡한 심경에 대해서는 30여명의 여성 저널리스트와 작가, 페미니스트 등의 글을 모은 이 책을 추천한다. 수잔 모리슨 외, <힐러리 미스터리>, 유숙렬‧이선미 역, 미래인, 2008)

남자들이 힐러리에게 가진 반감은 무의식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거의 공포심에 가까운 형태로 드러났다. 2008년 오바마와의 민주당 대선 후보를 놓고 경쟁할 때 등장한 ‘힐러리 호두까기 인형’은 힐러리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상품화한 가장 재치 있는 농담 중 하나로 회자된다. (이 바지 정장을 입은 여자 인형의 바짓가랑이 사이에 호두를 넣으면 호두가 분쇄된다! 호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눈치 빠른 독자들이라면 알아차리셨을 것이다.) 

 

힐러리 호두까기 인형 (nutcracker)
 

 
이 대단한 여성들이 ‘보통’ 여자를 대표할 수 있을까

힐러리와 지우마 모두 미국의 민주당과 브라질의 노동당을 대표할 만한 자격을 갖춘 후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과연 이 남성 중심적인 엘리트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여성들이 ‘보통’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여성과 대표성을 둘러싼 재현의 문제가 미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지만 우리는 그녀의 생물학적 성차가 정치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 없다. 박근혜를 최초의 여자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잠시 나온 적도 있지만, 박근혜가 여성 문제에 대한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불명확하다. 박근혜는 여자지만, ‘여성 정치’인은 아니다. 물론 여성 문제에 대한 뚜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여성 대표성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힐러리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여성들은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생각하며 환호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힐러리가 전업주부를 깎아내린다며 적대한다.

자유민주주의 선거제도에서의 ‘대표’(Representative)란 언제나 보편과 특수라는 이중적인 위치를 넘나드는 운동을 필요로 한다. 선출직 대표는 대중들의 대리인이라는 점에서 대중들 중 한 명으로 환원 가능한 ‘보통’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출직 대표는 그 자리의 유한성 때문에 그 자신의 특이성, 즉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차이를 강조해야만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명박 정부가 선택한 인사들 대부분이 고소득 강남 부자이며 더구나 특정 교회 출신이라는 사실은 대표성의 위기를 불러일으켰지만,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통해 위기의 불꽃은 종종 진화되었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 중 한 명이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당대 최고의 정치‧군사 엘리트였지만 ‘보통’ 사람이라는 수사로 당선되었다. 진짜 보통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 보통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대의민주제에서의 기대되는 대표성의 핵심이다.

대표에게 기대하는 대중들의 이중 심리는 혹자들이 말하듯 ‘허위’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대의민주제에 내재된 모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자만이 대표성의 위기를 겪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대표성의 문제는 그동안 남성들에 의해 여성이 대표되어 왔으며 여성은 언제나 차이화된 기표로서 드러나 왔다는 점에서 더욱 심층적인 위기를 내포한다. 더구나 과소 대표되어 있는 소수의 여성 정치인들에게 과도한 징표적 상징성(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여성 총리 등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현실에서 여성이라는 성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차이를 끝없이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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