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글을 열며

   

PC통신 시절부터 아고라에 이르기까지 동성애와 관련된 논쟁은 늘 동성애 자체에 대한 허용과 금지를 결정하는 판관들의 잔치였다. 가끔 용감하게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며 동성애를 두고 찬반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동성애를 극렬하게 싫어하는 몇몇 이들은 기어이 찬반의 문제로 이야기를 끌어가곤 했다.

그런데 2008년 레즈비언 최현숙이 종로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하고 선거 운동을 시작한 이후에 재미있는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최현숙의 커밍아웃과 출마 선언은 포털 사이트 <다음>의 실시간 검색어 2위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당시 나는 최현숙의 선거 운동 본부에서 정책을 만드는 일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기사와 댓글, 게시판 등을 모니터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관련 기사의 댓글 분위기는 이전의 동성애 찬반 논쟁과는 좀 달랐다. 아주 극렬하게 혐오감을 표하는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동성애자와 같은 성소수자가 국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이 등장했다. 유사한 질문이 후보가 속해 있던 진보신당의 내부 게시판에서도 나왔다. 최현숙이 커밍아웃 하는 건 관계없지만 이제 막 탄생한 진보신당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이 동성애자인 건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만약 최현숙의 출마와 커밍아웃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동성애자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왜 굳이 커밍아웃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은 사적인 것으로 공직 후보의 자격과는 관계없는데 왜 굳이 밝히느냐며 의아해하는 이도 있었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 2009> 감독: 홍지유, 한영희
이미지 출처: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rainbowact/
 


찬반 논쟁이 언제나 편 가르기와 증오만을 남기는 반면 이런 논쟁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다름 아닌 민주주의 아닌가. 바우만은 민주주의는 결국 사적인 문제가 공적 문제로 변환되고 공공 안녕이 사적 기획과 과제로 변형되는 지속적인 번역 과정이 실행되는 것이며 이 과정이 실행되는 장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빌려 “아고라”라고 칭한 바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최전선의 민주주의”, 권터 그라스 등저, 이승협 옮김,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평사리, 2005, 41쪽) 누가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대표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자본과 결탁한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냉소는 이러한 대표성에 대한 공적 논쟁의 장을 닫아버렸다. 심지어 통치자가 국민을 대표하기 위해 자신의 특권을 스스로 버리는 일은 민주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능한 행위로 이해되었다. 민주주의는 점점 무기력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등장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대표 가능성에 대한 공적 논쟁의 장을 다시 열게 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는 시민들이 자유토론을 행하는 장소였다.
이미지 출처: http://www.greeklandscapes.com/greece/athens_agora.html
 


이 글은 2008년 4월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 실은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짧은 글에서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는 칼럼을 읽은 이들이 던져준 몇 개의 새로운 질문들과 당시 지면 관계상 미처 다 담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이어가보려고 한다. 칼럼의 제목이었던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는 동성애자의 대표 가능성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만약 동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할 수 없다면, 이성애자가 국민을 대표하는 것은 가능한가를 묻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이 제목은 ‘하위 주체(subaltern)’에 대한 유명한 논문 제목인, 가야트리 스피박의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를 변용한 것이었다. 스피박은 하위 주체는 말할 수 있다/없다의 진리 게임보다는 그 질문 자체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다만 한 가지, 하위 주체가 말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나 말할 수 없다는 쪽이나 모두 하위 주체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는 점은 공감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성애자는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자칫 ‘자격 여부’를 심문하게 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질문이 아니었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질문의 출처는 동성애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하던 이들에게서 나왔더랬다.)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반성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 통의 메일이었다. 자신을 40대 초반의 구의원이라고 밝힌 이는 칼럼을 읽고 “아이도 안 낳고 천륜을 거스르는 동성애자와 같은 돌연변이들이 감히 어떻게 국민을 대표하는 신성한 국회의원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느냐”라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다”고 글을 실은 언론매체까지 싸잡아서 꾸짖는 성난 익명의 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어떻게 해서 자신은 국민의 한 사람이 되고, 나는 돌연변이의 옹호자로서 국민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이것이 “누가 국민을 대표하는가: 성적 타자의 대표 (불)가능성”이라는 제목이 탄생하게 된 과정이다.

성적 ‘타자’들이 공적인 장에서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타자’들이 ‘우리’에 대한 상상적 관념을 구성할 수 있는가. 누가 성적 타자의 자리에 있는가. 대표자의 자격 요건에 성 정체성이나 성별과 같은 차이들은 아예 고려되지 않아야 공정한가. 대표한다는 것은 개별자가 지니고 있는 모든 차이를 중화하고 자신을 가장 보편의 존재로 만드는 과정인가. 이렇게 구성된 보편의 모습은 어떠한가. 국민은 과연 누구의 모습으로 형상화되는가 등 대표성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던지고 답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여성은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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