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교과서와 선생님의 말씀, 그리고 틈틈이 읽었던 몇 권의 책들만이 내 지식의 전부였던 때에는 역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도 당연한 것이 그 시절의 나에게 있어 역사란 국사책과 세계사책에 수록되어 있는, 외우고 또 외워야 할 수많은 정보들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눈으로 역사를 봐야 할 것인지, 내가 배우고 있는 겪고 있는 역사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고민할 시간도, 능력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열심히 읽고 외웠던 국사교과서가 나라에서 허가한 단 한 종류의 역사라는 것, 그 한 종류의 역사교과서에는 수록되지 않은 많은 역사들이 끊임없이 읽혀지고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대학교에 들어와서야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조금이나마 역사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역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 E.H.카"라는 한 문장을 열심히도 외웠던 까닭에, 많이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E.H.카의 이 책을 손에 잡게 되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뜬구름 잡는 식으로 이해했던 저 유명한 문장의 의미가 새삼스레 와닿는다. 총 여섯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원고는 강연을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자신의 신념을 설득력있게 설파하는 카의 글은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청중이 무엇에 대해 궁금해할지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한 사람처럼 흐름에 막힘이 없다.  각 장의 구성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여섯 장의 구성 또한 그러해서 1장, 2장 읽어나갈 때마다 매주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것도 지난 강의 내용을 상기시켜주면서 이번 강의를 이끌어나가고 마지막에는 다음 강의 주제에 대해 자연스레 소개하고 끝마치는 유능한 교수님에게 말이다.

  카는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과거의 사실만을 수집하는 수집가로서의 역사가나 역사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회의주의에 빠져버린 회의적 혹은 지나친 상대주의적 역사가들을 비난하고 경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내 경우에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역사는 그저 과거의 사실들을 추려서 수집한 기록에 지나지 않았으며 한 때 대학시절에는 과연 과거의 사실에 대해 진실한 역사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지, 보는 이에 따라 역사일수도 잊혀진 과거의 기억일 수도 있는 역사가 어떠한 의미라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곤 했다. 카를 알기 전에, 이미 카가 가장 경계하고 반대했던 종류의 역사를 겪고 느꼈던 것이다. 과거의 수많은 사실들과 역사가의 관계, 개인으로서 동시에 한 사회의 일부로서의 역사가와 역사, 과학과 역사, 역사의 객관성, 역사의 진실성, 진보하는 역사라는 개념, 역사적 사실의 인과 혹은 전후관계....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하고 고민해보게 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대해 카는 솔직한 자신의 대답을 내놓는다.

  나는 카의 견해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만한 전문적 지식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카의 모든 대답에 공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개인적으로는 문학과 신학을 전혀 쓸데없는 학문 취급하는 듯한 태도에 마음이 좀 상했었다.....^^;). 하지만 역시 어느 분야에서건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역사학이라는 학문분야를 위해 쓰여진 책이지만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는 균형잡힌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속의 개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위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이 책이 발표된 지도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기에 이미 카의 기본적인 견해는 널리 알려졌고 달라진 시대 상황에 따라 역사연구의 경향이나 역사를 보는 시각 또한 매우 다양해졌다. 카의 역사연구방법 또한 그의 말마따나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시대와 이 사회에는 현실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며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다. 1960년대의 영국과 2000년대의 대한민국이 같은 역사적 가정과 동일한 역사적 이론으로 설명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말이다.  내 마음에 보다 오래 남은 것은 그의 견해가 오늘날에도 진정 옳은 것인가 아닌가하는 문제보다는 이 책 곳곳에 자랑스럽게 배어있는 역사가라는 직업에 대한 그의 소명감과 자부심이었다. 역사라는 학문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인식을 바꾸어준 이 책과 이 책의 저자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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